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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구미시)

[스크랩] 구미-선산지역 답사 자료집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8. 11. 21. 20:48
이 자료집은 현재 구미현일 고등학교에 역사교사(선생님)로 계시는 전정중 선생님께서 제공해 주신 자료집입니다. 다시 한번 전 선생님게 감사 드립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답사 여행
◈구미·선산 지역◈

2000년 3월



나를 찾아 떠나는
답사 여행

◈구미·선산 지역◈


읽 어 두 기


1. 본 자료집은 구미·선산지역의 유적·유물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1) 답사활동을 위해서는 지역별로 제시되어야 하나, 유적·유물의 성격을 기준으로 불교관련·유교관련·금오산·기타로 구분하였습니다.
2) 각 유적·유물별로 '찾아가는 길'을 명시하였습니다.
3) 고유명사가 많은 관계로 한문을 원칙으로 하고 한글도 괄호처리하였습니다.
4) 〔 〕표시는 보충설명입니다.
2. 자료집 말미에 [문화재 용어해설집 및 [문화재 명칭도]를 첨부하여 답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여러 참고문헌을 인용하였으나 지면이 허락치 않아 말미에 일괄적으로 밝혀둡니다. 여러 선학들께 사죄말씀드립니다.



구미·선산지역의 地勢(지세)는 대체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동·서·북쪽에는 산지가 발달하였고 이들에 의해 중앙부에는 분지가 형성되었다. 북서부에는 연악산맥의 지맥인 修善山(수선산)·伏牛山(복우산)·元通山(원통산)·玉女峰(옥녀봉)·飛鳳山(비봉산) 등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팔공연산의 지맥인 靑華山(청화산)·冷山(냉산)·베틀산 등이 솟아 있다. 지역 중앙부에는 감천·해평천 등의 지류를 합치면서 낙동강이 남류하고, 기름진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선사분지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해평면 낙산리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는 점과 軍彌國(군미국)의 존재로 미루어 늦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주거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듯 하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어 '일선군'이 되었다. 483년(소지왕 5) 큰 물난리로 인해 왕이 행차하여 백성을 위문하고 곡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614년(진평왕 36)에는 사벌(지금의 상주) 감문(지금의 개령면)에 있던 상주가 이곳으로 이동해오면서 '一善州(일선주)'로 개편되었다. 이 주는 군사적 색채가 강한 일종의 軍官區(군관구) 조직인 듯 하며, 삼국항쟁기에는 이곳의 백성과 군사들이 많이 동원되어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687년(신문왕 7) 상주가 사벌주로 옮겨갔고,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 '崇善郡(숭선군)'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907년 견훤이 일선군과 그 남쪽 10여성을 점령한 이래 935년 고려의 영역으로 다시 편입되기까지 이곳은 후백제와 고려의 대표적인 각축장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도 고아읍에는 숭신산성, 태조방천, 여진나루, 어갱이, 발갱이, 점갱이 같은 이름을 지닌 당시의 싸움터가 전한다.
이른바 '桐藪(동수)전쟁'이라 불리는 팔공산 오동나무숲 전쟁에서 견훤에게 크게 졌던 왕건은 그로부터 8년 뒤 935년에 일선군 냉산에 '崇信山城(숭신산성)'을 쌓고, 그 아래 낙산동 일대에 軍倉(군창)을 일곱 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지금도 낙산동 일대를 '七倉里(칠창리)'라 하는데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에 왕건은 선산읍 생곡리 앞〔지금의 일선교 근처, 속칭 禦城亭(어성정)〕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벌려 크게 이겼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 곳의 나루를 지나며 전승을 기려 '나의 나루'라는 뜻으로 '余津(여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듬해인 936년에는 견훤의 아들 신검이 고아읍 관심리 앞뜰에서 왕건과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이때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官心관심평야를 '禦劒(어검)평야', 곧 지금의 '어갱이들'이라 하고, 그가 진을 쳤던 곳은 '장대〔세도방〕'라고 부른다. 한편 괴평동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占劒(점검)평야', 곧 '점갱이들'이라 한다. 이후 신검은 다시 지산동 앞뜰과 사기점(신평2동) 뒷뜰에 진을 쳤으며, 이곳에서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시켰으니 이곳을 '拔劒(발검)평야' 곧 '발갱이들'이라 부른다.
이후 995년 (성종 14) '선주'로 개편되었고, 1018년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그리고 몽고침입기인 1235년 야별초 도령 이유정이 160여명의 병졸을 이끌고 몽고군과 싸우다가 전패하였고 1380년(우왕 6)과 1383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크게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때 이곳의 백성들이 '금오산성'과 '읍성'을 축조하고 스스로 군사가 되어 왜구 소탕에 나섰다.
그 후 1413년(태종 13) '선산군'으로 개칭되었고, 2년 뒤 주민이 1000호 이상이 되어 '都護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戶口(호구)는 {세종실록}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1005호 5067인이었다고 한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에 '선산군'이 되었다. 이 시기 신교육의 보급이 이루어져 창선·선진 등의 학교가 건립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4월 3일 해평면에서, 4월 12일에는 선산면에서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

이렇듯 구미·선산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중심이 되어 왔다. 그러던 이 지역의 역사는 현대사와 더불어 성장해 버린 구미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졸부처럼 성장한 도시쯤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사실 구미는 일제 강점기 경부선 철도의 가설로 인해 선산의 관문 정도로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 '龜尾(구미)'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高麗史(고려사)} 兵志(병지) 驛站(역참)에 의하면, 성종 14년(995) 善州刺史(선주자사)를 파견할 때 관청과 역참을 지금의 구미시 선기동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종실록지리지} 역참조와 {一善志(일선지)} 등에도 '仇彌里(구미리)'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다. 또한 영조 연간에 편찬된 {輿地圖書(여지도서)}에 의하면 南面(남면)이 '上龜尾坊(상구미방)'과 '下龜彌坊(하구미방)'으로 분할 개칭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一善〔선산〕'의 洞里(동리)이던 구미가 현대사의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面(면)에서 邑(읍)으로 승격하고, 1969년 구미 공단이 조성되면서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 기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8년 다시 읍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선산군에서 분리되었고, 마침내 1995년에는 자신을 키워준 선산군을 아우르면서 양자의 지위는 역전되기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만 구미의 성장과 발전을 평가하고, 그 역사와 문화에는 소홀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이 바로 신라 불교의 씨앗이 뿌려진 텃밭이며〔道開面〕, 조선 사림문화의 여명을 알린 본향임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신라 법흥왕 14년(527). 불교는 신라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이보다 100여년쯤 전에 신라땅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뜻을 품고 고구려로부터 들어온 阿道(아도) 또는 墨湖子(묵호자)로 알려진 이가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卷第4 法興王條(법흥왕조), {三國遺事(삼국유사)} 卷第3 興法 第3 阿度基羅條(아도기라조) 등의 기록을 보면 "아도화상은 일선군 모례집에 왔으며, 이로부터 신라의 불교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卷29 善山都護府(선산도호부) 佛遊條(불유조), {一善志(일선지)} 卷1 善山志 地理圖十絶(지리도십절) 등의 기록에도 "아도화상이 도개부곡의 모례집에 왔는데 이후 신라의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아도가 뿌린 신라불교의 씨앗은 선산에 뿌리 내려 지금도 적지 않은 유산으로 남아 있다. 선산읍 죽장동의 당당하고 중후한 오층석탑은 천년 비바람을 이기고 엄연하게 서 있으며, 여기서 낙동강을 건너 남으로 향하면 길 좌우 구릉에 가야·신라 시대의 고분군- 낙산동 고분군-이 있고, 그 곁에는 홀로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낙산동 삼층석탑이 있다. 낙산동에서 나와 냉산의 품속에 들면, '新羅佛敎初傳法輪址(신라불교초전법륜지)', 桃李寺(도리사)에 닿는다. 고개 하나 너머에 있는 모례장자샘에서는 지금도 솟는 전설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장삿배가 모여들어 집집마다 앉아서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던 낙동강의 나루터 보천탄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상이 금오산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선산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과 오랜 역사를 대표하는 봉한동 출토 삼존불상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야 친견할 수 있지만 이들의 고향은 엄연히 선산이다. 구미시는 [내고장 뿌리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신라불교초전지역의 불교 유적·유물에 대한 학술 조사를 1997년부터 시작하였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一善〕고 했다. 정몽주로부터 학통을 물려받아 조선 사림시대를 연 길재, 길재로부터 학통을 이어받은 강호 김숙자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새남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단계 하위지, 청송 고을의 원으로 있을 때 좌의정 성희안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부탁하자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고을 원인 내가 어떻게 구하리오"라고 답장을 썼다는 정붕, 김구·양사언과 함께 초서로는 조선 제 일인자라는 평을 듣던 황기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아 동대문 밖에서 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된 의병장 허위 등 이들이 모두 선산사람이니 그 말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닐 듯하다.
그 가운데 길재와 김숙자, 김종직은 포은 정몽주에서 비롯된 사림의 학통과 정신을 기반으로 영남 사림문화의 기틀을 닦았으니 선산이 영남사림의 본향이라 해서 지나칠 것이 없다. 선산읍 원동, 감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언저리 낮은 산에 기대어 선 금오서원에서 우리는 길재·김종직·정붕의 정신과 만날 수 있으며, 해평들 한편에 잔영처럼 선 쌍암고가와 북애종택에서는 향촌에 굳게 뿌리내린 사림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쌍암고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병참부가 위치하여 농민군의 일차 공격 목표이기도 해서 우리 근대사의 애환이 서린 한 현장이기도 하다.

