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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일대기-제1부-(1) 본문

퇴계선생의 가르침

퇴계선생 일대기-제1부-(1)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6. 8. 21:20

 

지은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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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15.jpg 계 이 선생의 휘(諱)는 황(滉), 자(字)는 경호(景浩)이며, 1501년(신유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 이씨(眞寶 李氏) 가문의 아버지 이식(李埴 : 증직 좌찬성. 후세 사람이 '찬성공'이라고 부름)과 어머니 춘천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위로 두 형과 누나는 전모(前母) 의성 김씨에게서 났고, 아래 다섯 형제는 박씨부인에게서 태어났다. 퇴계는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 박씨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퇴계 가문의 진보 이씨 세거지를 간추려 보면, 진보 이씨 시조 석(碩)은 고려말기에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서 살았고, 2세인 자수(子脩)가 안동군 풍산면 마라촌으로 이사했다. 3세는 운구(云具)와 운후(云侯)형제로 나뉘어지고, 아우인 운후의 아들 정(禎)이 우양(遇陽) 흥양(興陽) 계양(繼陽)삼형제를 두어 5세(五世)부터 번창한 문중을 이루었다. 퇴계는 이 삼형제중 맨 끝인 계양(호ㆍ老松亭)의 맏아들의 막내이다. 퇴계의 조부 삼형제 중 맏집 우양후손을 주촌파라 하고, 가운뎃집 흥양 후손을 망천파라 부르며, 끝의 노송정 계양 후손을 온혜파라고 한다. 7형제(潛, 河, 瑞麟, 16.jpg , 瀣, 澄, 滉)중 서린(瑞麟)은 어릴 때 죽었고, 6형제가 낳은 팔세(八世)가 27명(남 18명, 여 9명)이며, 이후 이 계파가 번창하였다. 그 중 퇴계의 후손을 선정파(先正派)라 부른다.  

진성 이씨는 호적에 지금도 진보로 공식 본관을 쓴다. 그러나 세칭 본관은 진성 이씨(眞城李氏)라 쓰고 부른다.  

퇴계에게는 아들만 셋이 있었으나 둘째아들 채(寀)는 결혼 전에 죽었으며, 맏아들 준(寯)과 막내 적(寂)에게서 일곱 명의 손자와 두명의 손녀가 태어났다. 학문과 선조의 유업은 주로 맏집 후손들이 계승ㆍ발전시키고 있다.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따돌림을 받을까 봐 남들보다 몇 배 공을 쌓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매우 엄한 교육을 했다.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갈명(墓碣銘)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을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어머니 박씨가 퇴계를 잉태할 때, 꿈에 공자가 대문에 와 있었다고 하여 태실(胎室 : 태어난 방)이 있는 온혜의 노송정 큰 댁 대문을 성임문(聖臨門)이라 했다.  

퇴계의 골상에 관해서는 이마가 넓다하여 숙부 송재공(松齋公, 李 17-1.jpg : 승지, 어사, 안동부사, 강원감사, 참판)이 이름 대신 광상(廣 17-2.jpg : 넓은 이마)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품이 엄한 숙부가 일찍이 어린 퇴계를 가리켜 '이 아이는 커서 반드시 우리 가문을 지켜나가고 빛낼 것이다'하고 기뻐했으며, 퇴계의 넷째형 해(瀣 : 호ㆍ온계, 시호 ; 정민공 대사헌 감사)와 함께 기리어서 '형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 두 아들을 두셨으므로 결코 세상을 떠나신 것은 아니다'하고 고인이 된 형을 위로하며, 또 조카의 앞날을 촉망했다고 한다.  

퇴계는 여섯 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덟살 때는 형이 칼에 손을 베어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할반지통(割半之痛 : 자기 몸을 찢는 듯한 아픔, 형제가 서로 아끼는 지극한 우애를 말함) 을 느껴 울 정도로 우애깊은 소년이었다고 한다.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하였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했다. 한밤 중에 깊이 잠을 자다가도 윗사람이 부르면 즉각 응대할만큼 조심 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퇴계의 남다른 소행(素行)을 발견한 집안 어른들은 그를 애지중지하며 장래를 크게 기대하였다고 한다.  



