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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생가 진성 이(眞城李)씨 온혜파(溫惠派) 종택 노송정 본문

퇴계선생의 가르침

퇴계선생 생가 진성 이(眞城李)씨 온혜파(溫惠派) 종택 노송정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9. 2. 23. 00:02



퇴계선생 생가 진성 이(眞城李)씨 온혜파(溫惠派) 종택 노송정

 



퇴계태실의 원래 이름은 노송정. 
말 그대로 풀자면 향나무집이란 뜻이겠지만 이 집을 지은 퇴계 선생의 조부인 증이조판서 이계양의 호이기도 하다. 
이계양은 계유정난을 겪으며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봉화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며 생활하던 중, 한 승려를 
구해준 인연으로 현재 퇴계태실의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태어난 퇴계태실은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마당의 가운데, 그리고 정침 중앙에 전면 1칸, 
측면 1칸 정도의 온돌방과 0.5칸 규모의 작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식의 특별한 방은 우리나라에 이곳 밖에 없는데 매우 특이한 구조이며 공간이다. 
대문에 ‘성림문’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데, 퇴계 선생의 직계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글씨로, 이는 퇴계 선생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퇴계 선생을 가졌을 때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노송정은 서쪽에 2칸의 온돌방과 그 앞으로 돌출된 누마루가 있고 동쪽에 6칸 규모의 마루가 있다. 
20~30명이 강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루가 넓다. 노송정의 현판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노송정의 가구(架構 : 재료를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 구조는 팔작지붕을 만드는 원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 

노송정의 동편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 사당이 있으며 노송정과 사당 사이에는 예전에 4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향나무를 노송이라고 불러서 노송정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 그림자가 사당과 노송정 사이를 덮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지금은 그 나무가 있던 자리에 아들뻘 되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모양이 꼭 우산을 씌운 것 같이 특이한 형태이다.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46-5 (도산면) 
(우:36604)
연락처054-856-1052
홈페이지http://www.nosongjung.co.kr/

                   

노송정종택 전경

 

하나의 집을 하나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노송정종택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물론 어느 집이든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이야기 속의 의미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을 넘어 당대(當代)와 후대(後代)의 동아시아 전체에 사상적 스승으로 우뚝 솟은 인물이 

태어난 집이라면 단순히 하나의 공간으로만 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특히 그 집의 형태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이점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바로 그 독특한 공간에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인물이 태어났다면 그곳의 의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안동의 고풍스러운 고택 노송정이, 이황(李滉, 1501~1570, 호 : 퇴계(退溪))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름의 퇴계생가로 

불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부배치도 

노송정종택 배치도

퇴계생가 노송정, 그 신비로운 전설



퇴계생가의 다른 이름은 진성 이(眞城李)씨 온혜파(溫惠派) 종택 노송정이다. 

말 그대로 풀자면 정자 앞뜰에 세한후조(歲寒後凋)의 만년송 향나무가 있는 집이란 뜻이자, 이 집을 지은 이황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호이기도 하다. 

그는 국가시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출세의 꿈을 버리고 고향인 봉화(奉化)로 돌아와 선생 일을 하였다. 

어느 날 신라재(新羅)를 오르던 중, 산중에서 허기져 신음하는 한 승려를 발견하고 음식을 나눠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의식을 찾고 기력을 회복한 승려는 은혜를 갚기 위해 귀한 자손이 나올 수 있는 집터로 지금 노송정종택이 있는 자리를 

찾아주었다. 

아들 이우(李堣, 호 : 송재(宋齋))와 손자 이해(李瀣, 호: 온계(溫溪))가 연이어 국가의 큰 시험인 대과에 합격하였고, 

손자인 이황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고 하니, 노송정종택이 품고 있는 신비로움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집에 다시 사람의 온기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고 한다.

“ 집을 지키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 부부가 매주 오가며 손 볼 곳은 손을 보고 닦아야 할 곳은 닦으며 지내왔습니다만,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지요.”

이창건(李昌建) 씨 부부는 노송정종택으로 살림을 옮긴 직후부터 2년에 걸쳐 집 안 곳곳에 손이 안 닿은 부분이 

없을 만큼 정성으로 새 단장을 해나갔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집의 규모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남다르기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래서 저희 집을 찾는 분들은 무엇보다 전통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황 선생께서 태어난 곳이라는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이 노송정종택이 갖는 의미와 이황 선생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끼친 부모의 교육과 당시 가정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현장을 체험하겠다는 목적으로 

이곳에 머무신다면 감흥이 배가 될 테니까요.”


