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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히말라야의 무스탕 계곡-무스탕 왕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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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히말라야의 무스탕 계곡-무스탕 왕국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7. 29. 22:23

정말 이곳이 불교도들의 정신적 피난처로 알려진 샹그리라 계곡일까.
미국의 공영채널 PBS가 네팔 히말라야의 무스탕 계곡에 버려진 티베트 불교의 동굴 사원을 조명하면서 이곳을 샹그리라로 추정하는 다큐멘터리를 18일 밤(이하 현지시간) 방영했다.
17일 내셔널 지오그래픽 뉴스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이 동굴 사원이 처음 알려진 것은 2007년.미국인 연구자들과 히말라야 전문가인 브로턴 코번,베테랑 산악인 피트 에이턴스 등 탐사팀에 의해서다.이들은 고대 무스탕 왕국의 영토였으며 지금은 네팔에 속한 무스탕 계곡의 절벽을 뚫어 만든 동굴 속에서 15세기 종교 문서와 빼어난 벽화들을 발견했다.

신비로운 이 사원들은 무스탕 계곡 위쪽에 위치해 있고 네팔 정부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해 탐사하기 어려웠다.오늘날 이 지역은 한 해 1000여명의 외국인만이 출입을 허가받아 들어간다.
탐사대는 55첩으로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그림과 정교하게 묘사된 벽화 등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지난해 탐사대는 다시 이곳을 방문해 600년 된 인간의 유골들과 흔히 사본장식(寫本裝飾-그림에 수(手)작업을 한 성서 문자를 곁들여 금·은으로 장식하는 예술)으로 알려진 작은 그림들이 들어간 값진 고대 문헌 더미들을 복원했다.이렇게 성스럽게 몰래 감춘 것들은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이 1933년 내놓아 큰 인기를 끌었던 소설 '잃어버린 낙원'에 등장하는 불교도들의 숨겨진 계곡들에서 발견된 보물들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약탈자들은 수세기 동안 동굴들을 공격해 고대 문헌으로부터 값나가는 예술 작품을 떼내 갔으며 순례자들은 기념품 수집 차원에서 동굴의 벽들을 훼손했다.
하지만 탐사대는 30권 정도의 책에서 나온 문헌들을 수집해 무스탕 중앙사원의 저장고로 현재는 옮겨놓은 상태.산악지역 특유의 차고 건조한 공기는 불교와 그 이전 티베트인들의 토착 종교였던 뵨(Bön)의 문헌들이 뒤섞여 있다고 코번은 전했다.
이는 뵨에 대한 믿음이 티베트인들이 불교로 개종한 8세기 이후에도 1~2세기 가량 살아있었음을 의미한다.
탐사대는 무스탕 왕들이 뵨의 경전들을 파괴하는 대신 동굴에 버려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디지털 히말라야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마크 튜린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동의하면서도 종교 문헌을 의도적으로 숨겨온 티베트인들의 전통과 연결지을 수도 있다고 했다.
중국이 점령한 티베트 자치구에서도 이곳은 문화적으로 철저히 고립돼 '세계의 끝'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따라서 이번 발견은 무스탕이 "수많은 세월 절대적으로 중립적이어서 역동적이며 문화적으로 풍족하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해결책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튜린은 정리했다.
샴발라로 알려진 불교도들의 영적 낙원이 이 숨겨진 계곡과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탐사대는 보고 있다.
코번은 "샴발라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히말라야 계곡 여러 곳과 많은 곳에 산재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며 "불교 관습과 원칙이 위협받은 갈등의 시기에 이 숨겨진 계곡들이 만들어졌다.이 계곡들은 소위 숨겨진 보물 문헌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샴발라를 찾아서'의 저자 일레인 브룩은 무스탕의 숨겨진 계곡들은 "실제로 신비의 땅 샴발라의 여러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힐턴은 그의 작품에서 샴발라를 문화의 지혜들이 저장된 고립된 산악지역 샹그리라의 '잃어버린' 계곡들을 바탕으로 썼다.
그러나 브룩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오늘날 누구도 샴발라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샹그리라이건 아니건 무스탕의 동굴들은 보존되어야 할 절박한 위기에 몰려있다.약탈자뿐만아니라 6000년된 동굴들은 기념품 수집가들,침식,지진,빈번하진 않지만 홍수 피해로 무너져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네팔의 과거 왕국이었던 무스탕 왕국의 지역은 여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여행을 위해서는 네팔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네팔의 변방의 하나이며 히말라야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산맥으로 둘러싸인 무스탕 왕국은 고원과 협곡의 땅이며, 해발 4,000m 가 넘는 고산지대가 대부분인 세계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지역이며 북으로는 티벳과 접해있다. 15세기 이래 변화가 거의 없는 이곳은 세계에서 티벳인들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가 카투만두와 중국을 연결하게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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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게야말로 무스탕의 속살이며 원형이다.