 

스승과 벗,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15.jpg 계가 학문에 입학한 것은 여섯 살 때인 1506년이다.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이웃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으며, 숙부가 벼슬살이 중이므로 집안에서는 천자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부득이 이웃집에 글을 배우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같은 마을 이웃 노인에게 글을 배우면서 무척 신망을 받았다. 퇴계가 훈장댁 문전에 이르면 먼저 배운 것을 다시 외워서 완전히 익힌 뒤에 들어가 다시 배우는 것이었다. 퇴계의 형제들은 모두 숙부 송재공에게 글을 배웠다. 퇴계가 여섯 살 때에 셋째형 의(13세)와 넷째형 해(11세)는 진주목사로 가 있는 송재공을 따라 진주 월아산 청곡사(月牙山 靑谷寺)에서 공부를 했다.  

마을 노인이 웬만큼 글을 가르치는 분이었다면, 모두 마을에서 함께 배웠을 것이다. 또 퇴계가 좀더 컸었다면 형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퇴계가 열두 살 되던 해 송재공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서 병환을 조리하고 있었다. 이 때 사촌동생 수령(壽 19.jpg : 송재공의 아들, 퇴계보다 한 살 아래)과 형 해와 함께 논어를 배우게 되었다. 퇴계에게 천자문은 이웃 노인이 가르쳐 주었지만, 학문의 지혜를 열어준 스승은 바로 송재공이었다. 퇴계의 형제ㆍ사촌은 집안 어른인 송재공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은 셈이다.  

퇴계는 열두 살에 이미 문의(文意)를 깨치고 이학(理學)과 학문하는 방법을 완전히 터득했다.  

논어의 학이 제륙(學而 第六) ─'공자께서 말했다.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밖에 나가서는 이웃 어른을 공경하며,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여러 사람과 사귀되 어진이와 가까이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비로소 글을 배운다'─ 을 배우고 나서 '사람의 자식으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바로 여기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자장편(子張篇)을 배울 때 주석문(註釋文) '리(理)'를 읽고서는 황홀하게 깨달은 바 있어서 숙부에게 묻기를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리(理)라고 합니까?'하였다. 송재공이 그때 '너의 학문은 리로써 문리를 얻은 것'이라고 평가했었다. 또, 송재공에게 논어를 배울 때에 집주(集註 : 여러 사람의 주석을 한데 모은 책)를 첫 장부터 맨 끝에 이르기까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철저히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법을 익혀 실력을 쌓았던 것이다.  

미국 하바드대학 두 웨이 밍(杜維明)교수는 퇴계의 경전을 읽는 방법을 중국 송나라 학자인 주자에게 계승했다고 보았지만, 실은 숙부에게서 가학으로 전수했고, 논증과 주석은 주자의 방법을 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세에 문리를 얻은 퇴계는 사우(師友 : 스승과 벗)를 얻지 못했으나 대철학자의 기틀을 잡은 것이었다.  

14세가 되자 퇴계는 호학지인(好學之人)으로 성장했다. 또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인격을 흠모하여 도시(陶詩)를 익히고 지어보기도 했다.  

16,7세 때는 학문에 몰두하여 친구와 함께 수학(修學)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문에 온전히 입지한 퇴계는 18세에 이르러 우주를 관조하게 되었고, 19세 때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터득하였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의 첫 권과 끝 권을 읽는가 하면, 소학을 읽고, 의학강습을 받고, 또다시 논어를 정독(精讀)하는 등 종횡무진 무불통지의 의욕으로 섭렵해 나갔다.  

