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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공 퇴계 이황 연보 본문

퇴계선생의 가르침

문순공 퇴계 이황 연보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20. 11. 1. 19:04

문순공 퇴계 이황 연보

1501(연산군 7년)-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1502(연산군 8년)-생후 일곱 달 만에 부친(贊成公)상을 당하다.
1506(중종 원년-6세)-글 읽기 시작하다.
1512(중종 7년)-숙부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論語>를 배우다.
1515(중종 10년)-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독서.
1516(중종 11년)-봉정사에서 독서.
1517, 8월(중종 12년)-경상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안동부를 순찰할 때 형과 함께 찾아가 강의를 듣다.
                             정신적 지주였던 숙부 별세.
1520(중종 15년-20세)-침식을 잊고 열심히 주역을 탐독.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1521(중종 16년)-부인 許氏(김해)를 맞아들이다.
1523,6월(중종 18년) -장자 준(寯)이 출생. 상경하여 태학(성균관)에서 수학.
1527(중종 22년)-경상도 향시 진사시(進士初試) 장원, 생원시(生員初試) 2등 합격,10월 차남 채(寀) 출생.11월 부인 허씨 별세.
1528(중종 23년)-진사시(進士會試-사마시) 2등으로 급제.
1530(중종 25년)-부인 權氏(안동)를 맞아들이다.
1532(중종 27년)-문과 초시 2등 합격.
1534(중종 29년-34세)3월-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子)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
1535(중종 30년)-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
1536(중종 31년)-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9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
1537(중종 32년)-모친(朴氏)상을 당하고 향리에서 3년간 복상.
1542(중종 37년-42세)-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어사가 되어 충청도 감찰 재상어사(災傷御史)로 강원도 감찰.
1543(중종 38년)-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여러 관직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544(중종 39년)10월- 상경 후 중종(中宗) 승하 후 고명을 지음.
1546(명종 원년-46세) 7월-부인 권씨 별세.
1547(명종 2년)7월-안동부사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除授)되어 마지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548(명종 3년-48세)-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 선생이 이때 선정한 것이다.
1549(명종 4년)-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었음.
1549(명종 4년) 9월-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
1550(명종 5년)2월-계상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
1550(명종 5년) 4월-광영당(光影塘-현재의 종택 자리) 조성.
1553(명종 8년-53세) 4월-성균관 대사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퇴.
1553(명종 8년-53세) 10월-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
1554(명종 9년)-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림.
1555(명종 10년-55세)-수많은 관직을 제수(除授) 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1556(명종 11년)-<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려 뽑아 <朱子書節要>를 편차.
1556(명종 11년) 12월-‘향약(鄕約)’을 초.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짓다.
1557(명종 12년-57세)-도산서당 터를 마련.
1557,7월(명종 12년-57세) -<계몽전의(啓蒙傳疑)> 저술.
1558(명종 13년-58세)-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도학을 논함.
1559(명종 14년)-<송계원명리학통록(理學通錄)>을 편찬함.
1560(명종15년-60세)-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하는 편지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四端七情論)을 논변함.
1561(명종 16년)3월-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경치를 돌아보고 도산기(陶山記) 등 명문을 남김.
                           도산서당, 농운정사 완공.
1564(명종 19년) 4월-제자들과 청량산을 돌아봄.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6(명종 21년)-<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음.
1566(명종 21년)10월-이언적(李彦迪) 선생 행장(行狀)을 지음.
1567(명종 22년)-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大行王)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8(선조 원년)-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除授)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제왕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자
                      왕은 정원(政院)에 병풍과 장첩을 만들 것을 명함.
1570(선조 3년-70세)-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하계몽>을 강의.
                            고봉 기대승과 심경정도(心經情圖)를 의논하고, 11월 그의 격물치지설(致知格物說)을 개정함.
                            12월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8일 한서암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책.
                            영의정으로 추증(追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領經筵弘文館藝文 館春秋館觀象監事 追贈.
1572(선조 5년)-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1573(선조 6년)11월-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
1574(선조 7년)-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
1575(선조 8년)-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1576(선조 9년)-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여강서원(廬江書院) 위패 봉안.
1576(선조 9년)12월-시호 문순공(文純公)

출처-陶山書院 www.andong.go.kr/dosanseowon/mai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