金烏山(금오산)은 구미의 상징이다. 본래 이 산은 골짜기마다 많은 절과 암자를 가진 불교 유적지로서, 산성을 쌓고 외적을 막던 요새로서 알려진 산이었다. 지금은 상당수의 불교 유적이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 없으나, 산 중턱의 해운사 정도가 남아 있다. 국방유적으로는 금오산성이 일부 복원되어 옛 모습을 전한다. 좀 더 다리품을 판다면 정상 바로 아래의 약사암과 마애여래입상을 볼 수 있으며, 산을 동편으로 돌아가면 당초무늬가 아름다운 대각국사비를 만날 수 있다. 또한 길재가 은거했던 채미정, 도선국사가 수도하던 도선굴, 물맞이가 유명한 대혜폭포, 동·서 삼층석탑으로 유명한 갈항사터도 답사길에 곁들여 발길을 재촉할 만 하다.






Ⅰ. 불교관련 유적·유물


☞ 찾아가는 길 선산읍내에서 일선교를 지나 상주방면 25번 지방도로로 진행중에 도개1리 이정표와 함께 '모례정' 안내판이 있다. 도개마을내 폐교된 송도초등학교를 지나 모례원을 찾아 뒤쪽 담장 밖으로 돌아가면 위치한다.

이 우물의 외형은 일반적인 원형 우물과는 달리 입구가 우물을 뜻하는 한자말인 '井'자로서 그 어원을 짐작하게 한다. 거칠게 다듬은 긴 네모꼴의 돌을 짜맞추어 만든 우물로서, 마을에서는 모례장자샘, 모례가정, 모례정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도 동네에서 가장 좋은 물이 샘솟는다.
아도화상은 일곱 살 때 이곳 모례장자의 집에 와 머슴을 살면서 양 천 마리와 소 천 마리를 길러 모례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이렇게 5년간 일해주고 열두 살에 아도는 떠났는데, 모례가 아쉽고 섭섭하여 가는 곳을 물어보니, "얼마 뒤 당신 집으로 칡순이 뻗어올 테니 그 칡넝쿨을 따라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과연 그 뒤 한겨울 어느 날 칡순이 모례의 집 문턱을 넘어오기에 그것를 따라 냉산 자락에 이르니, 아도가 두 말들이 자그만 망태기를 만들어 모례에게 내놓으며, "절을 지을 것이니 시주 좀 해주시오"하였다. 모례가 시주한 천 섬으로 아도는 복숭아꽃·오얏꽃이 만발한 냉산 기슭에 절을 이룩하니 이것이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리사가 번창하던 어느날 시주를 청하는 도리사 승려에게 모례의 집에서 "더욱 더 부자가 되는 길은 없느냐"고 물으니, "집터가 배 모양이니 돛을 세우면 좋겠지요." 이 말을 쫓아 곧 비석 셋을 세웠으나, 오히려 이때부터 차츰 가세가 기울더니 오래지 않아 모례의 집은 망해버렸다. 지금 동네 어귀에 있는 높이 2m 立石(입석)이 그 세 개의 비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밖에도 모례장자의 집터가 마을에 남아 있고, 아도가 소 천마리와 양 천 마리를 먹였다는 '소천골', '양천골'도 냉산 북쪽에 골짜기를 이루어 현재 소규모의 목장이 시설되어 있다.

◈ 아도화상이 숨어 지낸 자연 동굴 발견
해평면 낙산 1리 뒷산인 냉산의 9부 능선에 위치한 일명 '금수굴'은 높이 2m, 너비 7m, 깊이 2m 정도의 크기로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이다. 김일흠씨(56세.낙산1리 이장)에 의하면,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이 동굴이 모례의 집에서 나온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세우기 전에 숨어 지내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모례의 집과 도리사 중간 지점에 있는 자연 동굴은 이것 밖에 없어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상의 이야기가 구미 일대의 전설 채록과정에서 알려진 것이지만,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도리사 가람 배치도

☞ 찾아가는 길 해평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낙산방면으로 가면 송곡교 직전 쌍용송덕주유소에서 우회전하면, "해동최초가람태조산도리사"라는 현판의 도리사 산문이 보인다. 여기에서 약 4.1km가면 제1주차장이 나오고, 산길로 1.2km 더가면 제2주차장이 있다. 대형버스도 이곳까지 갈 수 있다.

- 복숭아 꽃이 피고(桃開) 신라 불교의 길이 열린(道開) 곳 -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과 {一善志(일선지)} 등에 의하면, 겨울 달밤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이 산허리에 만개한 것을 보고 눌지왕 2년(418)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고 사명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도리사 경내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성각 등의 법당과 요사가 있다. 각 건물 내에는 관계 현판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불상·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물로는 석탑과 세존사리탑, 아도화상사적비 및 자운비, 도리사불량답시주질비, 아도화상신선대가 보존되어 있다.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桃李寺前桃李開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墨胡已去道師來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誰知赫赫新羅業
모례의 움집 속에 재뿐인 것을! 終始毛郞 裏灰

영남 사림의 조종이며, 선산부사를 지냈던 조선시대 김종직은 선산의 열 가지 빼어난 것 가운데 하나로 도리사를 꼽으며 이렇게 노래했다. 시는 짧지만 이 속엔 도리사 창건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며 번창했을 이 절의 역사는 조선시대 숙종 3년(1677) 큰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 뒤 영조 5년(1729) 아미타불상의 금칠을 새로 하여 산내암자였던 금당암으로 위치를 옮기면서 암자 이름을 도리사로 바꾸니 옛 도리사는 터만 남게 되었다. 현재 냉산 도리사(금당암)에 올라가기 전 계류변에 장대한 石築址(석축지)가 있어서 마을에서는 이 곳을 '옛 도리사터'라 전하는데, 이곳이 신라시대 도리사의 원 위치로 추정된다.
도리사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어모으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1977년 절 담 밖에 있던 조선시대 石鐘型 舍利塔(석종형 사리탑)에서 뜻밖에도 8세기경에 만들어진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편 절을 나오면서 서쪽 산줄기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아무런 자취도 없는 좁은 터가 있다. 이곳은 아도스님이 손가락을 곧게 가리켜 김천의 직지사터를 잡았다는 '西臺(서대)'이다. 여기에 서면 직지사가 있는 황악산이 멀리 건너다보이고 그 사이는 툭 터져 시원스럽다.