안동 퇴계태실 사당

안동 퇴계태실 사당

안동 퇴계태실 작은사랑

안동 퇴계태실 작은사랑

여러 줄기의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 

안동 퇴계태실 태실

노송정종택을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래도 이황 선생이 태어난 곳인 ‘퇴계태실(退溪胎室)’을 직접 보기 

위함일 것이다. 

이 유명하고 상서로운 공간은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중앙에서 안마당 쪽으로 길게 돌출된 형태로 온돌방과 작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식의 특별한 방은 우리나라에 이곳 밖에 없는 매우 특이한 구조다. 

‘태실(胎室)’이라는 이름처럼 아이를 낳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집안의 맏며느리가 시댁에서 첫날을 보낼 때 내어주는 

방으로 활용해 왔다고 한다. 즉 평상시에는 비워놓는 곳이라는 뜻.

이곳은 풍수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인데, 보통은 땅의 기운이 한 줄기만 흐르는 곳이어도 명당이라 하는데 

퇴계태실은 일곱 줄기의 기운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일반 관광객이나 투숙객뿐 아니라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한 번은 들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동 퇴계태실 태실


공자가 들어왔다는 성림문

안동 퇴계태실 성임문


아무리 큰 양반 가옥이라 하더라도 고유의 이름을 갖고있는 문은 흔치 않다.
이름을 갖고 있는 문은 대개 나라에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에 국한되기 마련. 

하지만 노송정종택에는 독특하게도 대문에 ‘성림문’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이황 선생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성인인 공자(孔子)께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이 대문을 통해 정침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황 선생의 수제자인 김성일(金誠一, 호 : 학봉(鶴峰))은 퇴계선생언행록에서 성림문이라 명명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동 퇴계태실 성임문


한석봉의 글씨로 빛나는 노송정

안동 퇴계태실 노송정

성림문을 들어서면 제법 규모가 있는 별채인 노송정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서쪽에는 돌출된 누마루를 가진 

온돌방이 있고, 동쪽에는 20~30명이 모여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루가 있다. 

노송정의 현판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썼다고 한다. 

노송정의 가구(架構 : 재료를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 구조는 팔작지붕을 만드는 원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

노송정의 동편에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노송정과 사당 사이에는 예전에 4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향나무를 노송(老松)이라고 불러서 노송정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 그림자가 사당과 노송정 사이를 덮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지금은 그 나무가 있던 자리에 아들뻘 되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모양이 꼭 우산을 씌운 것 같이 특이한 형태이다. 안동 퇴계태실 노송정


종가의 살림을 보여주는 장독대



노송정종택의 부엌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장독대. 

물론 어느 한옥이든 장독대를 갖고 있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노송정종택의 장독대는 

그 모습뿐 아니라 바닥까지 전통적인 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전통적인 방법이란 다음과 같다.
먼저 진흙을 다진 후 그 위에 배수(排水)를 위해 굵은 모래와 자갈을 깔고 굵은 모래 위에는 소금을 뿌린 후 

단단히 다진다. 

이후 숯가루를 뿌리고 다시 굵은 모래와 소금을 번갈아 깔고 다지는 작업을 진행한 후에야 자갈을 덮어 마무리한다. 

이렇게 장독대 바닥을 조성하는 데에 큰 공을 들이는 것은 어떠한 날씨, 어떠한 계절이라도 습기가 차지 않고 

잡균이 번식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안동 퇴계태실 장독대

안동 퇴계태실 장독대

안동 퇴계태실 장독대

안동 퇴계태실 장독대

 

2017년 여름 방문객이 없는 한적한 시간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한여름 녹음에 싸인 퇴계생가를 바라본다. 

솟을 대문 앞의 너른 마당은 종가집의 자부심과 넉넉함을 보여준다

우측으로 몇 발자국 옮겼는데도 사진의 맛이 다르다. 중앙 솟을 대문 양옆으로 행랑채가 집안의 기운을 공고히 잡아주는 듯한 분위기이다.

노송정_퇴계선생의 조부 이계양이 지었다는 사랑채.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축대가 예술작품이다. 일부러 예쁘게 꾸미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는 맵시를 보여주는 것은 가문의 자부심 때문인가.
안채 마당 한 가운데에 불쑥 나와 있는 매우 독특한 구조이면서 상상이 되지 않는 퇴계태실이다. 풍수적으로도 설명을 하기 힘든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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