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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을의 역사 -낙산리 본문
낙산1, 2, 3리 (落山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뒤편 북쪽에는 태조봉과 숭신산성이 있고 냉산의 지맥이 둘러 싸여 광활한 지역으로
3개 행정리와 자연부락이 산재하여 있으며 많은 고분군과 유적이 산재하여 있고, 옛
명칭은 여진,(余津, 麗津)이라 한다.
낙산리는 원래 수리시설이 없어 자연부락 단위로 소류지 (작은 못)를 설치하여 농업
용수로 이용하여 영농을 해 왔다. 또한 재방 축조가 되지 않아 낙동강 범람으로 연연
히 수해를 감수해야 했으나 이제는 호안공사가 완공되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마을 단위의 동회관이 건립되어 있고 1, 2, 3동이 낙산 연합 노인회를 결성하여
현 3동 회관에 모여서 이 지역의 현안 사항과 발전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일선 초등학교가 2동에 있었으나 농촌 인구가마소로 현재는 해평초등하가교 분교로
남아있다.
2. 마을의 역사
* 사기점(磁器店) (落山 1里)
숭신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천주교도 박해 때 신도들이 이곳에 피신하여 사기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 후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 대문동(大門洞) (落山 1里)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인 경암(敬庵) 노경임(盧敬任)이
큰 부자로 이곳에 대궐같은 큰 집을 지었는데, 입구에 대문이 큰 성문과 같다하여
이름하였다.
* 하도(河圖) (落山 2里)
고종(高宗)1년(1864)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산세를 보니 꼭 용마하도(龍馬河圖)의 그림과 같은 형상이라
뒷산을 하도봉(河圖峰)이라고 했다 한다.
* 중리(中里) (落山2里)
중간 마을에 있다 하여 중리라 하였고, 옹기를 만드는 굴이 있었으나 현대 문물에
눌리어 지금은 없다.
* 원촌(院村) (落山3里)
옛날 미라원(彌羅院)이 있어 오고가는 길손을 위하는 마을이라 하여 원촌이라
한다. 원(院)이란 중요한 교통로에 설치한 국립여관으로 세조(世祖)때는 전국에
1,220개소에 달했고 원주전(院主田)이라는 토지를 주어 운영하였다.
* 칠창(七倉) (落山3里)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냉산 태조봉에 숭신산성을 쌓고 후백제(後百濟) 견훤
(甄萱)과 싸울 때 이곳에 일곱 개의 창고를 짓고 군량미와 병기를 비축하였다.
* 여진(余津,- 麗津)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936년 숭신산성과 태조방천에서 견훤(甄萱)과 싸워 승리
한 다음 낙동강 나루를 건널 때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나의 나루(余津)
혹은 여진(麗津) 고려의 나루라는 뜻이다. 지금의 낙산3리 양수장 부근이다.
3. 성씨별 가구 분포
총 200가구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4호, 김해김씨(金海金氏) 22호, 함안조씨(咸安趙氏)
19호, 선산김씨(善山金氏) 19호, 안동권씨(安東權氏) 12호, 동래정씨(東萊鄭氏) 10호
진성이씨(眞城李氏) 10호, 선산(一善)김씨 6호, 밀양박씨(密陽朴氏) 6호, 행주은씨
(幸州殷氏) 6호, 순흥안씨(順興安氏) 6호, 기타66호
4. 전설
금수굴(金水窟)은 냉산 중턱 숭신산성 밑에 있는데 신라불교를 초전한 아도화상이
금수굴로 들어간 후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5. 마을의 특징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일선주(一善州)관아가 있는 곳으로 300여기의 고분군이 밀집
되어 있어 발굴 복원하여 청수년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월파정(月波亭)이 있었는데 매우 경치가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없다.
6. 유적,유물
재경부락의 사지(寺址)와 유물
소재지 : 해평면 낙산리 재경부락
해평면 낙산2리에 자연부락으로 “재경” “부처밭골”이라는 마을에 각각 사지(寺址)
와 유물이 산재하여 있다.
재경부락 일대는 옛 절터로 산과 민가에는 석축을 한 곳이 남아 있고 곳곳에서
옛 기와가 발견된다.
이 마을 이장원(李章遠)씨가 귀면와편(鬼面瓦片)을 밭에서 주워 보관하고 있으며.
심동석(沈東石)씨 집 앞 뜰에는 팔각의 간주일석(竿柱一石)이 절단되어 있고
장대석(長大石)이 산재한다.
그 옆의 논두렁에는 주춧돌이 매몰되어 있는데, 둥근형의 웃 면에 새긴 것은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전형적인 주춧돌이다.
또한 계곡에 방치되어 있는 연화대(連華臺)는 팔엽(八葉)의 연꽃이 조각되어있고
중안에는 간주(竿柱)를 받치고 있으며 양식과 수법이 화려하고 수려하다.