극락전 마당을 두른 담장 한쪽에 난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비탈진 송림 속에 평평한 대지가 보인다. 이곳에는 아도화상 사적비 및 자운비,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그 남쪽으로 아도화상 신선대가 보존되어 있다.
위를 평평하게 하고 단을 이루어 만든 臺石(대석)은 아도화상이 좌선을 했다는 곳으로 신선대 혹은 좌선대로 불린다. 이 곳에 앉아 정남쪽을 바라보면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그 너머로 멀리 금오산이 보이며 눈앞에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어 그 전망은 글자 그대로 선경이 아닐 수 없다. 이 대석의 조성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 石碑(석비)가 세워지기 전, 즉 1639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자연 암석을 地臺石(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세웠으며  首(이수)는 전면에 雙龍(쌍룡)을, 후면에는 四龍(4룡)을 조각하고 그 사이 공간에도 雲龍(운룡)을 조각하였다. 남면 상부에 횡으로 '阿度和尙事蹟碑(아도화상사적비)'라는 글자가 있으며, 비문은 楷書體(해서체)로서 첫줄에 [朝鮮國慶尙道善山府冷山桃李寺阿度和尙事蹟碑(조선국경상도선산부냉산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라 前題(전제)하고 陰刻(음각)하였다.
한편 [慈雲碑(자운비)]는 아도화상 사적비 후면에 음각되어 있다.
이 비석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의하여 전면의 아도화상사적비는 제 16대 인조 17년(1639)이고, 자운비는 제 17대 효종 6년(1655)에 세워졌다.


자연암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윗면에 사각의 구멍을 파서 비신을 꽂아 세웠다. 비 머리에는 1매석의 蓋石(개석)이 덮혀 있으며, 앞·뒷면에는 굵은 선으로 양각한 연꽃 봉오리와 줄기가 조각되었다. 한편 정상에는 중앙에 寶珠(보주)가 나타나 있다.
이 비는 도리사에 佛糧畓(불량답 ;절의 논)을 시주한 내용 즉, 시주자와 논의 면적을 밝혀 놓았다. 명문으로 보아 조선 19대 숙종 38년(1712)에 石手(석수) 金成元(김성원)이 석비를 조성, 刻字(각자)하고 僧統(승통) 能哲(능철)에 의하여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적멸보궁 동쪽 산중턱에 옮겨 [般若精舍(반야정사)]라 칭하고 있으나, 원 위치는 극락전 서쪽이었다. 다른 사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조사당을 말하는 것이다. 이 건물 내에는 도리사의 祖師(조사)인 아도화상의 초상을 봉안하였으나, 목각판 등 다른 유물과 함께 현재는 도리사의 본사인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옮겨 봉안하고 있다.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데 조사전내의 유물을 조사할 때 불단 밑에서 족자 1폭으로 발견되었다. 조성 연대는 1823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조사전에서 [癸未年(계미년)]으로 기록된 [東方佛法始通阿度大和尙影堂重修記(동방불법시통아도대화상영당중수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계미년은 1823년으로 추정되므로, 이 초상화도 그 이전에 조성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시에 조성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극락전 뒤편에는 높이 1.3미터의 石鐘型 浮屠(석종형 부도)가 있다. 1968년 단국대 고적조사단에 의해 조사될 때까지만 해도 삼성각 뒤 담장 밖에 있었으나, 1977년 도굴꾼들에 의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방치되었다가 다시 경내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의 유래는 전혀 모르고 있으나 [도리사사적기]에 보이는 [石甕塔(석옹탑)]〔돌항아리탑〕이 아닌가 한다.
본래의 하층 지대석은 담 밖에 남겨둔 채, 새로 만든 대좌 위에 상층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뚜껑을 덮은 단지처럼 보이는 탑신이 있다. 다시 그 위에 연꽃봉우리형 보주를 얹었다. 상층 지대석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였고, 그 사이로 향로를 새겼다. 탑신에는 위와 아래에 띠처럼 돌아가며 연잎을 새겼는데, 그 꽃잎들이 서로 겹쳐지고 있어 특이하다. 보주에도 아래에 仰蓮(앙련 ;하늘로 치솟은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원을 마련하여 '世 尊 舍 利 塔'이라고 한 글자씩 새겨넣었다.
이 부도는 상층 지대석의 사자 두상이나 보주에 조각된 연꽃잎 등 각부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조각을 대표할 만한 수작이라 하겠다.


극락전은 현재 도리사의 본당으로 쓰이고 있다. 단청의 색이 세월의 흔적으로 알맞게 바래 분위기가 대단히 밝고 경쾌하면서도 아담하다. 최근 해체·복원을 했다는 데 손댄 흔적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솜씨가 감쪽같아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선시대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백제나 신라에서 쓰이던 치미를 올려 놓아 균형이 맞지 않다. 현재 극락전은 '도리사금당암중창기](1807)와 고종 13년(1876)의 중건 사실로 보아 19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극락전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목조불상의 표면에는 乾漆(건칠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相好(상호 ;얼굴)각부에는 색칠을 하였다. [복장기]에 따르면, 최초의 금박은 조선 영조 7년(1731)에 실시되었으며, 1968년 3월에 개금하였다.


극락전 앞 마당의 석탑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본 형태가 方形(방형)으로서 戒壇(계단 ;경배의 장소)과도 유사하고, 혹은 模塼石塔(모전석탑)과 유사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석탑과 비교하여 본다면 역시 基壇部(기단부), 塔身部(탑신부), 相輪部(상륜부)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
基壇部(기단부)는 얕은 지대석 네 모퉁이에 석주를 하나씩 세우고, 그 사이에 폭이 조금씩 다르고 세로로 긴 판석 6-7매를 놓았다. 그 위에 크기가 고르지 않은 두툼한 판석을 덮어 마무리했다. 기단부의 남쪽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긴 장방형의 門扉(문비)가 있어 사리 봉안의 상징성을 보이고 있다.
塔身部(탑신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층은 크기가 서로 다른 네모지고 두툼한 석재들을 쌓았다. 탑신부의 남쪽 역시 문비를 새긴 판석이 세로로 끼워져 있다. 한편 3층은 너무나 작아서 마치 다른 석탑의 露盤(노반)과 같다.
相輪部(상륜부)에는 露盤(노반), 네모진 石柱(석주), 연꽃이 새겨진 둥근 모양의 仰花(앙화), 그리고 연등을 닮은 寶珠(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전체 높이 3.3m인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에서는 오래전부터 '華嚴石塔(화엄석탑)'이라고 불러왔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1977년 석종형 사리탑에서 발견된 높이 16.5cm의 6각 원당부도형 사리함이다. 기단부, 몸체, 옥개부로 구분되었고, 내부에서 지름 1.2cm의 석가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 사리함 표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그 기법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조성으로 추정된다.


이 석상은 1976년 경내의 석탑가 담장을 정비하다가 발견되었다. 석상에 관해서는 {一善志(일선지)} 佛宇條(불우조)에 "金堂庵在桃李寺東數十步許有阿道石像通望東南野長江"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의 석상이 있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이 석상이 아도화상의 석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에서는 일선교를 지나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방면으로 1.9km가면 길 좌우로 낙산동 고분군이 나온다. 여기서 가던 길로 300m 더 가면 길 왼쪽으로 낙산동 삼층석탑 표지판이 보이고, 이 길을 따라 1.3km 가면 길 오른쪽 낙산1리 새마을 회관 뒤 논가운데 삼층석탑이 있다. 승용차의 주차는 가능하다.

