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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겨울 고창 선운사 본문
♠풍경만큼이나 고요한 마음속 세상
유난히도 폭설이 자주 쏟아진 겨울이었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 하늘은 거센 눈발을 계속 쏟아 부었다. 선운사로 향하는 길, 솜털 같은 눈이 한때는 황금빛이었던 들녘을 뒤덮고, 양털 같은 흰구름떼가 하늘을 수놓았다 선운사로 향하는 가로수길은 온통 눈꽃이 가득 피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새하얀 눈밭이었다. 환한 눈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옆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는 개울가로 내려갔다. 개울가의 돌들은 지난밤 고요히 내린 눈이불에 덮여서 아직도 쿨쿨 단잠에 빠져 있었다. 개울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눈길 위에는 짐승의 발자국이 남아 고요한 산속 삶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자꾸만 개울가에 머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선운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지난밤에 눈이 참 많이도 왔어. 온통 눈꽃이 피어서 딴 세상 같았지." 선운사 입구에서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가 뜬금없이 혼잣말처럼 툭 내뱉었다. 그는 마치 사바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붕에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서 그 어느 겨울보다 길고 날카로운 고드름이 처마를 따라 주렁주렁 매달렸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취해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을 밟으며 선운사 경내로 들어섰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사시사철 불자들과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가수 송창식 씨가 노래하기도 했던 선운사 붉은 동백꽃의 단아한 자태는 수많은 시인과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 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자태는 상상만이 아닌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텅 비어서 더욱 충만해지는 산사, 선운사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첫 번째 설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두 번째 설인 검단선사 창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연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절을 짓기 위해 용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용의 원한 때문인지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우연히 연못에 숯을 한 가마니씩 갖다 부으니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서 붓고 나자 큰 못이 금세 메워졌다.
그 자리에 창건한 절이 바로 선운사이다.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운사의 하늘 위로 아름다운 구름들이 계속해서 흘렀다.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만세루(萬歲樓)는 그 이름처럼 오랜 세월 속에 낡은 기둥을 드러냈고, 만세루 뒤편 대웅전도 연륜이 묻어났다. 빛바랜 단청의 색채는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소박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만세루의 나무들보와 곡선의 나무지붕들은 각진 현대의 건물들과는 다른 부드러움으로 여행자의 시선을 받아 주었다.
산사에는 고승도, 여행자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비어 있어 더욱 충만한 느낌이었다. 대웅전 앞에는 마치 인간의 백팔번뇌처럼 온통 가지들이 뒤틀린 나무 한 그루가 애처롭게 서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나무 맨 아래에 기왓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기왓장을 덮고 있는 두터운 눈뭉치를 손으로 쓸어 내리니 숨겨져 있던 글귀가 나타났다. '나무도 아픔을 느낀답니다.' 인간처럼 세상 만물이 아픔을 느낀다는 걸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세상의 아픔에 마음을 열고 살아갈 때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무를 보듬듯 한 번 쓰다듬고는 돌아섰다.
자연스럽게 대웅전 뒤편 동백숲으로 발길을 향했다. 동백은 엄동설한 속에서도 잎이 푸르렀고, 아직 활짝 피어나진 않았지만 도톰한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갑자기 무성한 동백숲에서 들짐승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가만히 살펴보니 소복이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덩이가 산사의 적막을 깨면서 '풀썩'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연의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고 감동했다. 선운사 동백꽃 숲이 붉은 꽃들로 가득할 때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자연 속 고요의 세계에 머무는 도솔암
선운사를 나와서 왼편으로 조용히 흐르는 개울을 끼고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도솔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었을 무렵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머물렀다는 진흥굴이 나타났다. 한 나라의 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렇게 깊은 숲 속 굴에 기거했다는 설화는 믿기 어려웠지만,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면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진흥굴에 이르는 돌계단길은 유난히 길어 보였고 마치 그 계단을 걸어 굴속으로 들어가면 세상과는 작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입구에서 기웃거리며 주저하다가 다시 돌계단을 내려와서 도솔암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선운사에서 눈길을 걸어 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도솔암에 도착했다. 온통 설산에 둘러싸인 도솔암은 말 그대로 신비로운 선경이었다. 도솔암 마당에서 바라본 눈 쌓인 산세도 감탄사를 토해 내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어디선가 한 스님이 나타나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멀리 산을 바라보며 두 팔을 크게 휘휘 저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더니 사라져 버렸다.
