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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일대기-제1부-(2) 본문
학문 때문에 해친 건강
람의 한평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입지이며,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첫 관문 또한 입지의 문이다. 공자는 15세 때에 학문을 입지하고, 계획대로 일생을 성공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도 입지를 중시하고 공자를 본받으려 힘썼다.
퇴계 역시 입지를 가장 중요시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입지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였다. 퇴계는 '뜻은 있었으나 학문을 지도하고 인도해 줄 훌륭한 스승과 친구가 없어서 하마터면 중도에서 실패할 뻔했다'고 김부륜(金富倫 : 호 ; 雪月堂)에게 말한 일이 있다. 그러면 퇴계는 과연 언제 그 뜻을 세웠을까? 12세 때에 문리를 틔어 준 숙부 송재공이 오래 생존했더라면, 퇴계가 '무사우 계발지인(無師友 啓發之人)'이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송재공 생존도 관계가 깊었던 듯하다. 애석하게도 송재공은 퇴계가 17세 되던 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무사우'라고 한 말은 이 17세 후의 일을 일컬으니 퇴계의 입지는 이미 그 전에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퇴계의 입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은 없으나 문도들의 기록을 참고하면 16세에서 18세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세 때는 스승 없이도 이미 학문이 독립 경지를 이룩하였다. 우성전(禹性傳 : 호 ; 秋淵)은 '17세 때부터 학문을 알게 되었고 학문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였고, 김성일(金誠一 : 호 ; 鶴峯)은 야당(野塘)시를 인용하면서 '선생은 16, 7세에 이미 학문에 뜻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류성룡(柳成龍 : 호 ; 西厓)은 퇴계의 연보 18세 조에 야당시를 기록하였고, 이간재는 야당시를 선생이 18세 때에 지었다고 확인해 놓았다. 여기서 잠깐 퇴계가 천리유행(天理流行)을 깨달았다는 저 유명한 '야당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슬 젖은 어린 풀새 물가에 둘러 있고, (露草夭夭繞水涯)
작은 못 맑디 맑아 모래마저 없노매라. (小塘淸活淨無沙)
나는 구름 지나는 새 의례 관계 있건마는, (雲飛鳥過元相管)
다만 저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렵노라. (只 時時燕蹴波)
『이가원 박사 역』
※水涯가 碧坡로도 씌었다.
이 시를 김설월당은 '하늘의 이치가 흘러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의 욕심이 그것을 간섭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설명했고, 중국의 담강대학 왕소(王甦)교수는 '첫 구는 외경을 묘사했고, 다음 구는 마음 바탕(心體)이 맑고 깨끗함을 비유하고, 셋째 구는 바깥사물이 와서 마음의 밝음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고, 마지막 구는 물욕이 마음을 어지럽게 흔듦을 비유했다'고 분석한 후 '퇴계는 18세의 나이에 곧 성리(性理)의 학문과 부합할 수 있었으므로 살얼음이 언 연못을 디디듯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스스로 늠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이렇게 의미심장한 시를 지었으니 그 지혜로운 기초가 일찍 갖추어졌다'고 간파하고 있다. 『왕소의 '퇴계시학' : 이장우 교수 번역』
이상 살펴본 결과 퇴계가 18세 때 이미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천리유행을 깨우쳤음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입지는 17세까지는 되어 있었다고 믿어진다.
퇴계는 학문을 즐겨서 14세 때에 벌써 사람이 모여 있어도 혼자서 벽을 향해 책을 읽을 정도였고, 15세 때는 압운변격(押韻變格)할만큼 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석해(石蟹 : 게)'시를 통하여 우주를 관조한 사상을 펴보였다.
돌지고 모래 파면 집은 절로 되고, (負石穿沙自有家)
앞이든 돌 틈이든 많은 발로 달려가네. (前行 走足偏多)
평생을 한 움큼 샘물로만 살아가니, (生涯一 山泉裏)
강호의 물이야 얼마이든 알 바 없지. (不問江湖水幾何)
퇴계는 19세 때에 성리대전 두 권을 읽고 '성리학의 대문에 들어섰고, 길을 얻었으며, 근원의 시초를 깨달았다'고 시로서 소회를 밝혔다.
홀로 숲 속의 오두막집 많은 책을 사랑하여, (獨愛林廬萬卷書)
한결같은 심사로 십 년 넘어 지내왔네. (一般心事十年餘)
근래에는 근원의 시초를 깨달은 듯하여, (邇來似與源頭會)
내마음 전체를 허공으로 보았노라. (都把吾心看太虛)
『국역 퇴계집 Ⅱ, 126쪽』
퇴계는 19세 때 소학을 읽고서 학문의 시작을 완벽히 갖추었고, 의학도 강습하여 학문할 수 있는 건강도 배려하였다. 20세 때는 서울에 올라가 외계 세계를 살피고 돌아와서 절에 들어앉아 주역의 연구에 몰두했다.
성리학 입문과 연구 정진
퇴계가 성리학과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한 기회였다. 19세 때 숙부가 보던 서가의 책 속에서 성리대전 앞 뒤 두 권을 우연히 발견하고 빌어다 읽었다.
성리대전은 오경대전(五經大全)ㆍ사서대전(四書大全)과 함께 영락(永樂) 3대전으로 불리며, 성리학을 총망라해놓은 70권(송나라도학자 120명의 학설을 채집)을 13부류로 분류해 놓은 방대한 총서 중에서 원전(原典) 9종을 따로 모은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 1권과 통서(通書) 2권, 장재의 서명 1권과 정몽(正蒙) 2권, 소옹의 황극경세서 7권, 주희의 역학계몽 4권과 가례 4권, 채원정의 율려신서(律呂新書) 2권, 채침의 홍범황극 내편 2권 등 6인 9종을 말한다.
퇴계가 그 때 사촌 동생에게 빌려 온 책은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맨 끝의 시부(詩部)두 편이었다. 이 때 퇴계는 아직 계몽과 가례는 읽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퇴계가 역학계몽을 연구해서 주자가 잘못 해석한 부분을 수정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석한 것이 계몽전의인데, 이는 1557년 7월에 완성했다. 그러므로 퇴계는 그사이 40년래에 계몽을 구해서 깊이 연구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을 읽고 연구한 것은 태극과 황극을 읽은 이듬해였다. 따라서 역학계몽을 읽기 전에 주역공부를 먼저 한 것이고, 주역을 읽기 전에 성리대전과 만난 것이다.
퇴계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해 읽은 것은 서울에서였고, 성균관에 처음 유학했던 23세 때다. 이밖에 연도가 분명치 않으나 주자서를 읽은 사실과 벼슬한 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은 일이 있다. 다만 주자의 역학계몽을 언제 읽었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없고, 계몽과 관계없이 주역을 정독하여 연구를 끝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퇴계가 19세에 태극도설과 홍범황극을 읽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역을 읽은 것인지, 발전적으로 연구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성리학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한 사실은 기록에 분명히 남아 있다.
내가 성리학에 뜻을 둔 후는 종일 쉴 틈이 없었으며,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고칠 수 없는 병까지 얻어서 폐인이 되고 말았다.
스승과 친구의 도움도 없이 독학으로 그 심오한 성리학을 탐구해 나가다가 병을 얻게 된 것이다. 수십 년을 밤낮으로 사색했고, 잠을 자도 편히 자지 못하는 마음의 병이 생겼다.