이 석탑에 관하여는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海平面 洛山洞 全高 四間半 基石二間半角ノ 三重石塔ニ ツテ彫刻 精巧 完全ナリ]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현재는 석탑 이외에 아무런 유적·유물도 없으나, 주변 경작지에서 연화문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토기편을 수집할 수 있어 고대 사찰지임을 알 수 있다.
원위치로 추정되며, 신라시대 전형적 양식인 2층기단 위에 탑신을 건립하였다. 이 석탑은 模塼石塔(모전석탑) 종류로서 선산읍 죽장동오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죽장동오층석탑과는 마치 부자·형제지간처럼 닮아 보이는데, 돌을 짜맞추어 쌓아올린 것이나 풍기는 분위기도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두 탑의 다른 점은 기단부에서 뚜렷하다.
이 탑은 하층기단의  柱(탱주 ;가운데기둥)가 셋, 상층기단의 탱주가 둘인 점이 매우 주목된다. 이러한 구조는 신라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경주의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1층탑신 남쪽에는 龕室(감실)이 마련되어 있어 사리나 작은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감실 입구 내부의 양측 상·하에 둥근 구멍이 남아 있어 門扉(문비)로 여닫은 듯 하다. 양 문비 중 1석은 낙산 1동의 김낙중씨 댁〔현재는 廢家(폐가)〕 마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탑신에 끼웠던 돌기의 양끝은 파손되어 있다. 각부 구조를 세부적으로 관찰해 보면 1층과 2층의 屋蓋石(옥개석) 하면에는 낙수홈〔빗물받이〕이 음각되어 있고, 각 옥개받침은 약간의 몰딩〔Molding, 원만하게 깍아내림〕처리로 마치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보는 듯 하다.
이상의 기단부 탱주 구조 및 탑신·옥개석의 治石(치석) 수법으로 보아, 그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중대인 8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근 석탑 서북쪽 5m 떨어진 경작지에서 가로 5m, 세로 3m의 건물지가 조사되었고, 건물과 탑에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석재편이 한곳에 모아져 있다.




☞ 찾아가는 길 낙산동 삼층석탑이 있는 마을에서 일선초등학교 뒷편 골목길로 북행하면 낙산 2리가 된다. 이 마을의 동쪽에 [재경마을]이, 북쪽에는 [부처밭골]이 있다.


마을 전체가 절터로서 현재 산사면과 민가틈에 石築址(석축지)가 남아 있고, 곳곳에서 옛 기와편이 출토된다. 심동석(53세)氏댁 앞마당에는 팔각의 竿柱石(간주석) 일부와 長大石(장대석)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절샘]〔寺泉〕이라는 우물이 현재도 남아 있고, 그 옆의 논두렁에는 柱礎石(주초석)이 매몰되어 있다. 주초석 상면의 둥근 그랭이질로 보아 신라시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곳에서 약 60m 거리의 마을 입구 하천 石橋(석교)에서 석등 하대석 1구가 발견되어 현재 해평 중·상업고등학교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부처밭골이라 칭하는 이유는 경작지에서 수십구의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밭'은 장대한 석축지 위에 위치하며, 현재도 많은 토기와 자기 및 옛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부처밭'골 절터에서 주목되는 것은 목조탑파의 존재여부로서, 저수지 옆 民墓(민묘) 바로 뒤쪽에는 잡석이 쌓인 높은 언덕이 있어 그 가운데 1石의 心礎石(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심초석은 자연석 윗면을 평평히 다듬고 그 중심에 사각형 구멍을 2중으로 시공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경주 황룡사지구층목탑지를 비롯하여 사천왕사 및 망덕사의 목탑지 심초석 등에서 볼 수 있는 사리공 양식으로 신라시대에 건립된 목조탑파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 해평우체국 앞에 서 있던 石像(석상)이 이곳에서 이전해 간 것이라 한다.〔현재 이 석상은 언제 분실되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 찾아가는 길 현일고등학교에서 해평방향으로 난 도로를 통해 '숭선대교'를 건너자마자 전방의 골짜기에 [보천사]안내판이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廢寺(폐사)되었던 보천사지는 노천에 방치되어 훼손되어 가던 석불을 모시기 위해 안무출氏가 1955년 초가 1동을 건립하면서부터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또한 1959년 금당 건립 중 매몰된 석불 하부를 발굴하는 동시에 光背石(광배석)까지 원위치에 세워서 현상태로 완전히 복원하였다. 특히 당시에 석불 바로 앞에서 금동불입상 1구가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건물 기둥 밑의 초석은 이곳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圓座礎石(원좌초석 ;기둥을 받치는 부분이 둥근 초석)을 사용하여 시대 추정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石築(석축)이 동에서 서로 축조되고, 남향의 석불도 원위치로 추정되기에 절은 곧 남향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 堂宇(당우)에서 앞을 바라보면 보천골 밖으로는 낙동강과 고아읍 너른 들판이 전개되며 그 너머 멀리로는 우뚝한 모습의 금오산이 전망되어 번성할 당시의 정경이 아쉽기만 하다.


{新增東國與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卷29 善山都護府(선산도호부) 山川條(산천조), {一善志(일선지)} 地理十絶(지리십절), 同書 地理 第1 形勝條(형승조), 同書 津橋(진교) 등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寶泉(보천)'이라는 샘이 있어서 사찰명을 '寶泉寺(보천사)'로, 바로 앞쪽 낙동강의 탄류를 '寶泉灘(보천탄)'으로, 이 골짜기의 명칭 역시 '寶泉(보천)'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보천'이 어디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이 마을에는 '약수'라는 샘을 비롯한 세 곳의 우물샘이 있으니 그 중 어느 하나일 듯 하다. 혹은 이렇게 좁은 골짜기에 '샘'이 많으니 이들을 통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석불은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海平面 海平洞 全高 四尺 兩膝頸間 三尺ノ 石佛坐佛ニ シテ顔面ニ 小破損アル外 完全ナリ 又 高サ四尺ノ略馬蹄形ノ 光背ニハ 火焰及 小佛四體 彫刻シ アリ]라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일제시대에 조사가 되었다.
현재 석불은 '시멘트'로 보수된 안면부와 총탄자국으로 인해 훼손이 심하며, 또한 화강암의 석질이 약한 탓으로 풍화·마멸되었다. 그러나 8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여래좌상을 안치하고 그 배후에 별도로 擧身光(거신광)까지 갖춘 전형적인 신라불상이다.
석불의 양식을 간단히 살피자면, 4매석의 地臺石(지대석) 위에 8각형의 기단부를 갖추고 있다. 下臺石(하대석)의 각면에는 眼象(안상)이 1구씩 陰刻(음각)되었고, 中臺石(중대석) 각면에도 여러 가지의 조각이 있다. 上臺石(상대석)에는 花紋(화문)이 조각된 仰蓮(앙련)이 표현되어 있다.
여래상은 相好(상호)의 파손이 심각하나, 목은 비교적 길고 三道(삼도)가 뚜렷하다. 手印(수인)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으로서 석가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상의 뒷면에 광배를 고정시키는 둥근 구멍이 마련되어 있어 지금도 광배를 부착시키고 있다. 한편 光背(광배)는 頭光(두광)과 身光(신광)으로 구분되는 데 전체적으로 마멸현상이 나타나고 있을 뿐 거의 완전하다. 광배 주변에는 寶相花紋(보상화문)이 양각되었으며, 양측하부에는 향로 1구와 좌상의 화불 2구씩을 배치하였으며, 광배 정상에도 연화좌를 갖춘 삼존좌상을 양각하였다.
이상의 석조여래좌상은 衣紋(화문)과 대좌의 蓮瓣(연판) 및 광배의 향로·화불 등 각부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 초입 유공 신진 주유소 앞에서 무을 방면으로 지방도로를 따라 약 1.9km가면 길 오른쪽에 '법륜사' 표지판이 있다. 절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竹杖寺(죽장사)에 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卷29 善山都護府(선산도호부) 佛宇條(불우조)에 [竹杖寺俱在飛鳳山]이라 있고, {一善志} 佛宇條에도 [竹杖寺 在邑城西五里許 有祭星壇皆爲廢址 鄭以吾詩見下]라 보이고 있다. 1953년에 건립된 현재 법륜사에는 석탑을 중심으로 법당과 요사 각 1동씩이 세워져 있다. 법당내에는 최근 금오산에서 옮겨왔다는 석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상 1구가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나, 이는 근년에 조성된 불상이다.


