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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합천/가야면] 눈(雪), 절집을 품으니 포근도 하여라, 가야산 해인사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12. 25. 21:13

눈내린 가야산, 산사를 품다.

합천 해인사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 055-934-3000

 

 

눈 내리던 어느날,

해인사를 찾았습니다.

대가람의 사이를 찾았고,

넉넉한 가야산의 품을 찾았습니다.

여전히 절집 보다는,

풍경이 좋았던 기억을 떠 올려 봅니다.

 

 

 

 

이번에는 눈이 내린 해인사를 찾았습니다.

합천 지역이 원래 눈이 잘 내리지 않는 곳이지요. 그런데 해인사를 찾은 그 날, 그 시각에 싸락눈이 날리더니 진눈깨비로 변하고 급기야는 함박눈으로 펑펑 내리기 시작 합니다. 경내에 들어 섰을때는 바람까지 일며 눈보라를 날리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손은 시리고 안경은 습기에 절어 시야가 좋지 않았지요. 그러나, 언제 눈 내린 해인사를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몸뚱아리는 시리기 차가워 고생을 하였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 포근 했습니다.

눈 내린 산의 풍경, 그리고 산사를 품은 가야산의 풍경이 그토록 아름다웠습니다.

 

앞 글 "절집, 가을의 끝을 적시다" 편에서 해인사의 전반적인 글이었다면 이번에는 절집의 속내를 이야기를 아는대로 이바구를 풀어 봅니다. 뭐, 틀린 부분도 있을테니 지적 부탁드리고요.^^

 

해인사,

우선 절집은 무척이나 도도합니다. 콧대가 높다고나 할까요?

어찌 보면 대중의 심리로 찾은 절집은 무척이나 차가운 모습을 보입니다. 한국의 삼대사찰로 법보종찰입니다. 더하여 해인사는 신라시대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를 내걸며 화엄십찰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해인사에는 년 평균 200여명이 절집을 찾아 온다고 합니다. 일반 관광객이 아닌 스님이 되기 위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행자 수업을 거치고 나면 보통 1명, 내지는 2명 정도가 스님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아무나 '절집에 들어 가 머리깍고 중이나 되지'라는 말도 해인사 앞에서는 무색합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16개 암자와 158개의 말사를 거느린 해인사입니다.

그런데 암자나 말사라 하여 우습게 보일 수 없는 곳입니다. 해인사의 암자 중, 같은 가야산 자락 가장 높은 곳에는 '백련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철 큰스님이 머물던 곳이자 열반에 드신 곳이기도 합니다.

이 쯤 되면 가야산의 작은 암자라 해도 무시 못하는 절집인것입니다. 대규모의 가람 해인사가 그만큼 도도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3년(802년)에 '순응(順應)'스님과 '이정(利貞)'스님이 창건 하였습니다.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라 할 수 있는 분이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입니다. 그리고 순응 스님은 의상대사의 제자이지요. 그리고 이정 스님은 순응스님의 제자입니다.

창건 당시 두 스님은 가야산 자락에 작은 초막을 짓고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을때입니다. 왕실에서는 왕비가 병을 앎았는데, 어떠한 치료를 하여도 낫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 전국에 방을 내려 왕비의 병을 낳게 하는 이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느 한 노인이 기도를 하고 있던 두 스님을 찾았고, 사실을 말하자 방법을 알려주게 됩니다. 이른바 신병이 든것으로 직접 가 볼필요 없다라며 '왕비의 침상에 오색실을 매어 밖의 대나무에 묶어두면 된다.'라고 하지요. 이 후 대나무는 시들시들 해지면서 그만큼 왕비의 병색은 점점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왕과 왕비는 두 스님을 찾았고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전각을 세우니 최초의 해인사가 됩니다. 

 

물론, 어느 절집이나 픽션이 존재라기 마련입니다만, 실제 해인사의 청건에는 애장왕의 도움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기록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인사의 대적광전이 가장 오래 된 가람이며, 그 다음이 원당암으로 가야산 일대에 해인사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것이지요.   