20세 때는 침식을 잊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주역공부에 몰입해서 독학으로 그것을 기어코 독파했다. 이 때 퇴계가 터득한 주역의 이론은 산학(算學), 과학, 철학, 정치학, 문학의 기초를 이루었고, 후일 주자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바로잡는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20세를 넘어서는 혼인하여 아들을 얻고 예안을 떠나 서울을 드나들면서 세계를 넓히는가 하면,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학문사회의 경험을 쌓으며 자신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퇴계의 최초 동문수업자는 넷째형과 사촌동생 수령이고, 과정은 논어였다. 지도는 송재가 하고, 교실은 작은댁 사랑방이었다. 지도를 맡은 송재공은 대과를 거쳤으며, 내직으로는 참판(차관)에 이르렀고, 외직인 감사(도지사)로서의 치적도 쌓은 고관이었다. 교육방법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해서 탐구능력과 자학의 힘을 기르는 한편, 재기(才氣)를 발견해주어 스스로 입지독학(立志篤學)하는 길을 택했다. 때문에 퇴계는 학문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고, 숙부는 바라던 가문을 지키고 빛내 줄 인재를 얻게 되었다.  

15세 때 봄, 퇴계는 숙부를 따라 넷째형과 함께 청량산에 가서 독서를 하였고, 6월에 송재공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겨울에 안동에 가서 친구와 함께 수렵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6세 때는 봄에 사촌동생과 권민의(權敏義)ㆍ강한(姜翰)과 함께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고찰 봉정사(鳳停寺)에 들어가서 수학했다. 이 해에 송재공은 집안 젊은이들의 공부 장소로서 안동의 자성(子城) 서북쪽에 애련정(愛蓮亭)을 세웠다.  

17세의 8월에는 순찰하러 온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 : 호 ; 慕齋)의 강연을 넷째형과 함께 들었는데, 여기에는 향교의 학생 모두가 참가하였다.  

18세 때는 안동부사 이현보(李賢輔 : 호 ; 聾巖, 松齋公 별세 후 그 후임으로 부임함)가 안동에서 유생(儒生)대회를 열자 이 때도 참가하였다.  

19세 때는 영주 의원에 가서 의학강습을 받았다. 그 때 거기에 와 소학을 읽고 있던 박승건(朴承健)으로부터 소학을 읽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퇴계의 행실이 소학의 내용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퇴계는 아직 읽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20세 때는 용두산 용수사에서 역학공부에 몰두하였고, 23세 때는 성균관에 유학을 하고, 두 달만에 귀향했다. 그리고 26세 때는 넷째형이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므로 형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큰댁의 많은 책으로 공부를 했고, 장차 하려는 꿈을 다음 '산거(山居)'시로서 포부를 나타냈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平生志願更難量)  

 

퇴계는 27세에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다.(이 때의 생원 시험지는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실물 그대로 소장되어 있음.)  

33세 때 봄에는 곤양군수 어득강(魚得江)의 초청을 받아 의령, 함안, 마산, 진주, 곤양 등지를 여행하여 남행록(南行錄 시 109수)을 지었다. 그 해 여름에는 형을 따라 사촌과 함께 성균관에 다시 유학을 하고 서행록(西行錄 시 39수)을 지었다. 이 때 김인후(金麟厚 : 호 ; 河西, 퇴계보다 9세 아래임)를 만나 함께 다정히 지냈다. 하서는 부패한 그 시대의 선비사회에서도 드물게 군자의 도리를 다하는 퇴계를 보고 무척 따랐다. 학문을 강론하고 사회 형편을 근심하는 퇴계가 하서에게는 어진 군자로 보여 그를 존경하였다. 그 뒤에 퇴계는 성균관을 떠나면서 하서로부터 부자(夫子)로 숭앙받는 시를 얻었다.  