한 사물이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우리 문화 유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한 몸에 지니면서도 조화를 잃지 않은 유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죽장사지 오층석탑은 화려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적당한 긴장감으로 충만하였고, 장중함 기품을 내뿜으면서도 부드럽고 권위적이지 않은 문화유산이다.
총 높이가 10m나 되는 석탑으로서 양식적으로 본다면 인근의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나 빙산사지 오층석탑과 유사한 模塼石塔(모전석탑) 계열이다. 18매의 長大石(장대석)으로 구성된 地臺石(지대석) 위에 2중의 기단부를 마련하고,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탑신에서 특이한 점은 다른 석탑의 탑신에서 보이는 隅柱(우주)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각층마다 많은 석재로 구성하다보니 생긴 축약이 아닌가 한다. 1층 탑신 남쪽면에는 龕室(감실)이 있어 본래는 불상을 모셨을 것이다. 감실 입구에는 角形(각형)과 四分圓(사분원)의 몰딩으로 額(액)을 돌렸으며, 그 내부 좌우의 상·하에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본래 양쪽으로 여닫이 門扉(문비)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 뿐만 아니라 윗면에도 계단식의 층급을 두어 塼塔(전탑)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한편 탑의 정상부에는 한돌로 된 露盤(노반)만이 놓여 있다.
이렇듯 거대하고도 웅장한 석탑을 건립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당시의 국력이나 불교의 위치 혹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되는 일이기에, 그 건립 연대는 아마도 불교미술의 정화기인 통일신라시대일 것이다. 이는 양식적인 측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2층 기단 양식과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서악리삼층석탑 등에서 보이는 옥개석의 層段(층단) 양식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현재 법륜사 경내에는 정사각형과 원형의 주초석이 산재하고 있다. 다른 곳의 주초석에 비해 그 크기가 倍(배)나 되기에 건물 역시 웅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은 주변 경작지에서 무수한 옛기와편이 발견되고 있기에 석탑을 중심으로 대가람이 경영되었을 것이다. 특히, 석탑 동남쪽 150m쯤 되는 넓은 경작지에 주초석과 기와편, 靑磁片(청자편)이 산재하여 여기까지도 당시 건물이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탑에서 죽장동 마을 쪽 600m 지점의 경작지에 당간지주가 있어 寺域(사역)을 짐작할 수 있다. 당간지주는 1柱(주)만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채석자들에 의한 가공의 흔적이 보이므로 나머지 지주는 찾기 어려울 듯 하다.



선산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은 글자 뜻 그대로 鳳凰(봉황)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설에 의하면, 비봉산은 비봉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 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에 해당되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목이 된다.
비봉산은 북쪽에서, 금오산은 남쪽에서 서로 안을 지키고 甘川(감천)은 동으로 흘러 낙동강과 이어져 외부를 지키면서 아주 튼튼한 천연의 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산 읍민들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다. 비봉산의 봉새가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쳐놓고 동네 이름을 '網張(망장)'이라 했으며, 물목 동네 뒷산을 '凰山(황산)'이라 이름지어 짝을 맞춰주기도 했다. 그것은 鳳(봉)은 수컷이요, 凰(황)은 암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산읍 사방동네를 '竹杖(죽장)'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열매로 먹이를 대어주고, 花鳥里(화조리) 또한 봉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滿花白鳥(만화백조)가 있다는 뜻이며, 다시 동리 이름을 迎鳳里(영봉리) 迎鳳樓(영봉루)라 한 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舞來里(무래리) 역시 봉황이 날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봉황은 다섯 개의 알을 낳는데 한 개는 이미 앞들에 있는 동산이므로 다시 네 개의 동산을 만들어 다섯 개의 동산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이 다섯 개의 알을 봉황이 품고 영원히 깃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다섯 개의 동산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허물어지고, 1966년 경지 정리로 완전히 사라져 지금은 한 개의 동산만이 남아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장군이 비봉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큰 쇠못을 꽂았다고 전하여 온다.



비봉산 산봉에 봉학이 뛰어놀고 앞방천 능수버들 휘늘어졌네 에헤요에헤요
어렴아 열사좋다 선산자랑인가 뒤골산 골작에 흘러나리는 물에 빨래하는
아가씨의 얼골이 어떻더냐 에헤요에헤요 어렴아 얼사좋다 선산자랑인가
甘川냇물 물에는 고기가 뛰어놀고 선죽교 다리는 옛말을 이룬다
에헤요에헤요 어렴아 얼사좋다 선산자랑인가 낙동강 여울에 소금배가 왕래하고
강창에 나루에는 선유의 노래로다 에헤요에헤요 어렴아 얼사좋다 선산자랑인가




☞ 찾아가는 길 일선교를 지나 '주륵사 폐탑' 안내판을 지나 약 2.9km 진행하면 도로 왼편 아래로 다곡1리 '다항 마을'이 나온다. 약 800m정도 마을을 관통하면 거의 마을 끝에서 왼쪽 청화산으로 향하는 소로가 나오고, 이 길을 따라가다 개울을 건너 있는 경작지에 절터가 위치한다. 승용차는 마을 끝에 주차해야 하며, 대형차는 마을 진입이 어려운 실정이다.

주륵사에 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 {일선지}등의 기록에 보인다. 주륵사의 폐사관련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善山府 宮室條(선산부 궁실조) [南館(남관)]의 기록이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주륵사는 본래 고찰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이미 폐사 직전으로서 조선 세종 11년(1429)에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수리함에 있어 이곳의 목재와 기와 사용을 건의하였다. 결국 그 후에 곧 폐사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僧 慧覺(승 혜각)의 碑(비)가 있다 하나, 수차례의 답사 결과 碑片(비편) 하나 찾을 수 없고 석탑재와 초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의 석탑에 대해서는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293쪽에 [桃開面 多谷洞 塔ハ 倒壞シテ 附近ニ 散亂ス 基石二間角初層ノ 傘石 七尺五寸角 三重石塔ト 推セラル 附近ニ 砂近及瓦ノ 破片點材ス] 라 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3층석탑으로 추정되며 현재 옥개석도 3석뿐이나, 현존하는 각 부재로 석탑의 원형을 짐작하자면 5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상·하 2중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는데, 기단부의 구성방법은 확인할 수가 없다. 상·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隅柱(우주)와  柱(탱주)를 각각 2주씩 나타냈으며, 각 탑신석 역시 양 우주를 표현하였다.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5단이며, 낙수면 네귀퉁이의 轉角(전각)과 反轉(반전) 양면에는 風鈴(풍령)을 부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기단부의 우주·탱주 양식수법, 5단의 옥개받침 등 양식적인 측면으로 미루어 탑의 축조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나 1층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石材(석재)의 추녀 1변 길이가 2.32m로서, 이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 못지 않은 巨作(거작)인 동시에 당 시대의 秀作(수작)임을 알 수 있다.
현재 [善山金氏(선산김씨)] 문중 묘소 5기가 인근에 전하는데, 각 묘 앞의 墓床石(묘상석)을 만들기 위하여 탑신석, 옥개석 할 것 없이 모조리 파괴하여 탑의 부재가 완전한 것이 단 1석도 없다.


