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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둔의 왕국 `무스탕`에서.. 안나푸르나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7. 29. 22:04

은둔의 왕국 '무스탕'에서.. 안나푸르나

오름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순리다.

새벽 4시에 시작한 오름이 세시간 반의 사투 끝에 토롱라(5,416m)에서 끝이 났다.

 

토롱페디(4,450m)에서 시작했으니 고소증세에 시달리며 1천m에 가까운 고도를 올린 것이다.  내리막의 끝은 묵티나트(3,760m)이니 1,600m를 내려가야 '안나푸르나 라운딩' 7일째 일정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고비인 토롱라에 올랐으므로 ‘안나푸르나 라운딩’ 전체 거리의 절반을 지나온 것이고 고소증에 대한 걱정도 없어져서 한결 수월한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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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라에서 묵티나트로 내려가는 하산길. '은둔의 숨겨진 왕국' 무스탕의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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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티나트에서 토롱라로 오르는 당나귀 행렬. 이 길이 무스탕 지역과 마낭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고 무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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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라에서 묵티나트로 내려가는 길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황토색 언덕과 설산들로 둘러싸인 하늘아래 첫 동네 묵티나트. ‘마지막 남은 은둔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무스탕 왕국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무스탕 왕국14세기에 세워진 왕국으로 티베트에 의해 둘러싸인 오래되고 외로운 땅이다. 동쪽의 돌포(Dolpo)에서 시작해 서쪽에 있는 라다크(Ladakh)까지 펼쳐진 거대한 지역이다.

원래이름은 로만탕 왕국이었으나 무스탕으로 서방에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무스탕은 티벳에서 인도까지 이어지는 히말라야 횡단무역을 지배했다. 황금기였다. 이 황금시대 기간에 무스탕은 서부 티벳 전 지역을 지배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로만탕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그 때 남겨진 그들의 문화 유산은 아직도 곰파(사원)과 곰파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프레스코 벽화로 남아있다.

 

17세기가 지나면서부터 무스탕도 쇠망의 길을 걷는다. 무스탕 왕국은 종족과 문화의 뿌리가 티벳이었음에도 네팔과 연합하여 티벳과 싸웠고 곧 네팔에 합병되었다. 무스탕의 왕족들은 티벳과의 싸움에서 네팔을 지원하는 대가로 농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 받았다. 무스탕 왕국은 1951년 네팔이 외국인들에 국경을 개방하고 방문을 허락할 때까지 역사에서 사라진 ‘은둔의 왕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스탕 왕국은 티벳의 분리독립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1950년 10월 7일 중국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벳 침략을 감행했다. 점령군이었던 인민해방군은 끊임없이 티벳 문화가 봉건적이라며 소수민족 말살정책을 폈고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1959년 3월 10일, 수도 라싸를 비롯해 곳곳에서 전개된 독립시위는 수만명이 숨진 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280만명의 티벳인들은 네팔과 인도 등지로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티벳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달라이 라마도 이때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50년 전 오늘이었다. 달라이 라마도 이 험한 무스탕의 고갯길을 넘었을 것이다.

 

무스탕은 티벳 분리독립운동이 무력진압 된 뒤 중국의 티벳 점령에 항거한 사람들이 많이 넘어와 무장게릴라 캄파(Khampa)의 근거지가 되었다.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가 녹음으로 중국과 무장투쟁을 중지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캄파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네팔 난민촌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죽을 때까지 항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무스탕으로 들어가는 루트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수십 년 간의 이 어려웠던 기간에 무스탕 계곡은 외부와 완전 차단되었다. 1960년부터 1991년까지 무스탕이 외부인에게 열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저 땅은 얼마나 척박하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간직한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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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티나트의 가을풍경. 산 허리를 돌아가는 길 아래에 카그베니가 있을 것이다. 짚차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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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량한 언덕과 계곡에 유독 묵티나트 주변에만 나무와 풀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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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룽다'가 휘날리는 마을 뒤 언덕위에 곰파(사원).