로라(Lo La)에 도달해 로만탕을 내려다보고 있느니, 마치 무스탕 여정이 종지부를 찍은 듯한 감회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로만탕은 여정의 중간 기착지일 뿐 이곳을 둘러본 후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 흙더미가 곧 덮칠 듯하지만 수루캉은 평온하기만 하다.

차갑고 거센 바람에 타르초와 룽다가 펄럭이는 언덕 로라. 룽다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바람을 피해 자리 잡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광선이 눈을 멀게 할 지경이지만 이미 황홀한 기분에 취해 있는 상태다. 흙먼지가 이마와 뺨을 쓸고 간다. 아득한 언덕을 수없이 넘어 도착한 땅.

▲ 이곳에선 해발 4,015m도 언덕에 불과하다.
이곳은 티벳불교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이 살기에 매우 척박한 곳이다. 트레킹을 하는 동안 간간히 이곳은 인간의 땅이 아니라 신들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탄트리즘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간직한 도시가 로만탕인 것이다.

무스탕의 중심 로만탕

찬 바람에 몸이 시릴 때쯤 언덕을 내려선다. 조심스러움과 기대감을 안고 도시 안쪽으로 향한다. 성곽을 천천히 걸어도 한 바퀴를 도는 데 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성곽은 무스탕에서 가장 큰 규모다. 성벽은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모래 폭풍과 한기를 막아내는 역할도 하고 있다.

로만탕 안쪽에는 4층의 왕궁과 2, 3층 높이가 되어 보이는 두 개의 초르텐이 나란히 붙어 있다. 공동으로 물을 쓸 수 있는 시설도 있었는데, 다른 마을과 다른 것은 물이 나오는 파이프가 두 개나 된다는 것. 무스탕 전 지역은 물이 귀하기 때문에  대부분 파이프 하나로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 왕이 사는 도시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무리를 지어서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과 헤드폰을 끼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들어 왔다.

로만탕에서 가장 큰 로지는 왕궁과 같은 4층 높이가 되는 곳도 있었다. 이곳 풍광은 이제까지의 여정에선 볼 수 없던 것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이 지닌 신비스러움이 바깥세상처럼 점점 서구화 되어 가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이따금씩 보이는 이방인들과 공산품을 파는 가게, 기념품을 진열해 놓은 상점도 눈에 들어 왔다.

▲ 로만탕에서 멀지 않은 저 너머가 티벳 땅이다.

▲ 사원 마당의 꽃을 바라보고 있는 라마승이 또 다른 꽃이다.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들이 저급한 문화로 인식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발길이 닿지 않던 많은 곳들이 서구화 되는 과정에서 유구한 전통이 사라져 버렸으며, 마치 모든 서양문화가 우월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물질을 앞세워 서구화의 공세를 펼치려는 기미가 이곳에까지 와 있었다. 이러한 현실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로만탕 외곽지역

▲ 신랑과 신부는 10여 살 차이가 나지만, 푸른 터키석으로 치장한 신부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로만탕을 둘러본 우리의 관심은 인근 지역으로 향했다. 하루에 왕복할 만한 거리의 몇몇 지역을 선정해서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북쪽의 라텅도반 지역과 북동쪽의 갸르푸라는 마을을 정해놓고 잠자리에 든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야크털을 덮고 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야크털로 만든 카펫 위에 가져간 침낭을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크털 카펫은 자주 세탁할 수 없는 형편이고, 이미 몸무게로 다져져 마치 휘는 고무판 같은 형편. 그래서 이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서서히 근질거리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햇빛에 말리는 경우도 매우 드물고, 실내는 언제나 어둡다. 기온차가 심한 이곳 기후 특성상 작은 창 한둘이 있을 뿐이다. 모든 물자가 귀한 이곳에서 단열이 되는 커다란 통창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현지인 생활과 비슷해지지만 잠자리만큼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카펫에 서식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벌레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 차례의 시도로 몸 여기저기가 벌레 물린 자리로 변해 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로 인해 트레킹 내내 신경을 써야 했다. 야크 털을 덮고 잠자리에 들 만한 호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여행자의 긴장감을 해소하는 데 있어 수면의 시간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들은 아름답다. 남걀 마을 가까운 곳에서 만난 엄마와 아이들이 수로를 따라 귀가하고 있다.