퇴계는 몇 번이나 학문을 그만 두고 싶었으나 자신이 맡아서 꼭 해야 할 큰 사업이며 자신의 사명이라 느꼈다. 이 때 퇴계가 말한 '만부각오(晩復覺悟)'는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다시 발전시켜 재집대성하는 순간이요, 동양철학사상 새역사를 창조하는 역사 발전의 전기였다. 큰 일임을 깨달았기에 몸을 돌보지 않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그 즈음의 일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내가 젊을 때부터 이 학문에 뜻을 두어 기어코 뚫어내겠다는 마음은 병이 되었고, 공부를 하다가 몇 번 건강을 해쳐서 그만 폐인이되고 말았네. 늘그막에 다시 깨닫고 이 큰 사업을 다시 계속하였으나 너무 늙고 쇠약해버려 뜻을 이룰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일세.
퇴계가 성리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고마운 사람은 주자였다. 주자의 설명과 가르침을 받아야 쉽게 이해되고 의문이 풀렸다. 그러므로 퇴계에게는 주자가 스승이다. 무엇이든지 주자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주자전서를 얻어 읽은 것은 주자를 사숙(私淑)하는 입문이요 주자학을 발전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퇴계는 그 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내가 서울에서 주자전서를 얻어 읽을 때는 여름이었는데도 문을 닫고 열심히 읽었지. 더위도 아랑곳없이 한여름에 이렇게 책을 읽고 있었더니 몸이 상한다고 더러는 주의를 하더군.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시원스럽게 이해되어 더위를 느끼지를 못했어. 그런데 어찌 병이 나겠는가.
퇴계는 주자전서를 읽고서도 주자의 학문을 통달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간 후에도 늘 부족함을 느꼈던 듯 도리(道理)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벼슬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의 부족함을 느끼고 학문에 전업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자대전을 구해 읽고나서 한층 더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주자의 학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주자를 스승으로 사숙하면서 충실하게 학문을 받아들였으나 이기론(理氣論)과 성정론(性情論) 및 지행설(知行說), 경성(敬誠)의 개념과 물격론(物格論), 천인관(天人觀)등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여간 많지 않았다.
퇴계는 17세 전에 성리학에 뜻을 두고, 19세에는 건강을 해쳐가며 탐구 정진하였다. 자기가 이룩해야 할 하나의 큰 사업으로서 자각하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해함으로써 주자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학문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오묘함을 심경(心經)연구를 통해서 완성시켰다.
주자를 도학 연원으로
퇴계의 학문과 수양에는 성현은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성인이 한 말씀은 꼭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옳은 도리인 것이다. 성인이 말하였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으면 있는 힘을 다해서 따라 실천해야 될 것이다. 성인이 알기 어렵고 하기 힘드는 일을 왜 말하였겠느냐는 생각으로 성인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학문을 하였다.
퇴계는 지식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생활과 실천이었다. 학자가 날마다 공부하는 것은 몸을 닦고 체험하는 것이지, 입으로만 이치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몸으로 그날 공부한 것을 모두 실천하는 것이 참된 학문이라고 제자를 깨우쳤다.
정자(程子)와 주자는 이를 잘 실천한 스승이라 믿었다. 퇴계는 학문의 준칙을 정자ㆍ주자의 그것과 같이 정했다. 경(敬)과 의(義)를 굳게 지니고, 지(知 : 아는 것)와 행(行 : 실천)을 병진시켜 표리(表裏)없이 본말(本末)을 겸한 대원(大原 : 큰 원리)을 통찰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학문을 했다. 그래서 퇴계의 학문은 정자학과 주자학을 날줄과 씨줄로 삼았다고 한다.
퇴계가 주자의 학문 계통을 이었다고 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준칙을 행동으로 잘 실천해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 공리(功利)와 이단(異端 : 楊朱와 墨翟의 사상인데 양주는 극단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주장했고, 묵적은 겸애설을 부르짖어 맹자의 학설을 사설이라고 배척했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둘째, 넓게 학문하여 가장 요긴한 것을 얻었다.
셋째, 성현을 바탕으로 하고 실학(實學)을 체득했다.
넷째, 사람을 교육함에 있어서는 인륜(人倫)밝히기를 주로 하고, 도리를 깨우치는데 노력했다.
다섯째, 경(敬)으로써 몸을 바르게 하고, 교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여섯째, 예를 논함에 있어서도 고례를 원용하였지만, 그 시대의 법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일곱째, 자기 몸을 수신하는 데 힘쓰고, 남의 잘못을 흉보지 않았다.
여덟째, 용기 있게 남을 좇고 자기의 결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아홉째, 인화(人和)로 남을 대하여 존경을 받았다.
열째, 아랫사람을 부드럽게 대해 주고, 또 엄숙한 대우를 받았다.
열한째, 하나의 절의(節義)나 한 가지 선행일지라도 그것은 명예 때문이 아니고, 바른 학문과 사람의 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퇴계는 주자를 통하여 이론과 그 실천을 배우고 주자를 존경하고 주자의 교훈에 따라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해 나갔다. 주자의 많은 저술을 풀이하고 쉽게 해석해서 후세에 전했다. 50대 후반에는 주자에 관한 저작을 많이 했다. 하바드대학의 두 웨이밍 교수가 '퇴계는 그 때 늙었다는 걱정,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학문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나, 내가 할 일이 저리도 많은데…… 하는 근심이 더 컸다'고 하였듯이 주자학을 널리 보급하는 일과 정리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퇴계가 주자학에 뜻을 둔 뒤 20년간 탐구하고 책을 쓴 것을 정리해 보면 우선 대략 다음 일곱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 43세∼56세에는 주자의 저서를 수집하고 해설했으며, 왕명에 따라 서관(書館)에서 인쇄한 주자대전과 중국판 대전서를 비교ㆍ개정하였다.
둘째, 56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다.
셋째, 57세에는 주자가 지은 계몽의 잘못을 고치고 쉽게 풀이했다.
넷째, 58세(4월)에는 주자서절요를 완성하고, 자성록과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을 편집했다.
다섯째, 59세(7월)에는 백록동 학규(白鹿洞 學規)를 집해하고,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집했다.
여섯째, 60세(11월)에는 기고봉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지도했다.
일곱째, 63세에는 송계원명이학통록을 완성했다.
퇴계는 주자를 아성(亞聖)의 지위에 올려서 존숭한다고 주자서절요의 서문에 밝혔으며, 주자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 견줄 수 있는 성현도학연원(聖賢道學淵源)을 지어 주자를 도학의 연원으로 삼았다.
학문의 방법과 자세
계의 학문하는 방법은 정독이었다. 곧 궁리하는 독서법이었다. 퇴계는 성리서(性理書)를 읽지 않은 책이 없을만큼 다 읽었고, 강론할 때에는 그것들을 술술 외어가며 적절하게 인용하였다.
퇴계의 학문의 길은 궁리하고 실행하는데 있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나가야 하고, 털끝만큼도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힘을 빌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퇴계는 주자나 육상산(陸象山)보다 일보 전진하여 윤리ㆍ도덕을 실천하였고, 성인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를 만한 학자가 없었다.
두 웨이 밍 교수는 '주자처럼 퇴계도 비판적 분석법이 학문하는 바른 방법이라 믿고 실천하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어떠한 것도 학설을 당연시해서는 안되며, 미숙한 종합은 피해야 하고, 간단한 용어, 작은 주석 한 부분이라도 철저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원문일지언정 이해하기 위해서, 또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문헌학적ㆍ의미론적 탐구가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하고 그의 연구 결과를 밝힌 바 있다.
김학봉도 '글자 한 자의 뜻이나, 한 낱말의 뜻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고 정밀하게 탐구하였고, 아무리 옛날의 유학자들의 저술이라 해도 함부로 믿는 일 없이 철저하게 천착하는 선생이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학문 결과가 저 삼경석의(三經釋義), 사서석의, 계몽전의,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 통서강독(通書講錄), 소학강론 같은 수많은 주석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주자의 편지들을 정리하고 이학통록을 저술하여 마침내 유학의 전개ㆍ발전과정을 총 집대성하게 된 것이다.