 

선생은 영남에서 빼어난 분이외다. (夫子嶺之秀)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시며 (李杜文章)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비기리다. (王趙筆)  

 

이 때 퇴계는 귀로에 사림의 두 거물을 만났다. 서울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사람은 권벌(權 22-1.jpg : 호 ; 22-2.jpg 齋)이었고, 찾아가 본 인물은 17세 때 안동에서 뵌 적이 있는 김모재였다. 모재는 그 때 간신들의 모함을 입고 파직당하여 여주 이호촌에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재와 충재, 퇴계는 오랜만에 정인군자론(正人君子論)을 강론하면서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골에 돌아온 퇴계는 다시 향시(鄕試)에 응하여 수위의 영광을 차지했고, 처남 허사렴(許士廉 : 호 ; 蒙齋)을 불러서 청량산 절간에 함께 가 독서하였다. 이 때 동참한 사람은 김사문(金士文)과 금축(琴軸)이었으니 퇴계의 재야수학(在野修學)과 절간 유학의 마지막 친구라 할 수 있다.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어 동래로 출장을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묵었다. 이 때 그 고을의 이순(李純) 목사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면서 황극 내편과 참동계(參同契 : 중국인 갈홍[葛洪]의 신선전)의 수련법을 배웠다. 4년 후 어명으로 최세진(崔世珍)이 황극경세설(皇極經世說)을 지어 올려야 할만큼 그 당시 관심이 높았던 황극에 관하여 이미 10년 전에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을 저술해서 나라에 바친 고명한 이순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은 퇴계에게 여간 뜻깊고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훗날 퇴계가 유학자로서 수련법을 활용하고, 정좌(靜坐), 정와(靜臥)를 한 것은 이 때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그 23년 뒤 서울에서 김득구(金得九)에게 참동계를 빌어서 읽은 경험과 그동안의 관심은 이 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41세 때는 민기(閔箕) :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동호(東湖)의 독서당에 선발되어 독서를 하게 되었다. 퇴계는 서당 남쪽 누각의 한 구석방을 문회당(文會堂)이라 이름하고, 거기서 기거하며 '독서만록'이란 독서록을 쓰면서 정진했다.  

독서당에 뽑히는 것은 문신으로서 덕과 재주를 인정받는 것이므로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풍조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이가 많아서 퇴계는 빈 독서당의 당직을 주야로 혼자 맡아 할 때가 잦았다고 한다. 퇴계는 국가가 뽑아서 시간을 내주고 마음껏 공부하게 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또 인재양성의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서 착실히 근무하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철저한 수도의 생활  

 

 

 

15.jpg 계가 산수를 즐기며 수양 자득(自得)하는 도(道)는 결론부터 말하면, 이름 있고 경치 좋은 자연을 두루 돌아보고 그 곳을 잘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한편, 심기(心氣)를 단련하는 묘법을 수련해서 인성을 함양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혼연일체가 되어 높은 학문을 성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퇴계는 평생 진력하였다.  

퇴계의 요산(樂山)철학은 문인 권호문(權好文 : 호 ; 松巖)에게 답한 편지에 담겨 있다. 이 글은 자성록(自省錄)에 뽑아 실은 명 논문이기도 하거니와 '요산 요수는 인성을 기르는데 큰 뜻이 있다'는 수양의 원리를 해설해 놓은 퇴계의 등산학 개설이기도 하다. 소백산 유산록에는 보다 구체적인 해설이 담겨 있는데, 한 구절을 예시하면 '나무들이 어려움을 참고 갖은 고생을 하여 싹이 자라 성장하는 데서 인간이 살아가고 물체가 자라 움직이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산에서는 경중(輕重)과 진은(眞隱)의 참 맛을 알며, 고요와 정적의 참뜻을 알고, 인간의 영욕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퇴계의 소백산 유산록은 주세붕(周世鵬 : 호 ; 愼齋)의 청량산기와 더불어 본질적인 산기(山記)로서 유명하다. 퇴계는 실로 산을 알고 산에서 배우며 산을 통해서 인성을 가르치려 애썼고, 산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서 이름짓고 찾아내고(영주의 지방사 폭포소)그것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요산 요수의 본령을 깨달았던 것이다.  

퇴계가 자연과 융회(融會)하고자 맹자(孟子)의 양기법(養氣法)과 주자의 수양법을 체득하는 실험은, 66세 때 10월 24일에 있는 월란대(月瀾臺)의 수련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유산(遊山)하는 목적은 그냥 산을 알고 경치를 구경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선배 철학자들이 산에 가 호연지기를 기르고, 옛 유학자들 가운데 참동계를 수련하고, 선(禪)을 실지로 체험하는 것이 퇴계의 수련생활이었다.  