현재 석탑지로부터 동쪽으로 民墓(민묘) 2기가 있다. 그 주위는 넓은 高臺(고대)로서, 주변이 모두 건물의 기단 면석들이다. 그리고 그 고대로 올라가는 層階石(층계석)은 사찰 법당 계단의 완전한 난간석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다시 동쪽 50m쯤 되는 경작지에도 남향의 석축지가 남아 있고, 신라시대 연화문막새기와편이 많이 발견된다. 1968년 조사시 이곳 경작지에 맷돌 하대석이 매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 1930년대에 지은 김씨문중의 祭室(제실)〔承裕齋〕에서 8판 연화문이 돌려 있는 주초석 3개와 원형주초석, 8각 석등 부재, 장대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사지로 올라오는 계곡 입구 암벽에는 [靑華洞門(청화동문)]이란 陰記(음기)가 있다.




☞ 찾아가는 길 선산향교에서 뒷편으로 난 소구릉위의 소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2km쯤 가면 校洞교동 '竹林죽림'이 나온다.

동민들은 이 골짜기를 [竹林(죽림)] 혹은 [塔(탑)골]이라 부르고 있다. [탑골]이라는 호칭은 석탑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죽림]이라는 호칭은 기록에 보이는 '죽림사'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에 [竹林寺 俱在飛鳳山]이라 하여 죽림사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또한 {일선지} 불우조에는 [竹林寺 在邑城北三里 鄕校之北其傍有舊鄕校基 今皆廢之]라고 하였으므로 이곳 일대가 죽림사지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죽림사지 일대에는 석탑이 있던 자리에 [校洞三層石塔遺址(교동삼층석탑지)]라는 표석과 건물지, 약 60m의 축대, 水槽(수조)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석탑은 상층기단 갑석 부재 1매와 탑신석 2석, 초층 옥개석 부재 2석과 삼층 옥개석 1석만이 온전한 상태로서, 1979년 선산 초입 동부동 비석거리로 옮겨 복원되어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지만, 복원된 전체 형태는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상·하층기단 면석의 양우주와 1탱주 양식, 5단의 옥개받침, 隅柱(우주)가 나타난 탑신석 등 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기 석탑임을 알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6km되는 '院里(원리)'에서 낙동강안을 따라 북쪽으로 1km쯤 가면 '江倉(강창)마을'에 이른다. 절터는 이 마을 남쪽 산록에 위치한다.

강창 삼층석탑에 관해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善山面 院洞 塔ハ 高サ一丈五尺ノ 三重石塔ニ シテ 完全ナリ]라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당시에는 완전한 삼층석탑이었던 것이 동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제시기 말엽 부장물을 노린 자들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마을 砂防工事(사방공사)때 사태방지의 석축재로 이용하기 위해 탑재를 반출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17년도의 실사진이 남아 있어 결실 파괴된 부분만 치석·보강하면 원형대로의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재 석탑이 있었던 자리에는 [江洛寺三層石塔址(강락사삼층석탑지)]라는 표석이 있고, 이 뒷면에는 석탑을 1976년 선산군청 구내로 옮겼다가 1980년에 직지사로 옮겨 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개관한 건물의 뒷편 마당, 일명 '청풍료 앞 삼층석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일부 석재를 보강하고, 상륜부는 신라시대 석탑 상륜부를 모방하여 새로이 조성하였다.
이전·복원된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부를 형성한 신라의 일반형 석탑으로서, 조성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1993년 보물 제 1186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현재도 절터에서는 많은 옛기와편을 수집할 수 있으며, 이 터를 극락전터 혹은 법당터라고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의 통칭인 '강창'이라는 지명은 분명한 역사지리적인 유래가 있을 것이다. 옛부터 선산을 중심으로 도개면의 龍山津(용산진)과 고아읍의 江亭津(강정진), 원동의 江倉津(강창진), 새도방진, 松堂津(송당진), 新風津(신풍진), 가골나루 등 7개 소의 나루터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20∼30년전만 해도 해평일대에서 선산읍내로 들어올 때에 나룻배를 이용하자면 반드시 이곳 강창을 경유하였다. [강창]이라 하면 곧 조선시대에 성했던 '河運倉(하운창)'을 생각할 수 있으나, 현재 이 고장에는 하운창으로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은 전혀 없다.




☞ 찾아가는 길 도중동 마을에서 동쪽 계류를 따라 약 1km 올라 가면 [절골]이라 칭하는 골짜기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낮은 구릉이 있고, 이 중턱에 석탑 1기가 있는 절터가 있다.

이 일대는 현재 경작지로서 동·서 방향으로 2단의 석축지가 남아 있어 남향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붕괴된 석탑재와 원좌주초석 외에는 다른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절터에 관한 기록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가 유일한데, [山東面 道中洞 塔ハ 現時 一層オ 殘ス ノミニシテ 他ハ 附近ニ 墜落ス 現高 四尺五寸 五重ト 推セラル 附近ニ頭部缺損スル 高サ 一尺五寸 石佛坐像一軀 現存ス]라는 기록이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석탑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파손된 석탑부재로 보아 삼층석탑으로 추정되며, 석불좌상 1구는 없어졌다.


50m 동쪽 언덕 위에 정교하게 조성된 원좌주초석이 매몰되어 있었다. 이 원좌주초석은 현재 산동초등학교로 옮겨 보관중이다.
원좌주초석은 장방형의 자연석 윗부분을 평평히 다듬고 그 중앙에 둥근 자리를 나타내었다. 4분원의 몰딩 수법이나 치석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이 사찰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할 수 있다.


석탑은 석축지가 있는 절터에서 남쪽으로 100m 지점의 높은 언덕에 붕괴된 채, 기단부와 옥개석 일부만이 남아 있다. 탑의 원형은 地臺石(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구성한 삼층석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하층기단 4면으로서 각면 2구의 眼像(안상)내에 각종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와 종류가 특이하다. 즉 서쪽면에는 하나의 안상안에 엎드린 獅子(사자)와 飛天像(비천상)을 같이 조각하였으며, 남·북면에는 구름무늬와 唐草(당초)문을, 동쪽면에는 안상 하부 중앙에 귀꽃문을 각각 조각하였다. 특히나 서쪽면과 같이 석탑 기단면석의 안상내부에 사자와 비천 2구를 함께 조각한 예는 아직 조사된 것이 없어 이곳의 석탑이 최초의 조사라 하겠다.
한편 상층기단은 양식적으로 보아 각면에 隅柱(우주) 2주와  柱(탱주) 1주를 새겨놓았다. 옥개석은 받침이 3단이고, 처마에는 낙수홈이 음각되었는데 현재 이 옥개석은 산동초등학교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체적인 기단부의 구성양식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한편 석탑 주변에는 많은 옛기와편이 발견되어 법당 등의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나, 좀 더 상세한 발굴조사가 있어야 할 듯 하다.




☞ 찾아가는 길 선산에서 상주행 지방도로 33번을 타고 옥성면소재지에서 옥성초등학교를 찾는다.