다음 퇴계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하여 몇 가지 첨가해서 이야기해두어야겠다.
퇴계는 저술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근신하는 태도를 취하여 함부로 남의 비문이나 지석문을 지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지위와 시대의 상황을 고려했음은 물론이다. 만년에는 할 수 없이 지어주기도 했지만, 66세까지 '내 평생 비문은 안 짓겠다. 나의 이 계율은 깰 수 없다'며 삼가했다. 친구인 영의정 홍섬(洪暹 : 호 ; 忍齋)이 이판서의 비문을 부탁하거나, 정승 민기(閔箕)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비문을 부탁해 왔을 때도 거절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구의 지위와 면목을 생각해서 선뜻 비문을 짓지 않은 퇴계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서 그 심경을 토로해 두었다.
홍지사(洪知事 : 홍섬 ; 중추부지사로 있었음)를 뵙거든 문안의 뜻을 아뢰어라. 또 조송강(趙松岡)의 비문에 대해 '너 어른이 왜 안짓느냐'고 하거든, '가친은 글을 짓지 못하여 평생 남의 비문을 짓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엔들 어찌 짓겠습니까? 홍대감께서 꼭 지으실 줄 믿고 짓지 않는다고 하십디다'하고 대답해라. 이 뜻은 조지(趙摯)생원이 이미 알고 갔다.
가장 친한 조송강의 비문이지만 홍인재가 있기 때문에 짓지 않았던 것이다. 경복궁 중신기(景福宮 重新記)를 지으라 했을 때도 사양하였다. 그러나 뒷날 홍인재가 지은 글을 버리고 퇴계가 지은 글을 썼다.
퇴계는 조광조(趙光祖 : 호 ; 靜庵)의 행장(行狀)도 청해 왔지만 헛걸음시키는 게 미안해서 글씨를 한 폭 써 주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64세 때는 정암의 행장을 지어서 국왕이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한마디로 때와 그 일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처리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묘갈문을 지어도 사실의 근거를 보지 않고는 결코 짓지 않았다. 홍인재가 부탁한 비문은 복시(覆試)한 사실이 초안에 없어서 쓰기를 주저했고, 노수신(盧守愼 : 호 ; 伊齋)이 부탁한 그의 장인의 비문은 천거와 과거의 내용들이 불분명해서 지은 비문도 보내지 않고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으며, 성혼(成渾 : 호 ; 牛溪) 이 부탁한 그 부친 성수침(成守琛 : 호 ; 聽松)의 비문은 이율곡이 지은 청송행장(聽松行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송이 손수 써둔 글과 써 넣으려는 자료를 받아서 확인한 후에야 지었다.
이와 같이 퇴계는 역사적 사실이나 역사의 자료가 될 인물의 행장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실증 자료에 근거하여 글을 짓고, 지어서는 또 그 자손과 관계자에게 물어서 확정지었다.
퇴계는 문자 한 자라도 정확하게 쓰기 위해 애썼다. 명종만사를 지어 진상해 놓고도 여러 사람을 거친 후 기어코 도감(都監)을 시켜 '구(晷)'를 '질( )'로 고치게 한 일이라든지, 권호문의 부친 묘지명을 지을 때는 초안의 세계(世系) 순서와 관직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바로잡고는 후세에 전할 사실을 정확하게 적어서 남겨야 할 학자의 중대한 책임을 주장하고 가르쳤다.
퇴계는 자신의 저작이 세상에 나가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흘러나가면 다시 찾아들이는 데 힘썼다. 도산기(陶山記)를 지어서 감춰두었다가 우연히 제자의 눈에 띄어 세상에 전파되자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주자서절요도 처음 쓸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황금계가 억지로 가지고 가서 인쇄ㆍ반포하자 불쾌하게 여겼다. 뒤에 이 주자서절요는 서애의 부친 류중영(柳仲 : 호 ; 立巖)이 감사로 가 있는 해주에서 류중엄(柳仲淹 : 호 ; 巴山)과 서애 등이 나누어 읽으려고 인쇄했다. 황금계가 절요 저술을 높이 평가한 말은 없애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제자인 금계에게 끝까지 신용을 지켜주지 않으면 어찌 다시 만나서 얼굴을 보랴하고 부탁한 일도 있다. 자기 학문을 낮추고 남에게 높이 평가받는 것을 지극히 두렵게 여기는 태도였다.
퇴계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지 결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었다. 퇴계가 규정한 위기지학의 개념은 우리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서의 지(知)ㆍ덕(德)ㆍ행(行)을 실천 궁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군자가 되는 학문이라 깊은 산골 풀섶에 있는 난초와 같아 알리지 않더라도 종일 향내가 나서 저절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한다. 위인지학이란 지ㆍ덕ㆍ행의 생활과 떠나 덕성은 없고 밖으로 허식을 부려 남에게 자기를 알리는 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 했다. 퇴계는 자신이 위기지학을 하려 힘쓰고 이를 문도들에게 교육하였다.
동양철학의 뿌리형성
계의 학문적 업적에 대하여 감히 논한다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퇴계학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연구해도 대문에 들어서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선배 유학자들이 수백년 동안 퇴계학을 논하였고,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연구하여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아직도 퇴계학이란 큰 봉우리를 향해 들어서는 초입 단계에 있다. 그래서 다만 숫적으로 파악하여 소개하고 당시 학자들의 평가와 현재 미ㆍ일 두 나라 학자들의 평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저작은 퇴계선생 문집 내집(초간ㆍ중간본) 외집 별집 속집과 퇴계선생 전서 유집 내편, 동 외편(본문은 잃어버리고 목록이 전한다) 등이 편찬ㆍ발간되었다.
이들 문집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 자성록(自省錄), 성현도학연원록, 독서설해(讀書說解), 예설강해(禮設講解), 주자서절요, 매화시첩, 도산십이곡 등의 전문연구서도 들어 있다. 이밖에 문집에 들어있지 않는 저작도 아직 많이 있다. 일기, 향약, 온계동계, 심경부주, 이학통편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근년 국학 연구의 새로운 요청에 부응하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1958, 1971, 1978년 3회에 걸쳐 3판의 영인간행을 하였다. 1975년에는 일본 이퇴계연구회가 아베요시오(阿部吉雄)박사 편찬의 일본각판(日本刻版) '이퇴계 전집'을 출간했다. 또 1980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도산전서(陶山全書 : 지금까지 출간하지 못한 전서, 가서, 퇴계선생 전서 외편에서 읽은 목록도 수록)를 영인했다.
퇴계의 학덕과 경술문장(經術文章)을 고금 학자는 어떻게 평가했나를 적기로 한다. 또 국왕에게 받은 신임과 국민의 숭앙은 어떠했으며, 오늘날 세계 학자들의 존경은 어떠한가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퇴계가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로 뽑혀서 남긴 글로는 경복궁 중신기와 동궁의 자선당 상량문(資善堂上樑文), 사정전(思政殿) 상량문이 있고, 명종의 행장과 만사도 지었다.
둘째, 당대의 사림 지도자와 성리학의 대가이며, 학덕과 기개를 존경받다가 희생당한 인물들의 행장을 지은 일이다.
셋째,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대제학 정사룡(鄭士龍)같은 이가 경연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이황의 경술과 문장은 그 오른쪽에서 설사람이 없습니다' 또 '이황은 도학의 지위가 높고 높아서 그 저작과 논술이 정자나 주자와 비슷합니다' 하고 추천하였다.