 

토롱라에서 4시간을 내려오니 급경사가 끝나고 계곡옆에 서너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포터 기리가 구운 감자를 먹으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즌에만 문을 여는 롯지란다. 그 동안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던 고소증세도 말끔히 사라졌다. 페트병에 든 코카콜라 한 병을 사서 한번에 마셔버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라면 바로 이런 것 일게다. 베낭에 기대서 꿀 같은 낮잠에 빠져보는 여유도 즐겼다.

 

임시 롯지에서 묵티나트까지는 두시간 거리다.

묵티나트에서도 롯지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군데를 물어서 외딴 곳의 롯지를 잡았다.

4일만에 처음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 감고 샤워를 했다. 마낭을 지나면서부터는 세수할 여건도 안되어서 물휴지로 얼굴을 닦고 컵에 물을 담아서 겨우 양치질만 할 수 있었다.  3,000m가 넘는 고산 트레킹에서는 머리를 감지 않는다. 몸의 열을 뺏겨서 감기에 걸리면 고소증세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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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나트는 칼리 간다크 나디(강)로 흐르는 협곡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다.

좀솜까지 비행기로 와서 카그베니와 묵티나트에서 휴가를 보내는 여행객들도 많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야크털로 만든 모자와 옷감을 파는 노점이 즐비하게 서서 여행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만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마을 외곽에는 제법 큰 논밭이 있어서 가을 추수가 한창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아낙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이방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스무살이 되었을까? 수줍음 많고 앳된 처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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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 간다키 협곡의 바람은 거세다. 특히 오후가 되면 강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먼지로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되도록 오전에 일정을 마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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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 간다키 나디(강)을 건너는 당나귀 행렬. 세계 최고의 협곡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8일째.

 

오늘 묵티나트에서 어디까지 갈 것인가가 하산길의 중요한 결정이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 뿐이다.  묵티나트부터는 중간에 길이 끊어지긴 하지만 짚차를 이용해서 내려갈 수도 있고 하루거리의 좀솜까지 가서 비행기로 포카라까지 바로 갈 수 도 있다.

4일이 남았는데 적당한 속도로 베니로 내려가는 것이 일정상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 같았다.

베니에 가면 포카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애초부터 평범하고 쉬운 길을 택한 건 아니지 않은가.

고라파니까지 가서 푼힐의 일출을 꼭 봐야한다는 욕심이 버리기 어려웠다.

베니로 내려가는 것보다 이틀이 더 필요하고 타토파니에서 푼힐까지는 하루에 고도를 2,000m를 올려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또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포터 기리가 문제였다. 초반부터 무리한 것 때문인지 회복이 더뎌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내 베낭 무게를 줄이고 기리에게 나머지 짐을 모두 맡겨 짚차를 태워 보냈다.

좀솜, 마르파를 지나 나르중까지 이틀가야 할 거리를 하루에 마쳤다. 하지만 트레킹 중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지름길을 가다보니 무스탕 초입 마을 카그베니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과 칼리 간다키 강의 광활한 모습을 보면서도 사진 찍을 여유도 없이 지나가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칼리 간다키 나디(Kali Gandaki Nadi)는 동쪽으로 안나푸르나 연봉들과 접하고 서쪽으로 다울라기리에 접해 형성된 거대한 협곡이다. 세계 최고의 협곡으로 알려져 있다. 8,000m급 산군들 사이에 흐르는 강이니 그 깊이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칼리 간다키는 카트만두에서 트라슐라 강과 만나고 인도로 흘러가면서 갠지스 강의 원류가 된다.

카그베니에서부터 강폭이 넓어지기 시작한 칼리 간다키 강은 좀솜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게 펼쳐졌다 다시 툭체를 지나 나르중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강폭이 1km가 넘는다. 건기의 트레킹 코스는 이 강을 따라가는데 우기때는 강이 넘쳐 길이 사라져버릴 때도 있다고 한다.

 

길을 버리고 말라붙은 강 바닥을 따라 걸었다. 오후가 되면서 칼리 간다키강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르중에 도착할 즈음 강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다울라기리(8,172m)와 툭체피크(6,920m), 닐기리(7,061m)의 연봉들은 붉은 빛을 내뿜으며 또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출처 : 조나단
글쓴이 : 조나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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