어느덧 산중 암자에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풍경으로 달아 놓은 물고기는 저녁 미명 속에서 바람결을 따라 헤엄을 쳤다. 은은한 풍경 소리가 처마 밑에서 저 멀리 산중으로 퍼져 나갔다.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으로 향했다. 미륵보살이 산다는 도솔천, 그중에서도 내원은 불가에서 미륵보살의 정토라고 말한다. 암벽 사이 미끄러운 돌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올랐다. 내원궁에 오르자 촛불 켜진 암자는 두런두런 수행자들의 소리가 간혹 들릴 뿐 적막감이 감돌았다. 도를 수행하는 건 분명 몸과 마음 모두 고요한 곳에 깃드는 것이리라. 이 고요함 속에 머무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켜니 세상이 달라진 듯했다.
벌써 깊은 어둠이 도솔산 구석구석 내리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이 산중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도솔암에는 외등 하나만 켜져 있을 뿐 온통 어둠과 고요로 채워져 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얼른 거미줄 같은 삶의 처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달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얀 눈빛이 그나마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어두운 길을 내려오며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어둠 속에서 미세한 감각이 살아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져서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한 산중산보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렬한 인식을 심어 주었다.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강렬한 의미인지 느꼈다. 마침내 선운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길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인간의 도시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는 길목에 서자 웬일인지 고요한 선운사와 적막한 도솔암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여행 정보>
#도착하기
대중교통-각 지역에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 고창, 흥덕, 정읍, 광주에 도착한 후 선운사행 직행버스를 탄다.(고창에서 선운사로 오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자가용-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선운사 IC로 나온다.
#따라가기
선운사는 입구에서 멀지도 않고 길도 아주 평탄하다. 따라서 선운사만 보지 말고 좀 더 올라가 도솔암까지 가 보자. 때가 안 맞아 선운사에서 꽃무릇과 동백꽃을 못 본 아쉬움을 도솔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운사 바로 옆에 물이 졸졸 흘러 여름이면 시원하게 발을 적실 수도 있고, 겨울이면 눈 쌓인 계곡 풍경도 볼 수 있다.
일주문(입구)▶천왕문▶선운사 경내▶진흥굴▶도솔암▶마애불상(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면 도솔암 위로 30분 정도 더 올라 천마봉과 낙조대까지 가는 것도 좋다.)
#먹어 보기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간판 풍천장어집. 하지만 진정한 풍천장어를 여기서 맛보자. 선운사 가는 길과 앞에도 장어집이 많은데 '명가풍천장어'를 비롯해 복분자양파장아찌, 뽕잎 장아찌가 나오는 '청림정금자할매 풍천장어'(선운사 앞은 2호점이고 할머니가 계신 1호점은 반안리에 있다.)도 있다. 대부분의 장어집이 밑반찬 종류는 푸짐하지 않으니 주 메뉴인 풍천장어의 맛을 충분히 즐기자.
바닷가가 코앞인 고창은 백합(조개 종류)도 유명하니 백합전골, 백합회무침, 백합죽 등 백합요리를 맛보자. 백합회무침이 유명한 '호수가든'에서 새콤달콤한 회무침을 먹으며 밥 한 공기를 주문하면 비벼 먹을 수 있게 큰 그릇에 밥, 김, 양념 등이 함께 나오니 백합회비빔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바지락 비빔밥도 아무데서나 맛볼 수 없는 이색 메뉴이다.
출처 : 유럽같은 국내 여행지
저자 : 백상현 지음
출판사 : 넥서스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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