넷째, 승지 이준민(李俊民 : 호 ; 新菴)과 기고봉(奇高峯)은 퇴계와 조식(曺植 : 호 ; 南冥), 성운(成運 : 호 ; 大谷)과 이항(李恒 : 호 ; 一薺)을 현인군자로 대접해서 모시도록 선조에게 천거했다.
다섯째, 군신이 퇴계를 중망한 사실로서 율곡이 스승 퇴계를 받든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을축년 12월, 선생께서는 젊을 때부터 도학에 뜻이 있었으며 만년에는 학문을 좋아하셨고, 벼슬은 즐기시지 않아 예안에 물러가 계셨지만, 이 때 국민은 태산이나 북두칠성 같이 우러러 보았다. 윤원형이 죽자 사람들은 선생이 나오셔서 덕치를 해주기를 간절히 희망하여 임금님께 아뢰었더니 소명을 내리셨다. 모든 사람이 매우 기뻐하였다.
병인 4월, 이 선생께서 병환으로 사퇴를 하시고 상경치 않으셨다. 그럴수록 임금의 중망은 더욱 두터우셨다. 목동과 거리를 지나는 사람까지 선생의 명성을 공경치 않은 이가 없었다. 모두들 선생의 모습이라도 한 번 뵙기를 원하였다.
정묘 7월, 이 선생께서 판서의 발령을 받고도 도를 지키고 산중에서만 계시니 사람들의 존경이 날로 더해 갔다. 임금께서 부르니 오셨다. (중략) 내가 선생을 뵙고, '만약 선생께서 경연의 윗자리를 지키고만 계시어도 큰 득이 있습니다. 남을 위하여 좀 계셔 주옵소서' 하고 부탁드렸다. 그래도 떠나시려 하므로 선생께서 조정에 계시면 설사 별로 하시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임금의 마음에 의지가 되어 든든할 것이며, 국민들도 모두 기뻐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의를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간곡히 아뢰었다.
다음은 오늘날 학자인 두 웨이 밍 교수의 평을 들어보기로 하자.
퇴계는 주자의 교훈이 똑똑하고 명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퇴계와 같은 인물에 있어 그 주된 관심은 '본원지지(本源之地)'의 함양에 있다. 정치적 책임감을 비롯해서 그 밖에 것의 경중에 대해서는 적절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퇴계의 심중에 우선하는 것은 시간과 정세가 '위기지학'을 할 수 없게 하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에 있었던 것이다. 1559년의 이학통록 완성이나 1560년의 도산서당 설립, 수년 간에 걸친 사칠논변(四七論辯) 등은 동아시아의 유학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퇴계의 존재를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었다. 또 퇴계는 전형적인 선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벼슬하는 관직자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겸양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았으며, 인격의 특성은 매우 사랑받았다. 1558년에 정계를 떠남으로 이학(理學)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고, 조선시대의 탁월한 주자 해석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대유학자가 될 수 있었다. 퇴계가 무진육조소(戊辰六條 )와 성학십도를 지어올린 것은 젊은 선조에게 유학의 근원을 가르치려는 목적이었지만, 그 뒤 300년 동안 한국유학의 근본 교과서가 된 것이다.
라고 퇴계의 인격과 함께 학문의 업적을 평가했다.
일본의 쯔쿠바대학 다카하시 스스므(高橋 進)박사는 퇴계가 이룩한 공적과 철학의 중심 및 그 발전과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한국의 조선전기에 있어서 '경(敬)의 개념'은 이퇴계에 이르러 그의 세계관ㆍ인생관과 함께 철학체계의 중핵을 경철학으로 성립시키고 있다. 이는 마침내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초기에 전달ㆍ수용되었고, 이에 따라 신유학은 경사상을 중심으로 정착하고 개성을 가지고 전개해 갔다. 종래 신유학은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었다고 하였지만, 내가 동부 아시아에 있어서의 신유학의 지역적 전개(중국 한반도 일본)를 개관해 보았더니, 이퇴계가 경철학을 확립하고, 신유학을 더욱 개성적이며 실천철학으로서 체계적인 재집대성을 이룩한 사상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경 메지로대학의 다카하시 총장은 또 퇴계 철학의 전개와 그 영향에 관해서
경(敬)에 의한 인간의 실존적(實存的) 주체성 확립을 강조한 이퇴계 사상은 마침내 이율곡에 이르러 '경에 의하여 성(誠)에 달한다'는 사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리고 이퇴계의 학문과 인간을 존중해서 퇴계 학문을 수용하여 에도초기에 신유학을 정착시킨 일본의 후지와라 세이가, 하야시라상, 야마사키 안사이, 사토 나오가다 같은 유학자들은 일제히 경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확립하였다. 경 중심의 유학사상의 전개는 이퇴계 철학의 영향을 무시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라고 퇴계의 학문이 경철학으로 확립되고, 마침내 이 경철학은 동아시아 철학 사상의 밑뿌리가 되었고, 지금도 더욱 그 영향을 받아 전진ㆍ발전해가고 있다고 논평했다.
청렴과 성실로 지킨 공도
566년 1월 퇴계가 소명을 받아 상경할 때다. 도중 병환으로 풍기에서 머물며 사퇴하는 장계를 올렸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각 지방관은 퇴계를 호송하고 전의(殿醫)는 가서 치료하여 모셔와 취임토록 하라면서, 공조판서와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을 겸임시켰다.
소백산맥 죽령길에는 눈이 쌓여 넘을 수 없었다. 새재를 넘기 위해 예천쪽으로 돌아가는 사이에 많은 시일이 지나갔다. 병환은 낫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장계를 올리고 예안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퇴계는 현직 공조판서였지만 지방관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썼다.
이 때 안동부사는 윤복(尹復)이고 판관은 우언겸(禹彦謙)이었다. 우 판관의 아들인 우추연은,
병인년(1566년)에 왕명을 따라 선생이 예천까지 가셨으나 병환이 너무 깊어서 상경하지 못하시고 장계를 올린 후 안동산사(山寺)에 머물면서 왕명을 기다리셨다. 모든 접대를 받지 않으시고 모두 뿌리치셨다. 다만 중에게 밥을 시켜서 드시니 그 소연하심이 정말 빈한한 선비 같으셨다. 봉화현감께서 그때 안기찰방(安奇察訪 : 퇴계의 아들 준이 그 때 안동의 안기역에 근무함)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서 시중들고자 했으나 물리치고 하인들도 보내지 못하게 했다.
하고 어느 누구의 마중이나 시중도 받지 않았다고 적었다. 퇴계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서울 간 사람은 23일 못 오면 24일에는 꼭 올 것이다. 내일 빠르면 고자평(高子坪)에 들러 누님을 뵌 후 풍산에 가서 잔다. 늦으면 고자평에서 자고 다음날 풍산으로 가 묵을 예정이다. 내가 전에 당부한 대로 부사와 판관이 풍산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안동부에 들어가 자고 갈까 한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부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그 분들에게 내 말을 분명히 전해서 나오지 못하시게 하여라.
결국 이때 안동시 서후면 태장(太庄)리에 있는 천등산 봉정사에 들러 묵으면서 다음 시를 읊었다.