어느날 퇴계는 꿈에서 만학동천(萬壑洞天)의 선경(仙景)을 다녀와 그것을 시로 읊고 그러한 곳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월란대 칠대수행(七臺修行)이다.  

초은대(招隱臺), 월란대(月瀾臺), 고반대(考槃臺), 응사대(凝思臺), 낭영대(朗詠臺), 어풍대(御風臺), 능운대(凌雲臺)를 밤낮 순회하고, 삼곡(三曲), 청하(靑霞), 자하(紫霞), 영지(靈芝), 건지( 26.jpg 芝) 용두(龍頭), 청량(淸凉), 국망(國望) 등의 산과 물굽이를 바라보고는 한밤중에 낭영대 소나무 아래에 엄연히 앉아서 칠대삼곡시(七臺三曲詩)를 읊었다.  

나중에 퇴계가 돌아오자 제자인 간재(艮齋 : 이름 ; 李德弘)가 왜밤낮 산에 가 계셨는지 그 까닭을 물었더니, 퇴계는 '꿈 속에 본 산천을 찾아가서 실지로 체험해보고 싶어 그랬다. 그리고 선배 유학자들이 산수를 통해서 묘법을 함양했기 때문에 한 번 실험해 본 것이고, 신선이 노는 경지도 맛보고 싶었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퇴계의 수행(修行)은 선배 유학자와 신선의 수양방법을 몸소 겪어서 깨닫는 데 있었다. 선배 유학자의 말을 그냥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실험을 통하여 체득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겪어보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경험들을 제자와 교육에 산 교재가 되고 선배 유학자의 이론에서 일보 전진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퇴계의 수도에는 자연과 더불어 융회 도통한 이야기가 많다. 집근처에 일관성 있게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 두었으며, 자연을 벗하여 시를 읊고 자연과 더불어 인성을 함양했던 것이다. 시내가 있어야 하고, 바위가 있어야 하고, 매화 ; 소나무 ; 국화 ; 대(竹) ; 연(蓮)이 있고 지당(池塘)도 있어야 했다. 이들 이름은 원(園) ; 사(社) ; 당(塘)으로 붙였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함께 벗할 수 있게 가까이 끌어다 친구로 삼 았다. 여울의 물소리를 옥돌의 소리로, 바위는 거문고를 타는 의자로, 매화는 형(兄)으로, 연은 깨끗함의 상징으로, 국화와 송죽은 절개의 표상으로 아끼고, 친하면서 인성과 기상을 조화있게 융합시킨 철저한 수행생활이었다.  

 

 


 

주독야사의 생활규범 실천  

 

퇴계는 엄숙한 아침 생활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대개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연구를 시작했다.  

이러한 아침 생활은 서울에서나 시골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도 잘 지켰다고 한다. 특히 심경(心經)을 외우는 일은 일과에서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퇴계가 심학(心學)에 대해 얼마나 힘썼던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낮에는 독서를 위주로 하고 사색은 주로 밤에 했다. 제자에게도 낮엔 읽고 밤에 생각(晝讀夜思)하는 독서법을 가르쳤다.  

독서내용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의리의 책과 문장에 관한 글을 반반씩 읽었다. 문장 위주의 독서는 도리를 깨닫고 실행방법을 터득하는 데는 좋지 않으므로 의리의 독서를 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퇴계의 일용규범은 공자가 번지(樊遲)에게 가르친 '평이명백(平易明白), 일용처사(日用處事)'를 그대로 지킨 것이라 한다. 거처공(居處恭 :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공손하고 조심해야 한다)과 집사경(執事敬 : 사물을 처리하고 대할 때는 언제 어디서든지 조심하며), 그리고 여인충(與人忠 : 사람과 더불어 교제할 때는 충서(忠恕)하고 정성스러워야 한다)의 세 가지를 근본으로 해서 장횡거(張橫渠)의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읽은 내용으로 사색하며, 배운 바대로 말하며, 행동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늘 배운 것을 마음에 간직하며 한순간도 착한 행실의 실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존심위학(存心爲學)의 이론을 적용하였고, 정자(程子)의 가르침인 '의관은 단정하게, 몸가짐은 근엄하고, 조심해서 살피며, 깨끗하고, 위엄을 갖추며, 한결같이 생각을 깊게하여 자기를 속이지 않고 남에게 자만함이 없어야 한다'는 학자의 일상생활을 법칙으로 해서 생활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퇴계는 평소 관과 허리띠를 끄르지 않았고, 옷을 바르게 입었으며 종일 바른 자세로 앉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독서를 하였다.  