1974년 해평중종합고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한편, 『부처밭골』이라 칭하는 이유는 수십구의 금동불상(金銅佛像)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이 되는 『밭』은 장대한 석축지(石築址)로 많은 토기와
자기(磁器) 및 옛 기와가 산재하고 있다.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다른 곳에서 고철탐지기(古鐵探知機)를 갖고 온 사람
들이 그 일대를 탐색하며 많은 유물을 발굴해 갔다고 한다.
이 골짝은 냉산 서북쪽으로 작은 구릉이 형성되어 저수지가 있고, 이 부근의 사지
(寺址)로 추정된다. 거대한 자연석 위에 평평히 다듬고 그 중심에 둥근형의 구멍을
뚫었으니, 목탑(木塔) 기단부(基壇部) 심초석(心礎石)이라 할 수 있다.
이곳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동리에 절(寺)이 있고 탑(塔)이 서 있었다』고
전하여 온다고 하나 현재는 그 절 이름이나 사찰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만 『부처밭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심초석(心礎石)옆에 네모형 돌이 있는데 이곳 저수지 제방을 축조할 때
이와 같은 석재를 많이 사용했으며 현재 저수지 속에도 여러개의 장대석이 들어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과 유물을 고찰하여 볼 때 이곳에는 사찰이 있었음이 확실
하고, 그것은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목조탑(木造塔)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주민의 말에 의하면, 현재 해평초등학교 교정 앞에 세워진 석상은 이곳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석상이 이 골짜기 어구에 서 있덕 것을 보았다고 한다.
* 낙산고분군(落山古墳群)
해평면 낙산리를 중시미으로 한 고분군은 가야(伽倻) 소제국 당시(AD3~4) 신라
(新羅) 진흥왕(眞興王) 당시(AD6~7)일선주 소재지로서 감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동서 양안에 넓은 해평들과 선산들이 있고 그 동쪽에 대규모의 가야, 신라고분군
으로 69,347평의 광대한 구릉지역에 205기(鄭幕山64, 月波亭81, 不老山60)가
밀집 형성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1915년 일본인 학자 흑판승미(黑板勝美)박사가 먼저 경주(慶州)를
순례하고 선산에 들러 금오산(金烏山) 고적과 도리사(桃李寺)를 둘러 본 다음
일선고읍인 이곳에 이르러 1차 조사가 있었고 이어서 1917년 역시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에 의하여 2차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오랜시간이 흘러간
뒤인 1974~1975 양년에 걸쳐 일본(日本) 남산대학교(南山大學校) 이등추남(李藤
秋男)에 의하여 3차 조사를 하였다.
이 3차에 걸친 조사는 모두 개괄적인 조사로서 학술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였
으며 학계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도굴을 당하여 황폐 일로에
들게 되어 고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1987년 일선리 택지조성지역의 발굴조사로 가야(伽倻) 초기 (AD 3중~4말)고분에
해당하는 20기의 고분이 발굴되었으나, 이들 고분은 다종다양하여 구조양식의
유형은 토광묘, 석관묘, 옹관묘로 구성되어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분구묘시대
구분구조 형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그 시대의
문화양상을 알 수 있고, 고분의 그 규모가 크고 부장(副葬) 유물이 화려 찬란하여
고분문화의 전성기임을 알려주고 있다.
선산지방 곧 일선(一善)은 5세기 후반경부터 사대국(沙代國, 지금의 尙州市沙代),
소문국(召文國, 義城郡 金城), 감문(甘文, 金泉市 開寧)등과 더불어 신라에 병합되어
가고 6세기 전반경에 이르러 신라(新羅)는 이 지역에 주를 설치하고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불교가 고구려로부터 이 지방 (桃開面 桃開里 不敎立地)에 잠입하여 민간 신앙
이 시작되어 문화적 변화가 있었고 따라서 고분문화(古墳文化)도 전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견혈식(堅穴式) 석곽분이 지속되면서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
으로 전환되어 가고 불교적인 영향도 받았다.
정식 발굴조사도 없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많은 고분이 도굴(盜掘),도취(盜取)
되고 황폐되어 오던 중 지난 1988. 11.1 ~ 12.20까지 효성여자대학교 박물관
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1989.9.2 ~ 12.2까지 고분 6기를 발굴한 결과
대부분 유물은 도굴되었으나 유리구슬, 금제귀고리, 토기류 등 150여점이 출토되어
효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90. 10.26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어 90년 11월부터
연차적으로 205기의 고분을 원형 복원하고 부대시설등을 설치하여 국민 교육은
물론 관내 관광자원의 보전과 관광객 유치를 도모함은 물론 주변 관광권인 낙산3층
석탑(보물 제469) 도리사와 화엄석탑(보물 제470호), 문화재 이주단지인 일선리,
낙동강 백사장, 해평 청소년수련소, 의구총, 의우총을 잇는 관광권역 조성으로
개발이 되고 있다. 1990년 10월 26일 사적 336호로 지정됨.
故鄕(海平)의 歷史와 文化(구미문화원 해평분원 2005년 발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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