예 와서 공부한 지 오십 년이 흘렀구나. (此地從遊五十年)
백화 앞에 고운 얼굴 봄을 즐겼더니 (韶顔春醉百花前)
함께 왔던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 가고, (只今携手人何處)
창암의 폭포 물만 예대로 흐르는가 (依舊蒼巖白水懸)
50년 전의 옛 추억을 되새기며 병환과 회고의 슬픔을 혼자 이 시로써 억눌렀다. 퇴계의 깨끗한 마음과 일을 살피는 도리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퇴계는 자기로 말미암아 관리들의 일이 많아지고 관청에 폐를 끼치며 지장을 주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남의 접대나 환송을 좋아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퇴계의 이러한 수범적인 행동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격과 학덕 때문에 모든 국민이 '퇴계선생! 퇴계선생!'하고 존경했었던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퇴계의 지방관에 대한 소망은 자기로 말미암아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자기의 신분이 높아도 자기고을 지방관의 영접을 받을 수 없다. 상부의 관리가 고을에 출입ㆍ왕래하더라도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비록 고관이 아버지일지라도 자기 직무를 그만 두고 배웅을 나간다거나 병환 중일지라도 직장을 이탈해서 개인적인 일에 뛰어다녀서는 안된다. 관청의 하인을 개인 사무(私務)를 위해서 부려서는 안된다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다음은 퇴계가 친척과 집안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관리로서 취해야 할 대민자세와 공무수행에 대해 알아 보자.
관계에 있는 사람은 '청심ㆍ생사(淸心 省事)의 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첫째, 집안 젊은이에게는 '급료가 많아서 너무 남아도 좋지 않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사보내서도 안된다. 조그만 식물(食物)은 상관 없겠지만 이것도 잦아지면 좋지 않다. 나중에 습관이 되면 안 되니까……' 하고 가르쳤다.
현감으로 있는 아들이 제수(동생 적의 부인 나주 박씨)의 제삿날에 제물(祭物)을 준비해 보내자. '사사로운 일에 인정을 쓰다가 다스리는 고을을 버릴 것인가' 하고 꾸짖었다.
아들이 제사 때 쌀을 준비해 보냈더니 '가을 수확이 어찌 될지도 예상할 수 없는데, 아무리 봉선지사(奉先之事)가 중요하다 하나 군민의 생활을 생각지 않고 이렇게 쌀을 보낼 수 있느냐'고 나무란뒤 다시는 쌀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작은 음식물 정도는 보내도 괜찮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현감이 은어 몇 마리를 보냈더니 '그 지방에는 은어를 잡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데 이 은어는 어디서 생긴 것이냐. 필경 이 은어는 아비를 위해서 하인들을 괴롭힌 것이겠지. 봉화고을이 나의 입과 배까지 더럽히려 하는구나'하고 꾸짖은 뒤 되돌려 보냈다.
봉화의 군민이 성주(城主)의 부친을 위해 물건을 보낸 일이 있었다. 성주가 사가(私家)에 물건을 보낼 때마다 야단을 맞고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이 때 퇴계는 '군민들이 보냈다는 말이 사실이냐' 하고 물은 다음 순친지의(順親之義 :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도의)를 저버리며 아버지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1570년 즉 퇴계가 죽던 그 해 가을의 일이다. 봉화에서 감 한 접을 보내왔는데 퇴계는 다음 편지와 함께 감을 그대로 돌려 보냈다.
인편이 돌아오면서 편지를 가지고 와 모든 일을 잘 알았다. 번거롭게 찾아와서 도와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출입 때문에 필시 난감할 테지, 벼슬을 하고 있으면 많이 접근해 오므로 다른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너의 평범한 재주로 쇠잔한 고을을 맡아가지고 공사의 일을 양쪽 다 능히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는 일이다. 그런데, 관물(官物)을 인정쓰는데 다 써 버린다는 것은 국가에 죄를 짓는 일이다. 봉화에서 보낸 물건은 누가 갖다 준 것이더냐? 이번에 보낸 감 한 접은 되돌려 보내니 관에서 쓸 곳에 충당해라.
이와 같이 퇴계는 죽기 직전까지도 관리가 지켜야 할 공도(公道)를 가르친 것이다. 모든 국민을 바르게 가르치고, 공무원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는 바로 그 부모와 가족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을 퇴계는 그 시대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교훈으로 일깨워 놓은 것이다. 이것을 입언수후(立言垂後)라고 한다.
둘째, 누나의 사위인 신섬(申暹)에게는 '관리는 청렴한 생계를 영위하며, 상관의 명령을 잘 지켜서 국가의 경제가 문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도하였다.
신섬이 출사 중에 물건을 보내왔다. 지난번 물건을 보냈을 때 퇴계로부터 다시는 보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그는 그저 사양하는 말일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또 보낸 것이다. 그 뒤 신섬은 처외숙부에게 엄한 편지를 받았다.
글월 받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줄 알겠으며, 가족들도 함께가 잘 지낸다니 기쁘네. 나도 여전하네만 물건을 빈번하게 보내줘서 미안하네. 지난번에 내가 간곡히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번에 또 물건을 보냈구나. 자네 비록 내 말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의정의 지시마저 어기려 드는가. 물건을 달라는 사람은 많고, 써야 할 곳은 흙처럼 많은 것을. 마침내 고을의 창고가 바닥이 나고 말 텐데. 그 때에는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걱정되네! 두 가지는 받고 한 가지는 되돌려 보낼 테니 내 뜻을 알고 처리하게나. 괴망한 짓은 다시 하지 말게.
공직에 있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리에 움직여서는 안되고, 항상 국가 경제를 고려해서 자기의 몸을 깨끗이 하라는 퇴계의 간곡한 가르침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 말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의정의 지시마저 어기려 드느냐'고 나무라는 말에는, 나라의 기강과 법을 준수하고 지도자의 지시를 관리나 국민이 잘 따라야 한다는 위국충정(爲國忠情)이 넘쳐 있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모든 공무원이 사욕을 버리고, 개인의 인정과 형편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가문의 어른으로서 훈도하였다. 특히 원문의 끝에 쓴 '괴이한 짓 말지어다. 괴이한 짓 말지어다'라는 당부와 경계의 말에서 신섬의 행위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던가를 알 수 있다.
셋째, 퇴계 자신이 청심생사를 실천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유일(鄭惟一 : 호 ; 文峯)은 '선생께서는 청백 염간(淸白廉簡)하셔서 한 가지 물건도 의리에 맞지 않은 것을 망녕되이 취한 적이 없으셨다'고 하였다. 단양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때의 이야기이다.
선생께서 단양을 떠나 행차가 죽령에 도착했을 때다. 단양군 직원이 뛰어와서 지고 온 삼(麻)을 선생 앞에 내려 놓으면서 '이 삼은 관청 소유의 밭에서 수확한 것이므로 예에 따라 사도께서 가져가셔야 합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생께서 타이르시듯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어찌 네 마음대로 지고 왔느냐. 어서 가져 가거라'하고 물리치셨다. 다만 괴석(오늘날의 수석)과 책만을 가지고 올 뿐이었다.
그 뒤 풍기군수로 있다가 물러난 후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중에 하인이 책과 옷장을 짊어지고 왔었다. 퇴계는 책과 옷은 받아두고 옷장은 군 소유물이라며 그 길로 도로 가져 가도록 하였다.
퇴계는 가정사람들이 벼슬길에 나가서 취해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말렸다. 퇴계는 아들이 벼슬하기를 원치 않았다.
네가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있어봐야 공사간에 이익될 게 별로 없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고생만 할 것이다. 내가 매양 너는 벼슬살이를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느냐!
퇴계가 가정 일을 잊어버리고 안심하고 조정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 이조판서가 아들 준을 취직시키려 했지만 퇴계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홍판서(이조판서 홍섬)는 내가 안심하고 서울에 있을 수 있게 하느라고 급히 너에게 벼슬자리를 준 것이다. 이제 너는 벼슬이 바뀌었고 나도 서울에 머물 생각이 없으니 다시 너의 벼슬자리를 도모하는 일이 어찌 홍판서의 뜻에 맡기겠느냐?