온종일 함께 있어도 한가하게 잡담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존심위학하는 모습이었다. 향을 피워 놓고 정좌하여 깊이 사색하고, 남과 더불어 종일 이야기를 해도 은근하고 공손하며 조심하여 남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지 않는 이 모든 것은 정자(程子)의 경(敬)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었다.  

 

 


 

지산와사의 생활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퇴계는 태실이 있는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서 태어났고, 그 뒤 혼인하여 분가했다. 이 때 온혜동 367번지의 1, 2, 3 세 필지 6마지기의 논을 분재받았는데, 이 논은 상계파(上溪派)의 문답으로 지금도 상속되고 있다. 31세 때에 온혜 남쪽 양곡(暘谷)에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지어서 권씨 부인과 함께 살았다. 말그대로 달팽이 껍집을 엎어놓은 듯 겨우 몸을 감출만한 작은 집이었다. 34세 봄부터 벼슬하여 서울에 가 있었고, 그 뒤 13년간을 관계(官界)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 곳에는 아들이 살았는데 손자 이안도(李安道 : 호 ; 蒙齋)는 여기서 태어났다. 그 뒤 아들 이준은 외내(烏川)에 가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이 집은 종손서(從孫壻 : 조카의 사위) 이국량(李國樑)에게 주었다.  

46세의 3월에 장인인 권질(權 29.jpg : 호 ; 四樂亭)의 장례를 지내려고 휴가를 얻어 귀향해서 일을 마친 후 병환으로 귀임하지 못하고 요양하고 있었다. 7월에 부인이 죽자 돌아와 장례를 치른 후 오늘날의 하계 마을의 동바위 곁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장차 할 사업을 설계하였다. 아들 준은 계모 권씨 부인의 묘가 있는 백지산(栢山 ; 잣갓)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고, 건너편 양진암에는 퇴계가 부인복을 입고 상기(祥期)를 넘겼다. 둘째아들 채는 의령(宜寧)의 외종조부(許瓊 : 곽재우의 외조부)집에 가서 농삿일을 보살피며 외손 봉사를 겸해 별거해 있었다. 퇴계란 호를 사용한 것은 이 때이고, 토계의 강이름을 고쳐서 호로 삼은 것이니, 그 때 퇴계는 이미 이 계상(溪上)의 청하(靑霞)산골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안동부사(安東府使)의 임명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부인 복이 모두 끝난 후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와 겸직을 띤 소환령을 받고 상경했다. 이후 49세까지는 서울, 단양, 풍기 등의 관가(官家)에서 거처하였고 집은 없었다. 아들 준은 새집을 마련할 때까지 처가에 가서 임시로 살았다.  

아들이 이 때의 어려운 형편을 퇴계에게 적어 보내자 '네가 있을만한 데가 없어서 처가에 있자니 그 어려움이 오죽 심하겠느냐! 매양 너의 편지를 보면 내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런 고생도 참고 견디는 자처지도(自處之道)를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스스로 분수를 알고 천명(天命)을 기다려야 한다. 함부로 망령스럽게 거동하여 남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라'하고 자처지도를 가르치고 천명을 기다리게 했으며, 또 '네가 처가에 가 있는 것은 원래 좋은 일이 못된다. 나의 형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그리 처리했더니 너의 고생이 막심하나 지금 어떤 방편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빈궁(貧窮)은 선비의 떳떳한 일이거늘 너무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라. 네 아비는 이래서 평생 남에게 비웃음만 받고 있다. 너에게까지 그 지경이 되게 하다니…… 그러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하늘을 믿고 인간이 할 도리를 잘 지켜 순리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옳으니라'하고. 다만 선비의 바른 길과 달관(達觀)의 세계를 체험하도록 인내와 수양하기를 가르치며,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는 생활을 터득하게 했던 것이다.  