이 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형 '현준대덕(賢俊大德)'이 창건을 이었고, '결연대덕(決言大德)'이 중건을 이어가면서 해인사의 사세를 날로 확장 되어 갑니다.  

    

 

 

 

 

해인사는 '화엄10찰(華嚴十刹)'중의 한곳입니다.

신라 의상대사가 중국을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을 말하는 것으로,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선생이 만년에 가족들과 함께 해인사에 머물며 신라 효공왕8년(904년)에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기록에 영주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 영천 '팔공산 미리사(八空山 美里寺)', 구례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서산 '웅주 보원사(雄州 普願寺)', 공주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대구 '비슬산 옥천사(琵瑟山 玉泉寺)', 부산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 원주 '속리산 비마라사(俗離山 毘摩羅寺)', 서울 은평구의 '삼각산 청담사(三角山 靑潭寺)', 그리고 합천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가 그곳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부석사와 화엄사, 옥천사와 범어사, 비마라사 그리고 해인사등의 6곳만 기록에 남아 있으며, 일부에서는 전주 '무산 국신사(毋山 國信寺=현 귀신사歸信寺)'가 화엄십찰의 하나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뭐, 복잡한 얘기는 지나치고 암튼, 해인사라는 절집 자체가 가진 의미로만도 해인사의 묵직함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태조원년(918년),

해인사의 주지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도록 도와 고려 왕조를 세우는 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이로서 왕건은 해인사를 국찰(國刹)로 삼으며 전답 500결을 하사하였고, 옛 건물들을 중수하도록 합니다. 이 후에도 '균여대사(均如大師, 923~973)'로 이어졌으며 다시 고려11대왕 문종의 4남이었던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로 이어지며 고려시대의 명찰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해인사는 여러차례 화재로 인하여 당우들이 소실 되었고, 또한 중수가 거듭됨으로서 지금의 전각들은 대부분 조선 말의 건축물으로 남아 있습니다.   

  

 

해인사 일주문(海印寺 一柱門)

해인사의 처음은 신라시대에 창건 되었으나, 일주문은 세조3년에 중건 된 것으로 조선초기의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근대 서화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의 작품입니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2년(1393년)에 정중탑을 세우게 됩니다.

또한 태조7년(1398년)에는 강화도로 옮겨 보관하던 대장경을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정종원년(1399년)에 해인사로 옮기도록 합니다. 이로서 해인사는 법보종찰의 면모를 다시 갖추게 됩니다.

 

그 중 세조의 해인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을 후회하며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면의 활동으로 해인사에 대한 애정은 더욱 각별해진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팔만대장경을 보관 할수 있는 대장경각의 중수였습니다. 세조3년(1458년),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하였고,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판고가 비좁다고 하자 경상감사에 직접 명을 내려 판전 40칸을 새로이 짓도록 합니다. 그러나 세조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였고, '정희왕후(貞喜王后, 1418~1483)'는 며느리들인 추존왕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조선 8대왕 예종의 계비'안순왕후(安順王后, ? 1498)'에게 시아버지의 유언을 알리게 되지요.

이로서 성종19년(1488년), '학조대사(學祖大師, 1431~1514)'에게 도목수 박중석(朴仲石)을 보내어 판전 30칸을 세우고 '보안당(普眼堂)'이라 합니다.

이 후 두 왕비는 160여칸의 전각과 요사를 지어 지금의 해인사 모습을 완성시킵니다.

 

이 후 7번에 걸친 큰 화재로 많은 전각들이 손실 되었으나 판전건물만은 그대로 남아 피해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판전은 한 때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면서 미처 퇴각하지 못한 천여명의 북한군이 해인사에 남아 있게 된것입니다. 이에 유엔에서는 해인사를 폭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金英煥, 1921~1954)'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등의 문화유산을 없앨 수 없다며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이로서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게 되지요. 2010년 들어서 해인사 폭격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 해인사를 지킨 공로를 인정 하여 1급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일주문에서 바라 본 풍경

 

 

 

이로서 해인사는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정신적 기반이 되는 도량이 됩니다.