퇴계는 계획한 오사(吾事 : 내 할 일)가 있었다. 벼슬을 하고서는 뜻을 펴지 못할 줄 알고 있었다. 성균관에서는 교육사업도 안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면 아들이 잠자코 고향에 있어야 한다. 또 퇴계가 귀향한 후에 아들만 서울에 머물고 있는 것은 불안하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도 꼭 상경하는 것을 말려야 했다. 나중에 아들의 취직이 화근이 된다고 생각하고 출사를 극구 말렸다.
둘째, 전근 청탁을 엄중히 금했다. 그 때 말로는 전근 청탁을 청촉도환(請囑圖換)이라고 했다. 퇴계는 모든 집안사람에게 청탁 불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지켜나가도록 평소 철저히 감독했다. 퇴계가의 사람들은 남의 눈이나 감독 관청의 제재보다 집안 어른이 더 무서웠다.
퇴계의 아들이 경주 집경전 참봉(慶州 集慶殿 :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전각의 참봉)의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되돌아갈 때다. 처음은 전생서(典牲署 : 궁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은 관청)참봉으로 물망에 올라 있었다. 뒤에 그보다 나은 자리인 문소전(文昭殿 : 이태조, 신의왕후, 태종을 모셨던 사당) 참봉에 앉히려고 정원에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탐내어 청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퇴계의 아들은 그 자리가 과분하고 부친도 말리며 탐내는 사람이 많아서 사양했지만 결국 문소전 참봉으로 임명되고 말았다. 뒤에 알아 보았더니 조송강이 전생서는 유가자제가 있을 곳이 못된다고 극력 주선해서 바꾸어 놓았다.
제용감 봉사(濟用監 奉事)로 근무하던 아들이 한 달이 못되어 전근을 희망했다. 그곳은 비리와 부정이 많아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근무하기 힘든다고 부친에게 힘을 써서 옮겨 달라고 아뢰었다. 제용감의 부정은 그냥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마침 판서의 편지에 답할 일이 있어 제용감에 일어난 일을 알렸다. 그리고 아들이 겪은 일과 불안해 하는 것도 썼다.
제용감엔 일이 복잡하고 사건도 많이 생기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원래 네가 벼슬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겨우 한 달이 채 못되었는데 제 욕심대로 전근을 하겠다면 남들은 가만히 있겠나. 말들이 무섭다. 이조판서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 답장에 사실만을 알려뒀으니 잠자코 있거라. 이번의 네 편지 보고 할 일과 안할 일을 헤아리지 못하고 벌써 전근에 생각이 쏠리다니 내 뜻과는 다르다. 모든 일은 하늘에 달렸다. 어찌 하늘의 뜻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제 좋은대로만 다 하려는가. 남의 여론도 살펴야 하지. 이 일에 대하여 이미 말한 것도 후회막급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말씀드리겠나! 판서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1568년(무진)퇴계의 아들이 안동의 안기도 찰방에서 전근할 때의 일이다. 퇴계는 전근 기미를 손자에게서 전해 듣고 서울에서 편지를 보냈다.
안도의 지난번 편지에 '아버지가 중간에 전근될 듯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어떻게 전근될 듯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잔폐(殘廢)한 관청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꺼린다. 내가 싫어하는 곳을 남이 즐거워 할 리 없으므로 남의 원한을 많이 살 것이다. 이조에서 바꾸어 준다면 모르거니와 청탁해서 전근하려는 생각은 아예 삼가라.
이 밖에도 집안사람들에게 전근 청탁을 하지 못하게 가르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셋째, 공무원은 마음이 맑고 일을 잘 해야 한다.
나라의 살림을 맡아 일하는 사람을 관료라 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공무라 한다. 공무는 사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남을 위한 일을 말한다. 관리는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고 좋아서 그 직업을 택하여 봉사한다. 따라서 공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의기(義氣)로써 민중과 접해야 한다. 리(利)는 버리고 의에 살아야 하며, 사보다는 공을 중히 여겨야 한다. 따라서 정의감과 도의심이 강한 자만이 공무원이 될 자격이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도심으로 공도(公道)를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퇴계는 관리를 다른 말로 냉관(冷官)이라 말하고, 냉관은 그 마음이 청렴하고 고요하고 담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이 관료생활을 할 때 실천했고, 출사하는 집안사람들에게도 마음 쓰는 법으로 가르쳤다. 공도를 지키고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면 차가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해라. 후회스럽고 부끄러울 일은 저지르지 말아라. 관리의 마음은 지극히 맑아야 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부정한 일을 꼭 저지르고 만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라.
이렇게 공무원의 심성과 기본자세를 가르쳤고, 당시의 고관자제들의 불의를 보고,
요새 보니 부형의 덕으로 음과(蔭科)를 거쳐 원님이 된 사람중 이권(利權)에만 마음을 쓰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않아 국민의 미움과 원망을 사고 있어 민심이 위태롭다.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라고 우려했다.
부형의 덕으로 쉽게 벼슬길에 나가 수령자리에 앉아서는 재물을 긁어 모으고 리(利)외에는 돌아 볼 여유도 없었으니 국민의 인심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혼탁하고 비리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유가자제와 선비 신분으로서는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격히 가르쳤다.
추석 때 경주에서 보내 온 절찬(은어)의 출처에 불의(不義)가 있지 않았나 따졌다.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핑계로 가정에 물건을 함부로 보내는 것은 공도를 어기는 일이라며 말렸다. 사(私)를 제어하고 국법을 지켜야 하므로 아들이 근무하는 고을에서 보내온 감 한 접을 되돌려 관청에서 쓰게 한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들이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에서 전근되어 봉화현감으로 부임할 때의 이야기이다. 봉화에 먼저 부임을 하면 모친의 기제사에 참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부임하려 하였다. 이것을 전해 듣고 퇴계는 나무랐다. 왕명으로 수령 자리에 나가는 목민관이 그 골을에 부임도 하기 전에 사가에 먼저 들르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면서 먼저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 어버이의 제사 때문에 공사를 혼돈해서는 안된다고 기어코 선부임(先赴任) 후귀근(後歸覲) 시켰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퇴계와 같이 공무에 있는 자식을 바로 인도하고, 공사를 구별해서 염정고담(恬靜苦淡)의 냉관생활로 유도해 준다면 인의가 있는 나라, 예의 염치가 있는 나라, 질서가 서는 나라가 될 것이다.
주고 받는 것의 구분
계는 남에게 물품을 받을 것과 못 받을 것,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나 퇴계는 그렇게 처리하였다. 직접 실행한 예를 몇 가지 들어 본다.
첫째, 나이 많은 연장자가 권하는 것은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 사람이 계상서당에서 선생을 모시고 술을 마셨다. 벽오장(碧梧丈 : 李文樑)께서 술을 김이정(金而精 : 이름 ; 就礪)에게 권하셨다.(벽오는 먼 서울에서 온 손님이라고 술을 먼저 권한 것임) 이정이 이를 굳이 사양하자 선생께서 나무라시며 '사양에도 도가 있네. 친구사이에는 사양하는 것이 옳지만 어른이 권하는 것은 사양말고 받아야 하네'라 하셨다.
『이간재의 글에서』
둘째, 아무리 부모를 위하는 일일지언정 조금이라도 불의가 있으면 그 물건을 받을 수 없다.
퇴계는 아들이 보내온 은어를 받고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은어가 어디서 생겼는지 잘 알았다. 출처를 알았기 때문에 받아도 무방할 것 같다. 흔히 효심이 지극하면 무슨 일을 하든 괜찮은 줄 알지만, 부모를 위하는 일일지라도 조금만 불의가 끼어 있어도 아니된다.
『아들 준에게 한 편지에서』
셋째, 의롭지 않은 것은 사양해야 하고, 불의가 없으면 사양할 필요가 없다.