40세 말기에 이러한 고초를 겪어낸 퇴계는 50대 초에 관계를 떠나 학문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펴 보리라는 집념을 실행에 옮겨간 것이었다.  

50세에 계상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서 정착하고,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였다.  

계상에 정착한 퇴계는  

 

분수대로 살고싶어 벼슬에서 물러나 (身退安愚分)  

학문하러 돌아오니 나이 이미 늙었구나 (學退憂暮境)  

시냇가에 집을 짓고 거처를 정하여 (溪上始定居)  

사람의 할 도리를 날로 더욱 힘쓰리라 (臨流日有省)  

 

하고 부풀어 오르는 감흥을 시로 읊고서 노경에 접어든 자기를 반성하며 존성(存省)의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 때 시내 서쪽에 지은 한서암은 세 칸이었다. 부엌과 방 둘을 만들어 부자 양대가 거처하기 위해서였다. 이 집에서 퇴계는 질그릇의 세숫대야, 짚으로 엮은 자리, 갈대의 문발과 자리, 베옷에 실로 꼰 허리띠, 미투리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퇴계를 찾아온 영천군수 허시(許時)가 그 광경을 보고, '찌는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퇴계는 '습관이 되어서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바람과 비를 겨우 피할 수 있는 한서암에서 퇴계가 짚자리와 갈대를 깔고 보통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생활을 자족하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소감을 많이 기록해 두었다. 신선처럼 편안히 사는 생활에 깊이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이현보 ; 이문량(李文樑 : 호 ; 碧梧)부자와 황준량(黃俊良 : 호 ; 錦溪) 같은 분은 이러한 퇴계가 좋아서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와 시를 읊고 세상을 논했다.  

 

 


 

이이와의 만남  

 

퇴계는 이듬해 시내 동북쪽 초당골에 단칸 서당을 지어서 계상서당(溪上書堂 : 약칭 ; 계당)이라 이름하고 그 곳에서 학문하며 찾아오는 제자의 교육을 맡았다. 7년 후인 58세 때, 23세의 이이(李珥 : 호 ; 栗谷)가 찾아와 배우고 입문한 곳도 바로 이 계당이었다. 율곡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덧붙여두기로 한다.  

이율곡이 방문하였을 때 마침 3일간 비가 내렸다. 율곡은 비에 갇혀 머물면서 갈길을 인도받고, 학문에 정진키로 했다. 퇴계는 율곡의 재주를 평가했고, 도학에 큰 기둥이 되라고 신신 당부하기도 했다. 물론 기대와 함께 경계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의 시 와 편지를 강릉에 간 후에도 율곡에게 보냈다.  

계상에서 율곡이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도학을 이어서 후세에 전하겠다고 다짐하며 선생에게 드린 시는 이러하다.  

 

시냇물은 수사(洙泗 : 山東省에 있는 洙水와 泗水이고 孔子  

學을 이름)에서 나뉜 가닥이고,  

봉우리는 무이(武夷 : 福建省 산, 朱子가 살았으므로 朱子學  

을 이름)를 이었습니다.  

학문을 닦으면서 살아가시니,  

이룩한 도덕이 이 한 방에 가득하십니다.  

뵙고싶던 회포를 푸니 구름 속의 달 보듯 머리 트이고,  

웃음섞인 말씀 듣고 나니 어리석은 저의 생각 바로잡힙니다.  

소자가 와 뵌 뜻은 도학을 받잡고자 함이었으니,  

시간을 헛 보내셨다고 생각하지 마옵소서.  