화엄종의 근본인 '화엄경(華嚴經)'은 4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 불리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전해집니다. 그 속에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과 세계를 넓은 바다에 비유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번뇌가 있듯이 거친 파도를 만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는다면 파도는 잠잠해지면서 온갖 만물의 모습이 물속에 비추어지는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해인(海印)'이란, '물에 비추어지는 마음을 각인한다.'는 뜻으로 절집의 이름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야산 자락에 절집이 들어서게 되는데,

가람의 배치를 보면 가야산은 큰 바다의 의미를 가지며, 절집은 큰 배를 듯하고 있습니다. 즉 '반야용선(般若龍船)'의 형태입니다. 더하여 가야산은 해동10승지로 불리는 곳으로 삼재팔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팔만대장경이 보관 되기에 최척의 장소로 꼽히게 된것이지요.

 

 

우선 절집의 배치를 보면 일주문에서 부터 봉황문 해탈문가지 33계단이 의미를 두고 자리합니다.

그리고 그 일직선 상에 대적광전이 자리합니다. 그사이에 좌우로 전각들이 지어져 있지요. 해탈문을 지나고 나면 먼저 만나는 전각이 구광루(九光樓)입니다. 옛 시절 큰 법당에는 스님들만이 출입이 가능하였기에 스님이 설법하는 곳으로 사용 되던 곳입니다. 이 건물이 전체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를 배의 형상으로 본다면 돗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다에 들어 배를 돌아보는 곳,

가야산 해인사를 둘러 보는 마음입니다. 눈 내린 산사의 풍경도 지극히 아름답거니와 에둘러 알게 된 절집의 내력에서도 걸으며 만나는 전각들의 모습이 도 다른 새로움입니다.

이러저러한 복잡하고도 알기도 귀찮은 역사 속의 이야기는 그냥 스쳐 지나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길손 같은 까막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보이는 아름다움이 곧 진정한 아름다움이지요.

넉넉한 풍경, 눈 내리는 해인사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해인사 '고사목(古死木)'

신라 애장왕 40년(802년), 해인사 스님들의 기도로 왕의 병이 치유되자 왕이 두 스님을 위하여 해인사를 지으면서 심은 느티나무입니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오다가 1945년에 이르러 고사하였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있습니다.

 

 해인사 '봉황문(鳳凰門)'

보통은 천왕문(天王門), 사천왕문(四天王門)으로 불리는 건물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사천왕은 천상으로 들어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것을 멸하고자 산문의 입구에 자리하여 수문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인사 국사단(局司檀)

 

 

해인사 해탈문(解脫門)

정면6칸, 측면2칸의 우진각 지붕의 건물입니다. 해인사 제3문으로 1490년 경 인수, 인혜 대비가 중수하면서 불이문(佛利門)이라 하였으나 화재로 소실 되었고, 1900년 들어 재건 한것입니다.

 

해인사 보경당(보경당)

최그넹 지어진 건물로 불교회관으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집회 및 불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지하층도 크게 내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해인사 구광루(九光樓)

해인사의 경내의 중앙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화엄경의 내용 중에 부처가 아홉곳에서 설법을 하면서 그 때마다 광명을 놓았다고 하여 구광루라 이름 지어졋습니다. 예전에는 큰 스님들만이 법당의 출입이 허용 되었기에 일반대중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는 장소로 사용 되었습니다.

 

 

해인사 범종각(梵鐘閣)

불교에서 사용하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법기(法器)가 설치 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해인도(海印圖)'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요약한 210자 7언 30구의 계송을 '만(卍)'자를 도안한 것입니다. 도안의 중심으로 미로를 따르며 54번 꺽어 돌며 계송의 내용을 만나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해인사 궁현당(궁현당)

1940년에 중창 된 건물로 해인사 승가대학의 교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선불장(選佛場)이라고도 합니다.