야크털로 만든 카펫이 깔린 이 긴 흙 침대는 언제나 집안의 남자 어른 차지가 된다. 그러니 우리에게 내준 흙 침대는 특별한 대접인 것이다. 손님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베푸는 마음씨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 일치한다. 내 집에 온 이방인에게 서슴없이 최고의 잠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있었던가?

▲ 무엇이 어미의 품을 대신 할 수 있으랴! 디가온 텃밭에서 만난 가족.
북쪽의 라텅도반은 해발 약 4,300m로 야크가 사는 곳이다. 고원의 초지에서 만난 야크의 크기는 어림잡아도 3m가 넘어 보였다. 몸무게가 500∼1,000g에 이르는 오래된 생명체와 눈을 맞추고 있으니, 신성한 기운과 두려움이 함께 든다.

녹색의 터키석 목걸이를 두른 여인네들이 그들의 유목 텐트 안으로 인도한다. 티베트에서 주식으로 먹는 볶은 보릿가루로 만든 참파와 야크치즈로 만든 버터차를 내놓는다. 찻잔에는 손으로 붙여놓은 작은 버터조각들이 있었다. 이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차를 마실 때마다 계속해서 잔을 채워준다. 몇 차례의 손사래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서야 겨우 첨잔을 멈출 수 있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객이지만 대접은 극진했다.

북동쪽의 갸르푸에는 오래된 동굴들이 있다. 과거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전한다. 산을 파고 들어간 모습이 마치 개미굴마냥 연결되어 있다. 허리를 숙여야 하는 높이로 여러 층을 파들어갔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지체되어 태양은 사라지고, 추위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한낮의 뜨거움과 달빛 아래 깔린 추위는 객을 빠르게 지치게 했다. 가도 가도 불빛이 없는 길, 특별히 준비한 말을 타고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의 무게는 더해갈 무렵, 가이드 삼뚝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옴마니밧메흠, 옴마니밧메흠, 옴마니밧메흠......” 삼뚝은 오랫동안 라마승으로 생활하다 환속한 스님이다. 그의 진언은 달빛처럼 퍼지기 시작했고, 오랜 피로를 지고 다니는 여행자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진언은 마을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 갸르푸 마을 뒤에는 오래 전 주거지로 썼던 동굴들이 개미굴 마냥 남아 있다.
로만탕과 가까운 북쪽에 남걀 마을이 있고, 사원도 있다. 외부인 출입이 엄격하게 통재된 사원에 어렵사리 들어갈 수 있었다. 남걀 사원의 문을 들어서자 마당이 나타났고 ㅁ자로 지어진 사원 형태가 시야에 들었다. 마당 가운데에는 7~8m 높이의 곧게 뻗어 올라간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윽고 법당 내부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삐이익~ 나무로 된 오래된 문이 열렸지만,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이 밝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부 모습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뒤를 보자 조금 전에 들어섰던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마주쳤다. 로만탕에서 느꼈던 애린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햇살이 부서진다.

이곳을 찾는 이들마다 품고 왔을 소망들이 법당 바닥을 밝히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발걸음과 오체투지의 흔적으로 법당 바닥은 기름칠을 한 것 마냥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누가 이같은 마음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곤궁한 형편 속에서 마련한 야크 기름을 공양하며 머리를 조아렸을 수많은 이들. 그 정성스러움이 법당 바닥을 별처럼 빛나게 한 것이다.   

 

 

더 깊은 곳으로

▲ 이곳에 가 보지 않았다면 상상에도 없었을 강 데창 콜라.

로만탕을 떠나 무스탕의 남동쪽 변방으로 길을 잡는다. 온 종일 걸어 도착한 곳은 해발 3,600m의 디가온.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모서리까지 가니 바람은 더욱 거세게 몸뚱이를 흔든다. 연약한 지반의 흙은 발밑에 깔린 모래와 자갈을 흘러내려 보낸다. 아찔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스릴을 느끼며 500m 아래에 놓인 동네를 살핀다.