 

퇴계는 율곡에게  

 

늦게사 돌아와 할 일이 아득하더니,  

고요한 이 곳에도 햇빛이 비쳤음인가!  

찾아온 자네 만나 학문의 바른 길을 가르쳤네.  

학문 길 힘겹지만 탄식 않고 나아가면,  

외진 이 산골을 찾아온 일이 후회되지 않으리라.  

 

溪分洙泗派 峯接武夷山 活計經千卷 行藏屋數間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閑  

『秀ㆍ율곡문집, 接ㆍ도산문도록  

※數를 一로 쓴 데도 있다.  

 

歸來自歎久迷方 靜處 33.jpg 窺隙裏光  

勸子及時追正軌 莫嗟行人窮鄕  

『퇴계선생문집ㆍ속집, 권2』  

 

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을 경계하자 율곡은 '한계수 받들어 마시고 선생님의 도학이을각오 간에 새겨 맹세합니다' 하고 시를 지어서 언약했다.(想應捧飮寒溪水 冷澈心肝只自知)  

이리하여 계당은 두 어진 학자가 만났고 학문을 승계한 뜻깊은 서당이 되었다. 뒷날 계상에는 부자 분거(父子分居)의 예를 좇아 동가(東家)를 지어 손자가 거처하였다. 한서암은 외증손 김시정(金是楨)에게 상속되어 4대가 살다가 내앞(川前)으로 환고하고 동가는 자손이 빨리 죽어 다시 한서암 남쪽에 종택을 지어 이사했다. 그 종택자리에 세운 건물이 추월한수정이란 선생 고택이다.  

지금의 상계 종택은 '퇴계선생 구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나 한서암의 서쪽에 약 70여 년 전에 사림(士林)에서 종택으로 세운 집이다. 한서암이 아직 있을 무렵에 퇴계가 서당에서 돌아오면 누에를 쳐서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 다른 데로 피신하기도 했던 그 시절의 조그만 모양의 집은 지금도 옛날 동가 곁에 유정문(幽貞門)과 함께 본떠 지은 집이 전해온다.  

계당은 건물이 헐리고 지금은 없다. 본래 하동(霞洞)의 산기슭에 옮겨 지으려다가 도산에 좋은 자리가 있어서 새로 서당을 건축했으나 퇴계 말년까지 집이 서 있었다. 이 계상서당은 20년 서당교육을 시작한 학교로서 뜻이 깊지만 본격적인 서당교육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 후에 퇴계는 제자들의 정사(精舍)건립과 강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지어서 청년기부터 벼르던 사업을 이루었다. 서당의 규모는 완락재(玩樂齋)방 한 칸, 암서헌(巖栖軒)이란 마루에다 주자가 운곡(雲谷)에서 도인을 데리고 있었던 것을 본떠 스님을 데리고 있기 위해서 곁에 조그맣게 골방을 붙여 지었다. 본래 암서헌은 처마 끝에 마루를 내어 간재 조부 이현우(李賢佑 : 호 ; 廣軒)의 단칸집과 같은 모양으로 설계했었는데, 건축공사 중 퇴계가 고산재(孤山齋)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스님이 마루 한 칸을 더 달아 버린 것이다. 퇴계는 그 서당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고 늘 부끄러워 하였다.  

퇴계의 주거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끝까지 단칸방에서 살다 가기를 원하여 한평생을 그렇게 살았지만, 그 방에서 우주를 통철(洞徹)해 봤고, 나라를 다스릴 인물을 키웠으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공도(公道)와 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였으며, 천고에 남을 사교육을 이룩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를 거쳐갔고, 먼 곳에서 한번 와 퇴계와 담론해 보고 싶어하던 그 작은 방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러 모로 일러주는 바가 많다. 작은 집일지라도 교육이 있었고, 철학이 있었고, 법도가 있었고, 인물이 있었고, 도서가 있었고, 경성(敬誠)과 의리(義理)를 실현하며 분수를 지킨 어진 철학자가 살았다면 후세 사람은 응당 여기 와서 옛날을 되새기며 수련하고 공부해서 그 학문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