이 석탑은 원래 마을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형제봉 탑골]에 있던 것을 옥성면사무소를 거쳐 지서로 옮겼다가 1964년 11월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원 소재지에는 아직도 석탑의 지대석이 반쯤 매몰된 채 남아 있으며, 이 외에도 장대석과 주초석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으나, 이곳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현재 지대석과 3층 옥개석 등 일부 부재를 잃어버렸으나, 그 원형은 충분히 알 수 있으니 그 형태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수매의 장대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구성한 삼층석탑으로서, 기단부 갑석의 연꽃대좌로 인해 주목되고 있다. 單葉伏蓮(단엽복연)을 4장씩 사방에 조각한 연꽃대좌로서 면석을 받치고 있다. 1석으로 된 면석은 4면에 양 우주를 각출하였으며, 아래부분의 2단 각형 괴임이 연꽃대좌 상면의 각형받침과 맞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꾸로 복원되어 있는 듯 하다.
초층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3단이며, 추녀에 낙수홈이 표현되었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어 전형적인 고려 양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받침을 표현한 후 2층 탑신을 나타내었다. 2층 옥개석 역시 상부에 3층 탑신을 같이 나타내어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기단부에 연꽃대좌가 마련되고, 특히 하나의 돌로서 탑신과 옥개석을 같이 나타낸 예는 고려시대 건립인 춘천칠층석탑이나 구례 논곡리삼층석탑, 춘성 창촌리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아동 석탑 역시 이러한 양식적인 특징으로 인해 축조연대는 고려중엽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길 도개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속칭 청량산 중복.


현재의 문수사는 50여년전 해방직후에 창건된 사찰로서 본래 이 곳에는 '納石寺(납석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경내에는 요사 1동과 20여년 전에 건립된 법당이 있으나, 내부에는 倭色(왜색)의 木造佛龕(목조불감)뿐이므로 여기서 소개할 만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뒷편 산봉우리 아래에 자연동굴을 이용하여 조영된 법당이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 골짜기의 이름을 '窟岩(굴암)골'이라 부르고 있다.
천연동굴 입구에는 2층의 현대식 건물을 지어 기도처로 삼고 있다. 30년전만 해도 이곳에는 '獅子庵(사자암)'이라는 2칸 기와집이 있어 내부에는 聞慶(문경) 大乘寺(대승사)에서 옮겨온 흙으로 만든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약사여래좌상은 전면에 금칠을 한 불상으로서 螺髮(나발)에 낮은 肉 (육계)를 갖추고, 원만한 상호로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특히 통견의 법의와 배꼽 앞에 모은 손에 들려진 藥盒(약합)은 중생 구제의 誓願(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불의 자비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相好(상호)와 法衣(법의) 등 각부의 양식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불상은 신축한 산신각 내에 山神幀(산신탱)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곳은 납석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납석사에 관해서는 {일선지} 불우조에 [納石寺 在新谷門巖北 寺後有石窟谷屋數間]이라는 기록이 주목된다. 현재 암굴법당의 형태와 이곳의 위치가 일치하기에 곧 납석사터임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桃開面 新谷洞 附近ニ 瓦片及 砂器片點在スル外 遺物ナニ]이라는 약간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현재 문수사 법당 일대가 옛 납석사의 건물지로서, 이곳에는 2단의 장대한 석축이 남아 있다. 하단은 높이 4∼5m·길이 40m의 석축이 정연하고, 상단은 높이 2m·길이 20m의 석축이 있으며 주위 경작지에는 옛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납석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口傳(구전)되는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말기에 廢寺(폐사)된 듯 하다.


마을신도들에 의하면, 본래 이곳 경작지에는 오래전부터 석탑 1기가 있었는데 일제 말기에 괴한이 나타나 이 석탑을 파괴하여 그 내부에서 銅佛(동불) 1구를 탈취해 갔으며, 이때부터 석탑은 넘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수사를 창건하는 과정에 굴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석으로 이들 탑재를 사용했으므로 현재는 부재가 한 점도 없다. 다만 절 입구에 옥개석을 사용한 [淸凉山 文殊寺(청량산 문수사)]라고 묵서한 標石(표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것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화단에 안상 2구가 새겨진 기단 부재와 사리공이 조성된 탑신 부재 하나씩이 있을 뿐이다.




☞ 찾아가는길 선산에서 무을방면 지방도로 68번을 타고 가다가 봉곡리에서 오른쪽 상주행 916번도로를 이용한다. 대원저수지를 지나 가다보면, 도로 왼편으로 '상득익'·'아랫득익'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옥성면 태봉 2리는 지금도 마을을 '득익마을'이라 칭하는데, 이는 '득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득익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참고된다.

{高麗史} 列傳 卷第47 辛禍 二(七∼八)條 : […… 九月倭寇丹溪居昌冶爐等懸至嘉樹懸都巡問使金光富與戰敗死 移置海印寺所藏歷代實錄及經史諸書于善州得益寺以李乙珍爲忠州丹陽道兵馬使…]
{文宗實錄} 卷5 卽位年 庚午十二月條 : [宗金請大藏經以善山府得益寺所藏三千八百卷賜之]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善山都護府 佛宇條 : [得益寺在伏牛山 高麗時歷代實錄 藏于陜川海印寺 及倭寇 移安此寺 後移于忠州開天寺]
{一善志} : [得益寺 在伏牛山 高麗時歷代實錄 藏于海印寺 及倭寇爲患移案此寺後移 忠州之開天寺]

이들 기록에 의하면 득익사는 고려 역대실록을 보관하던 큰 사찰로서, 조선 제 5대 문종 때까지도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던 듯 하다. 이곳의 지리적 여건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산간지역이었던 까닭으로 중요한 文籍(문적)의 보관처로서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서는 득익사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옛날 고려때 큰 절이 있어 골짜기마다 암자가 그득 들어 앉았었다.]고 하지만, 뒷편 산골짜기의 작은 암자 자리외에는 특별한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득익사에 관한 寺蹟(사적)기록이나 廢寺(폐사)연유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마을 대나무밭에서 연화문 기와편이 몇 점 출토되었다고는 하나, 그 위치와 기와편의 출토 사실·구전 등으로 미루어 이 곳이 꼭 법당지라고 볼 수는 없고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한편 마을에서 서북쪽 산곡인 속칭 '미륵당' 골에는 6년전만 해도 '미륵바위'가 있었다. 높이 1.1m의 石柱(석주)에 약간의 가공이 있는 듯 하나 뚜렷한 조각은 없고 자연석에 가까웠으므로, 아마도 토속적인 미륵신앙에서 나온 숭배물인 것 같다. 또한 1968년도에는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반달형 돌칼이 수습되어 지역 上古史(상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해평면에서 장천행 25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경원대학' 못미쳐 있는 산동초등학교를 찾는다. 초등학교 본관 오른쪽〔向右〕 분수대 옆에 주초석 1기와 더불어 위치한다.