푸융 콜라(강)가 마을 앞을 흐르고, 그 너머로 또 다른 마을인 수르캉이 보인다. 수르캉 뒤로는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위협적인 절벽이 자리하고 있다. 두부를 잘라놓은 것 마냥 평평한 절벽엔 거대한 균열이 나있다. 융기한 지각이 갈라진 것일 게다. 저리도 편치 못한 자연 조건에서도 삶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디가온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모래로 이루어진 흙은 발목을 잡는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장대 위에 야크털이 매달려 있다. 악귀를 쫓는 상징물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솟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옥상에는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는데, 짐승의 머리뼈와 가죽을 높은 곳에 달아 놓은 것.

숙소를 정한 후 마실을 나간다. 골목을 따라 흐르는 작은 시내는 관계수로의 역할을 한다. 수도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물이 매우 귀한 탓에 작은 물길이지만 텃밭들을 빠짐없이 들르게 되어 있다. 바람이 거세고 모래까지 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텃밭들은 성인 어깨 높이쯤 되는 담장을 두르고 있다.

▲ 협곡의 틈바구니, 척박한 땅에도 메밀은 꽃을 피웠다.


인기척이 나는 텃밭에 들어가는 순간, 그동안의 무스탕 여정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엎은 엄마가 등 뒤의 자식에게 작은 열매를 먹이고 있고, 한 손에 먹을 것을 쥔 또 다른 아이는 엄마의 치마 뒤에 숨어 이방인을 엿보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자란 열매는 작지만 탐스럽다. 이 작은 녹지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겨울은 길고 추위는 깊을 것인데…. 

일하는 내내 환하게 웃으며, 신뢰로 다져진 따뜻한 눈길을 서로에게 보내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겹겹이 둘러친 척박한 산들과 모래바람 한 가운데 이토록 평온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우리가 진정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은 이런 안온한 빛으로 채워진 시간이다.

▲ 여정의 끄트머리, 아쉬움을 알아차린 듯 무스탕이 모래바람을 선사한다.


여정은 막바지로 치달아 디가온 마을을 빠져나온다. 마을 밖 어귀엔 조그만 탑이 섰다. 탑 안으로 집어넣은 경전이 바람에 날려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누군가의 귀한 마음이 나그네에게 보인다. 모든 것이 귀한 곳이다. 수르캉 마을 뒤에 놓인 산을 넘어 반나절 걸으니 데창 콜라가 길을 가로 막는다.

낭떠러지 지형을 내려가 강바닥에 닿았다. 탁류는 거세게 흐르며 구르르! 구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강바닥에는 많은 자갈들이 있고, 그 돌들이 물살을 따라 흐른다는 것이다. 때론 이 돌들로 인해 강을 건너는 말들이 부상을 입기도 하고 사람들이 다치기도 한다고 한다.

▲ 로만탕을 떠나는 길 또한 로라를 되돌아 나가야 한다.

강폭은 약 2km 정도 되어 보였으나, 우기 끝 무렵이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곳의 폭은 500m 정도였다. 강의 깊이는 허벅지 정도 되었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서 헤치고 건널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수록 수위가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며 막 건너려는 차에 강을 먼저 건넌 현지인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 쪽을 향해 다시 강을 건너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의 비틀거림을 이겨내고 온 고팔이 웃으며 등을 내밀었다. 여러 번의 거절과 손사래, 그리고 망설임 끝에 그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이방인 둘은 그렇게 현지인들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

한숨을 돌린 후 우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우~ 하고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해발 4,015m의 언덕이었다. 급경사를 보는 순간 헛웃음만 나왔다. 그래도 어쩌랴! 걷는 수밖에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동안의 여정을 비춰본다면 무스탕에선 언덕을 넘거나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새로운 풍광이 펼쳐지기 일쑤였다. 물론 지금처럼 숨을 몰아쉬게 되기도 하지만, 똑같은 풍광은 한 곳도 없었다. 모두가 달랐고, 기대 이상의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해발 4,000m가 되면 산소는 평지의 60% 수준이 된다. 경사를 오르는 내내 점점 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50m쯤 오르고 쉬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숨을 몰아쉬다가도 걸음을 멈추기만 하면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덕분에 예상보단 수월하게 언덕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 름을 가르며 야크를 몰고 내려오는 주민들.