이간재가 퇴계에게 '공자께서는 친구가 준 마차와 말을 받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이정이 주는 당나귀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물었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서로 다르다. 공자는 친구한테서 받았다. 그리고 의가 있었다. 공자는 그 친구의 부모가 계셨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에게는 부모가 계시는데 어찌 감히 받을 수 있느냐!
『이간재의 기록에서』
넷째, 남의 물건을 받을 때에는 의ㆍ불의를 꼭 알아보고 박절하지 않게 한다.
선생과 친한 친구 중에서 더러 물건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었다. 군수나 감사들이 보낸 물건은 반드시 의로운 것인가. 불의로 얻어진 것인가를 밝혀본 후에 그 물건을 받았다. 여러 친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줄 경우에도 그 사람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여러 모로 생각을 깊이 했다. 물건의 사수(辭受)엔 박절한 처사를 하지않는 것을 요체로 삼았다.
『김설월당의 기록에서』
여기서 퇴계가 말한 의ㆍ불의에 따라 물건을 주고받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를 정리해 본다.
무명의 물건과 어떻게 생긴 것인지(어디서 온 것인지, 왜 보낸 것인지, 누가 보낸 것인지)분명치 않은 것은 사양해야 한다. 아들이 안기찰방으로 있을 때 어느날 꿩 한 마리를 보냈더니 '무명'의 것이며, 어떻게 생긴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안기역으로 반송했다.
남에게서 물건을 받은 후 그 물건에 대한 답례로 갚지 못할 것은 받아서는 안된다. 승려가 생강을 갖다 드렸다. 선생께서 '너의 생리로 봐서 내가 이러한 음식물을 갚을 수 없구나. 그만 가져 가거라'하고 물리치셨다.
부탁이 있어서 주는 물건은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 물건은 뇌물이며, 물건을 받으면 일을 교란시키고 사리판단이 어두어진다.
『이간재의 기록에서』
축하와 전별의 뜻으로 보내오는 물건을 미리 엄금하거나 돌려보냈다. 퇴계가 안동부사를 제수받았을 때 안동에 사는 사람이 혼인 일로 왔다면서 축하를 하고 고기를 선물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 그 고기를 되돌려 보냈다.
『 김설월당의 기록에서 』
퇴계가 통정대부로 승진하자 친구인 조송강(趙松岡)이 당상관 옷을 선사했다. 선생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김설월당의 기록에서』
퇴계가 소명을 받아 상경하기 직전의 이야기이다.
내가 출발하는 것을 처음에는 알리지 않았으나 역을 통과해야 하므로 21일에 갈거라고 그 곳 사람에게 말했더니, 그 사람이 역리와 현리(縣吏)에게 전해서 현령도 알고 사람을 보내 출발하는 날을 묻는구나. 들리는 소문에 내 옷과 안장 덮개를 해준다는데 이번에는 새옷을 입지 않아도 되므로 헌옷을 기워 빨았으니 잘 말해서 돌려보내라. 안장 덮개는 내게 없으므로 쓰겠다. 여러 관원에게 전별할 생각은 아예 말도록 네가 단단히 이야기해서 꼭 중지시켜라. 듣지 않으면 내 병이 또 더 심해질 것이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官)에 폐를 끼치는 물건이나 일은 삼가하고 받지 않았다. 퇴계의 아들이 내의원에 부탁해서 약을 구해 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불가(不可)라 했다. 제자가 '약은 다른 물건과는 다르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의리상 미안한 일이므로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다'고 대답했다.
『우추연의 기록에서』
양이 많은 물건은 그 일부만을 받아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비록 불의의 물건이 아니라 해도 그 양이 많을 때는 반드시 사양하고 그 중 일부만 받고 돌려 주는 것이었다.
『김학봉의 기록에서』
보낸 물건은 어디서 생긴 것인가! 항상 이런 일로 불쾌하다. 다 뿌리칠 수도 없고 그것을 받을 수도 없다. 이번만은 일부를 받아서 이웃 집에 나누어 주기로 하자.
『아들에게 한 편지에서』
국왕의 하사품이라도 책은 받고, 밀이나 향, 돈피 가죽옷 같은 것은 받지 아니하고 반환하였으며, 상의원 (尙衣院 : 왕실의 의복, 돈, 보물 등을 맡아보는 관청)과 의논해서 처분하였다.
여러 하사품 중에서 책만을 받아라. 내가 참찬의 자리에 있지도 않은데 참찬에게 주는 하사품을 받을 수 있느냐! 이곳으로 보내지 말고 그냥 서울에 두어라. 후일에 내가 편지로 시킬테니 그 때 가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손자 안도에게 한 편지에서』
어사 단자(御賜 單子)와 향 같은 것은 금응훈(琴應壎)이 가는 편에 편지와 함께 보내니 장계는 정원(政院)에 갖다주고 향은 상의원과 의논해서 시키는대로 회납하면 된다.
『아들 준에게 답한 편지에서』
하사한 말은 최장원(崔掌苑)이 받아서 우선 맡아 있단다. 그말을 여기까지 보내면 다시 보낼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둬라. 큰 말 여러 마리를 기르려면 힘이 많이 드는데 어찌 다 기르겠느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사품 돈피를 받은 모양인데 죄스럽고 미안하다. 하사품을 받은 일은 큰 잘못이다. 함부로 손질해서 다른 물건을 만들지 말아라. 그 댁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되돌려야 한다.
『손자 안도에게 한 편지에서』
부모의 제삿날이나 왕실의 기일(忌日)에는 육류를 받지 않고 또 보내오면 모두 반환해 주었다.
1565(을축)년 겨울에 안동부사 윤복이 문안하고 무엇을 놓고 갔다. 나중에 그가 가고난 뒤 뜯어보니 노루고기였다. 퇴계는 그날이 제삿날이므로 편지를 써서 함께 돌려 보냈다. 또 12월 24일에 조월천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선생을 대접했는데, 술은 받고 고기는 물리쳤다. 그날이 성종임금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우추연의 기록에서』
이상과 같이 8가지 엄격한 규범을 정해두고 실천하였다.
또한 퇴계가 사양하지 않고 물건을 받은 때는, 그 물건의 용도와 보내준 성의ㆍ수고에 대하여 철저하게 답례를 보내는 것이었다. 김학봉의 기록에 따르면 퇴계가 물품을 받아서는 먼저 형에게 나누어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웃 친척과 집에 와서 공부하는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줬다. 또,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녹봉을 받아 집에 필요한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에게 나누어 주어 생활을 도왔다 한다.
집안사람에게 한 편지에 의하면 물건을 남에게 줄 때에도 운반하는 사람의 수고를 매우 걱정하였으며, 제사를 위해서 먼길에 사람을 보낼 때도 안타깝게 여겼다.
아랫사람에게 의복과 음식물을 받으면 그들의 생활형편을 더 염려했다. 선물의 정성에 대하여 꼭 감사를 표시하고 답례품을 보냈다.
손부 권씨가 버선 두켤레를 기워 보냈을 때 다음 편지로 답했다.
보내온 버선 두 켤레는 잘 받았으나 네 댁이 병중인데 하필 이렇게 해야 하나 …….
조카사위 민시원(閔蓍元)이 물건을 보내오자 거절하지 못하고 받은 뒤에 이렇게 주의하는 것이었다.
서경(筮卿 : 민공의 자)에게 당부하네. 관문에 물건과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묻는 것은 도리가 아닐세. 하물며 자네 내외가 병환 중인데 꼭 이렇게 정성을 보내야 하나. 마음이 편치 못하네. 자네 집과는 숙질간이라 다른 사람처럼 성의를 막을 수가 없어 이번은 받네만 부끄럽네. 이 뒤로는 이러지 말게. 나의 옹졸한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만일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 땐 받지 않을 걸세.