 

 

 

해인사 정중석등(庭中石燈)과 정중3층석탑(庭中三層石塔)

 

'정중삼층석탑(庭中三層石塔)'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립니다.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으로 원래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6월 탑을 수리하면서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이 훼손 되었습니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습니다.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며, 노반, 보륜, 보주 등이 머리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1926년 탑의 수리 당시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으며 수리 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중석등(庭中石燈)'

석등은 불교의식을 할때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해인사 정중석등은 대적광전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높은 사각의 받침돌 위에 8잎의 연꽃무늬를 새겨 놓은 받침을 두었고 그 위에 중간기중이 자리하고 있으나 작고 왜소하여 불안해 보입니다. 후세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원형의 모습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 위로 8각의 화사석을 두었으며,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기고 나머지 4면은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깊고 처마가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화사석의 위에 자리하여 같은 8각입니다. 머리장식은 보주를 놓아 바닥돌이 4각인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입니다.

 

 

 

 

해인사 '독성각(獨聖閣)'

장경판각 올라가는 길에 자리한 정면1칸, 측면1칸의 작은 건물인데 반해 무거워 보이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조금은 버거워 보이는 건물입니다. 현재 독성상만을 봉안하여 독성각으로 불리며 과거에는 독성상과 함께 용왕상, 산신상을 함게 봉안하였기에 삼성각으로 불리던 건물입니다.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

해인사의 으뜸인 보물 '대장경'을 모신 건물입니다.

모두 네동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북, 동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과 동, 서로 작은 건물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데 절대적인 습도와 통풍을 자연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건축 되었습니다. 장격각의 위치도 좋지만 숯과 횟가루 찰흙을 넣어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판전의 창문도 통풍에 좋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창의 형태는 격자형으로 수다라전의 아랫창이 위창보다 세배나 크게 만들어 진 반면 법보전의 창은 그와 반대의 형태로 만들어져 과학적인 통풍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대적광전의 우측에 자리한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쌍둥이 목조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고 전합니다. 883년 조성된 불상으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불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은 근래에 신축한 것으로 건물에 화재가 발생할 때에는 지하 6m의 콘크리트 별실로 신속하게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최신식의 문화재를 보호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유한 건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해인사의 본당으로 창건주인 순응, 이정 스님이 502년에 지은 건물터에 1818년 다시 중건한 건물입니다. 정면5칸, 측면4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여 석가모니부처를 주불로 봉안하지만,

해인사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를 주불로 모시고 있습니다. 대적광전에는 모두 일곱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왼쪽부터 철조 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이 삼존불은 고려시대 가지가 셋이었던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로 만들어 진 것이며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 본존불이었습니다.

그 옆으로 1769년에 조성된 본존 비로자나불이 자리하며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적광전은 사방으로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정면에는 대적광전 현판이 달려 있으며, 서편으로는 '법보단(法寶壇)', 동편으로는 '금강계단(金剛戒壇)', 장경각 올라가는 길목인 북쪽으로는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 쓰인 현판이 각각 달려 있습니다.

 

해인사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은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합니다.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적광전 옆에 자리합니다.

목조 지장보살이 주불로 모시고 도명보살과 시왕이 모셔져 있는 명부전은 저승으로 떠난 이들의 넋을 구제하는 곳으로 사십구재를 비롯한 의례들이 행하여 지는 곳입니다.

 

 

응진전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합니다.

1488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의 건물은 181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입니다.

 

 

 

이제 부터는 해인사 경내를 벗어난 설경입니다.

눈 내리는 산사의 풍경은 '묵언(默言)'의 수행과도 같습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뽀드득 밟히는 눈소리가 고운 길을 따라 걸을 뿐입니다. 손은 시리고 곱아졌으나 두번 만나기 힘든 해인사의 눈 내리는 풍경 앞에서는 추위 정도는 감당하기 충분합니다. 단청의 빛은 사리지고 수묵의 세계에 들어 간 착각을 일으키는 절집의 설경, 보이는 풍경들은 모두 포근하여 온화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절집입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출처 : 길손의 旅行自由
글쓴이 : 길손旅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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