고갯마루에서 언덕 너머를 보고 있으니 더욱 막막해진다. 아득한 기분만 드는 또 하나의 불모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했건만 거리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목적지인 탕게는 멀기만 하다. 우린 노을을 바라보고 걷다가 달빛을 벗 삼아 걸어야 했다. 모두의 물이 떨어져서 지친 상태에서 1시간을 더 걸어서야 탕게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든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자 어젯밤에 겪었던 고생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고도 남을 경이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부를 잘라놓은 듯한 협곡이 마을 앞에 가로 놓여있고, 협곡들 사이에 들어선 마을 앞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강변에는 메밀꽃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간밤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비경이다.

더구나 무스탕에서 가장 큰 도시인 로만탕 보다도 훨씬 많은 초르텐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무스탕의 내원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마을 나가서 만난 메밀밭 아낙의 환한 미소가 너무도 평온하게 다가온다. 디가온의 텃밭과 이곳 탕게에서 만난 이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척박한 경작지를 일구는 이들의 표정엔 서로를 향한 신뢰와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타인을 바라보는 눈에는 경계심이 없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심성의 원형을 보았다.

 

구름 경계길 파아 산정

▲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정상에 도달하게 될 테지만 저이도 사람인데….

탕게를 출발해 로만탕으로 가기 위해 지나 왔던 추상으로 향한다. 이 코스엔 해발 4,334m의 언덕이 있다. 일행 중 이곳을 가본 이는 단 두 명뿐. 7년 전에 가 보았다는 요리사 아카바드의 말에 따르면 무스탕에서 가장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파아를 통과하는 이번 여정이 가장 힘들 거라고도 했다. 둘 다 기대가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쉽지 않은 코스가 펼쳐졌다. 파아에 오르기 전에 쉴 만한 곳이 단 한군데 있을 뿐이다. 여독이 쌓인 채 도착한  파아 꼭대기. 그의 말대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비경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눈높이에 놓이고, 바람은 몸을 밀어 올릴 만큼 거세게 불어왔다. 마치 수면의 경계에 놓인 것 마냥 구름 위와 그 아래를 동시에 보게 되었다.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던 설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제까지 걸어서 넘어 왔었던 땅들이 환하게 들어왔다.

 

 

 

 

 



 

▲ 시작점에 다시 와 앉으니, 문이 닫히고 산과 협곡, 그리고 시냇물 같은 눈동자들이 그리워진다.

꿈을 꾸듯, 거짓말을 듣는 것처럼 시야가 뻥 뚫렸다. 족히 40k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지형이 한눈에 펼쳐졌고, 이런 상태가 거의 360도를 돌아가며 이어졌다. 눈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건 볼 수 있었다. 그 크기가 문제일 뿐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선 공기가 ‘맑다’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없다’가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그만큼 투명했다.

땀이 식어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길을 재촉했다. 파아에서 추상으로 가는 길 사이에는 시야코 탕크 단다(Siyako Tangk Dannda)라는 능선이 있는데, 마치 구름 위로 나있는 길들이 이어진다. 9부 능선에 펼쳐진 길을 따라 걸으며 눈높이의 구름을 본다.

이 멋진 구름 위의 길을 통과하면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된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급경사에 도달했다. 급한 마음에 뛰어내려가려 했지만, 그럴 만한 길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폭이었고, 밑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다. 어둠 속에서 첼레의 언덕길 보다 아슬아슬한 길을 내려가야 했다.

야간 트레킹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늦은 저녁 해발 3,050m의 추상에 닿는다. 늦은 시간이지만 우리 일행은 술을 한 잔씩 돌렸다. 모두가 무사히 여정을 끝낸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 구름이 수면처럼 펼쳐지는 곳 파하.

다음날 탕베를 거쳐 카그베니로 오는 길엔 마지막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간다키 강바닥을 걸어서 귀환하는 우리들에게 무스탕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센 모래바람을 선사했다. 고개를 들 수 없는 바람이 강바닥을 할퀴고 지나며 모래들이 뺨을 때렸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그리고 강을 통과하자 이제까지 지나왔던 협곡들이 닫히기 시작했다. 20일간의 여정이 끝나자 안도감 보다는 그리움이 짙게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