시병(侍病)중의 조카사위 최덕수(崔德秀)가 음식물을 보낸 적이 있었다.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로 회사를 했다.
세 가지 음식물은 고맙게 받았네. 감히 돌려보내지 못하고 받네만 어른이 환후(患候) 중인데 왜 이렇게 애를 쓰는가. 참으로 미안하네. 내 뜻을 어른께 잘 전하게. 시탕(약 달이는 것) 잘 하기 바라네.
혐의의 분별
의(嫌疑)를 분별하는 것을 '별혐(別嫌)'이라고 한다. 이 말은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에도 쓰이지 않았다. 권창설이 퇴계의 말을 인용하여 언행통록을 편집하면서 한 항목으로 세운 덕목으로서 이는 퇴계의 교육과 생활에서 나타난 도덕적 행동 특질이고 덕행의 하나이다. 즉, 퇴계는 언행을 조심해서 의리 시비 곡직을 분별하여 모든 일을 대처해 나갔다.
먼저 '별혐'에 대한 퇴계의 이야기를 듣고, 그 실생활을 알아보자.
선생께서는 의(義)와 리(利 : 이익, 私利)에 대한 분별이 엄격하시고,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깊이 살피시어 별혐이 밝고 뚜렷해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으셨다. 의롭지 않은 것은 국왕이 주는 국록도 사양하시고, 남의 물건은 함부로 받지 않으셨다.
고 제자들은 기록했다.
이처럼 의리 취사(義利取捨)가 확실한 퇴계였음을 알 수 있다. 별혐을 가르친 퇴계의 예화 하나가 있는데, 제자들에게 별혐을 설명할 때 자주 이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상주가 되어 극진히 집상하다가 그만 병을 앓게 되었지. 상주는 약을 먹고 치료를 하는데, 시탕하는 일을 계집종에게 시켰어, 이것이 상주의 불찰이었던 걸세. 어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상주가 병을 핑계로 약닳이려 드나드는 종을 범했다'고 말을 퍼뜨려 금방 온 동네에 퍼져나가서 세상이 다 그런 줄로 믿어 버렸지. 그 뒤 이 상주는 어떻게 되었겠어. 진작 깊이 생각해서 처신했어야 했는데 '별혐'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탓이거든.
알아듣기 쉬운 적절한 사례를 들어 가르쳤고, 이는 누구나 살아가는데 참고해야 할 일이다. 다음 퇴계가 실천한 별혐의 실제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 이야기는 1567년 67세 때의 일이다. 명나라에서 세종이 죽고 융경(隆慶)황제가 즉위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신이 오게 되었다. 사신을 대접하려고 학문이 뛰어난 학자를 불러 올리는데 퇴계가 또 발 탁되었다. 퇴계는 외교문제라 건강을 무릅쓰고 상경했다. 그러나 워낙 건강이 나빠 바로 숙배하지 못하고 사흘 동안 병조리와 노독을 풀고 있었는데, 상경한 지 3일만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할 수 없이 나가서 곡배(哭拜)는 하였으나 무척 괴로운 몸이었다. 이런 퇴계에게 명종의 행장을 편찬하는 당상관의 책임이 지워졌다. 명종행장을 편찬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예조판서로 승진 발령하는 것이었다. 퇴계는 건강이 나빠 하는 수 없이
판서 일을 맡아서 해낼 인재가 못된다. 이름만 괜히 알려진 것이지 아는 것이 없다. 아픈 몸으로 중요한 자리만 차지하고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도리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나를 속이는 짓 밖에 안된다.
는 이유를 들어서 하루 세번 사직 장계를 올리고 선조의 윤허를 받아 서울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하룻밤 쉰 뒤 예안으로 귀향해 버렸다. 퇴계는 병을 치료할겸 용두산 용수사에 들어가 지냈다.
얼마 후 기고봉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명종의 능(陵)이 완성되기도 전에 귀향해버렸기 때문에 여론이 들끓는다는 내용이었다. 손자 안도도 조정에 떠도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써 보내왔다. 이 때에 퇴계가 답한 편지내용에는 엄격한 별혐의 실천요령이 적혀 있다. 그 골자는 어려운 말로 무분소(無分疏)와 반척성(反 省)이다. '무분소'는 변명할 필요가 없고, '반척성'은 스스로 깊이깊이 생각하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기고봉에게 퇴계는 말했다.
의리를 알고는 안떠날 수 없었다. 옳은 줄 알면서 행하지 못하면 의가 아니다. 도를 아는 사람은 설명 안 해도 알지만, 도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다.
고 하였다. 남에게 받은 혐의를 변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척성( 省)하고 분소(分疏)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꿋꿋하고 의연하게 조정물의를 이겨냈다.
퇴계의 별혐은 병자의 몸으로 어찌 그 힘들고 소중한 자리인 예조판서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느냐는 데 있었다. 벼슬을 탐냈다는 혐의를 당대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무능력하고 병든 사람이 지위를 탐내는 것은 바로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은연 중 퇴계의 의도에는 벼슬에 연연하고 탐내는 자를 경계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로서 도산서당 앞 천연대 밑 낙동강에는 은어가 많고 예안현감은 이 은어를 잡아서 나라에 진상해야 한다. 금렵(禁獵)하고 있었고 잡을 때는 관에서 나와 어량(魚梁 : 고기잡는 발이나 그물) 을 설치해 잡는다. 어량은 늦은 여름부터 가을에 설치한다. 이동안 퇴계는 자주 나가 즐기던 천연대 아래에는 아예 가지를 않고 계상에서만 지냈다.
어량 관계 이야기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퇴계가 자하봉 밑에 터를 잡아 집을 짓다가 그 아래 낙동강에서 어량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대골로 옮긴 이야기와 예안현감이 서원 앞에서 은어를 다 잡은 늦가을에 지방 인사를 초청해서 은어를 대접하는 이야기이다. 퇴계에게도 연락이 오지만 응하지 않고 아들을 보냈다. 그 까닭은 앞의 이야기는 혹 어린 손자들이 범법을 하랴. 또는 괜스레 관의 오해(혐의)를 받을까 싶어서였고, 뒤의 이야기는 하급지방관에게 상급전관(上級前官)이 대접을 받으며 폐를 끼치고, 또 세도를 부렸다는 혐의를 받을까 봐 그랬던 것이다.
마지막은 퇴계가 가족을 두고 혼자 단양과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야기이다. 이것도 다 별혐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부형이 고을을 살 때 아들들이 따라가 있는 것은 의리에 어긋납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다. 퇴계는
국법에는 처자를 데리고 가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다. 다만, 혼인 후의 딸이나 아들은 금했으나 이도 월급제가 아니고 관물로 생활하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가면 그 고을 물건을 많이 축내고, 또 관사를 더럽히기 때문에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삼가고 있다.
고 답했다. 아들과 조카들이 문안을 와도 여러 날 있으면 폐를 끼치므로 머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법에 있는 제도는 어떻게든지 지킨다는 퇴계의 공직자 자세다.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그 고을 재산을 축내지 않고 폐를 덜 끼친다는 청관의 정신, 바로 이것이 퇴계의 백성을 위하는 정치철학이었다.
퇴계의 '별혐지엄'(別嫌之嚴)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형이 감사로 오자 미리 그 도에서 타도로 전근해 간 일, 자기가 벼슬을 하고 있는 동안은 아들을 출사하지 못하도록 한 일, 지방 장관이 방문해 오는 것도 그 때 상황에 따라 금한 일, 아들과 조카들은 세도가의 집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한 일 등, 이는 모두 별혐사상에서 취해진 처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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