학교측에 의하면 이 석불은 산동면 인덕동 속칭 [샘골]의 미륵당 도로변에 방치되었던 것을 1965년 9월 25일 도로 공사때 현위치로 옮긴 것이라 한다. 이전시에 이미 그곳에는 석불 외의 광배, 대좌 등의 유물이 전혀 없었다고 하니 원위치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할 듯 하다.
한편 석불에 대한 자료로는 일제시대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山東面 仁德洞佛像ハ 高サ 一尺三寸 兩膝頭間 一尺ノ 石佛坐像 彫刻粗雜ナリ 附近ニ 崩落 セル 石垣及瓦片 砂器片 現存ス]라는 기록이 있다.
석불의 머리는 50여년 전에 없어졌으나, 結跏趺坐(결가부좌) 자세와 降魔觸地(항마촉지)의 手印(수인)으로 보아 석가여래상으로 추정된다. 절단된 불상의 목 중앙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은 머리를 부착시키기 위한 후대의 가공 흔적으로 생각된다. 목에는 三道(삼도)를 뚜렷이 표현하였고, 通肩(통견) 법의는 양팔에 걸쳐 양쪽 무릎을 덮었으며 배꼽에서 흘러내린 앞자락은 우측 무릎 밑으로 접혀지고 있다.
이 석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옷주름의 부드러움과 앞가슴의 사실적인 치마바지 묶음선이다. 이러한 점은 균형잡힌 신체 비례와 더불어 석불의 조성 연대를 통일신라시대 9세기경으로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편 불상 옆에는 도중동 사지에서 근년에 옮겨 놓은 옥개석과 圓座柱礎石(원좌주초석)이 보존되어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도중동 사지'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 찾아가는 길 도개면사무소 건너편 도개중교등학교를 찾는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좌상과 광배·대좌를 한돌로 조성하였는데, 현재 광배 상단부와 보살상의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얼굴의 표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머리의 寶髮(보발)이 양쪽 귀부분으로부터 내려져 있기에 보살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손은 어깨쪽으로 들어 올려 연꽃줄기를 잡았고, 왼손은 배 앞에 두고 있다. 天衣천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서 대좌까지 부드럽게 나타나 있다.
광배에는 당초문과 연꽃문, 화염문, 화불 등을 양각하였다. 광배에서 주목되는 것은 뒷면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는 넓은 仰蓮(앙련) 위에 구름무늬띠를 장식하였고, 그 위에 伏蓮(복련)의 연화대좌를 마련하여 좌상 1구를 조각하였다. 불상은 智拳印(지권인)을 짓고 있는 비로자나불로서, 머리에는 肉 (육계)를 표현하였다. 원형 頭光(두광)과 두광으로부터 두줄기 굵은 띠로서 身光(신광)을 표현하여 부처의 신성함을 표현하였다.
한편 대좌는 4각형으로서 전면에 걸쳐 천의가 부드럽게 내리워져 있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각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보살좌상도 좌상과 광배·대좌를 한돌로 조각하였으며, 머리의 寶髮(보발)로 인해 역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광배 윗부분과 좌상의 머리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각부의 세부 조각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仰蓮(앙련)의 연화대좌를 갖춘 고려시대 작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에서 일선교를 지나 '도리사'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 도로 왼쪽 마을이 금호리이다. 금호1리 마을길로 들어가 마을회관을 지나 경로당쪽 산길로 가기전 왼쪽 세번째(399번지) 金熺祥(김희상)씨댁 마당에 위치한다.

현재 이 석불은 민가 마당에 북향하여 하부가 매몰된 채 서 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 이 주변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었고, 다만 이 석불을 봉안했던 초가만이 있어 각처에서 신도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협곡인 '옥인마을'의 지형이나 주민의 말에 의해 석불의 현 위치와 방향은 원형인 듯 하며, 무엇보다도 마을 곳곳에 옛기와편과 청자편이 산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절터로 추정된다. 한편 석불에 관하여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海平面 金湖洞 全高 五尺ノ 石佛立像ニ シテ 鼻及眼部ニ 小缺損 アル外 完全ナリ]라는 기록이 있다.
석불은 광배와 더불어 하나의 돌로 제작되었고, 광배는 두·신광을 겸비한 擧身光(거신광)이다. 석불의 相好(상호)는 상당부분 훼손되었으나, 정수리의 肉 (육계)나 三道(삼도)의 표현 등은 당당한 어깨와 더불어 위엄있는 모습을 추측케 해 준다. 手印(수인)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아래로 내린 왼손은 중지와 약지를 구부려 표현하였고 오른손은 가슴 가까이 들어 인지와 엄지를 구부려 잡은 듯한데 마멸로 분명치 않다.
이상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 길 해평면에서 장천행 25번 지방도로로 가다가 산동면사무소(적림리)를 지나 '적림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접어들면 길 오른편으로 '정원사'가 보인다.('적원사'에서 '정원사'로 개칭)

이 불상은 원래 산동지서 우측 논가운데에 하반부가 매몰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미신타파운동의 영향으로 마을사람들이 불상을 깨부수려 하자, 주민 박영호씨가 자신의 집으로 불상을 모시고 [적원사]라 하였다. 불상 원위치의 지형이나 주변 상황으로 보아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다른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앞으로의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은 원통형 몸통에 상체를 얕게 조각하였고, 모시는 과정에서 시멘트단을 마련하여 무릎 아래를 확인할 수 없다. 현재 머리 위에는 8각 蓋石(개석)을 올려놓았다.
얼굴의 전체 윤곽은 원만하나 각 부분의 파손이 심하여 부처의 자비심은 찾기 힘들다. 단지 입 정도만이 남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부녀자들의 아들 잉태설로 인한 파괴로 생각된다. 신체의 法衣(법의)는 마멸이 심하여 가슴과 왼쪽 팔에 약간의 흔적만이 있고, 하체에는 찾아 볼 수 없다. 목이 짧아서 양어깨가 올라간 것 같아 전체의 균형을 잃은 듯 하다. 고려 중엽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머리 위의 8각 개석은 비록 파손되었으나, 合角(합각)머리의 삼산형 귀꽃으로 주목된다. 이 개석은 파손된 부분에 원형 구멍의 흔적이 보이고, 검게 그슬린 흔적이 남아있어 석등부재로 생각된다.



목단꽃 같은 내 얼굴에 개나리꽃이 무삼일고
삼단같은 내머리에 비사리춤이 무삼일고
분결같은 이내손이 조막호미 무삼일고
비단치 입던몸이 행주치마 무삼일고




☞ 찾아가는 길 산동면소재지(적림동) 약 500m 못미쳐 도중리로 가는 왼쪽 소로(승용차 내왕 가능)를 따라 3km쯤 보행하면 도중리 입구 계곡 남쪽에 석상 1구가 있고, 건너편 마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 단간와옥 내에 이와 동일한 석상 1구가 봉안되어 있다.

동민들의 말에 의하면, 수백년 전부터 이 마을의 守護神(수호신)으로 숭상되어 왔으며, 지금도 봄·가을 연 2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러한 奉祀儀禮(봉사의례)는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서 그 봉사 대상은 대개 조선시대 석상들이다. 이 곳의 석상들도 조선시대의 것으로서 瓦屋(와옥)내에 모셔져 있는 석상의 冠帽(관모)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일한 양식수법을 보인다.
석상들은 사각형의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사각형 石柱(석주)로서 몸통을 표현한 立像(입상)들이다.
마을 입구 계곡의 석상은 머리 위에 冠帶(관대)가 넓은 文人(문인)의 冠帽(관모)를 썼다. 양쪽 귀는 짧으나 치켜 뜬 눈과 주먹코, 흡족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입 등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도록 한다. 이러한 얼굴 각부의 생김새는 마을 수호신인 장승의 얼굴과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옷의 주름무늬는 표현되지 않았고, 양손은 가슴에 모아 牌(패)를 잡고 있다. 이러한 조각 양식은 조선시대 陵墓護石(능묘호석) 중 文人像(문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시대적 배경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석상의 크기는 그 높이가 각각 200cm, 155cm이다.



1976년 3월 8일 구미시 고아읍 봉한 2동에서 砂防工事(사방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 1구와 금동보살입상 2구가 출토되었다.
현지 조사결과 이 불상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06년경이었다. 윤씨라는 나무꾼이 마을에서 2.5km 떨어진 접성산 정상부의 [대밭골]에서 습득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어 다시 봉한 2동 산기슭에 묻었던 것이다. 처음 발견된 대밭골은 [接聖寺(접성사)]터로 추정되고 있는데, 아직도 삼국시대의 기와와 토기편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金銅如來立像(금동여래입상)은 국보 제 182호로, 臺座(대좌)를 갖춘 金銅觀音菩薩立像(금동관음보살입상)은 국보 제 183호로, 金銅觀音菩薩立像(금동관음보살입상)은 국보 제 184호로 각각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보살상 3구는 조성수법과 연대 그리고 그 크기가 각각 달라서 본래 동시에 조성한 삼존은 아니다. 조성 이후 모아서 삼존으로 봉안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금동여래입상의 육계는 크고 뭉뚝하며 螺髮(나발)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相好(상호)는 원만한 모습으로 목에는 三道(삼도)가 뚜렷하다. 手印(수인)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펴고, 法衣(법의)는 通肩(통견)으로 발목까지 내려와 있다. 특히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 초기 양식으로서 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왼쪽 다리에 돌기부분 하나가 남아 있어서 원래는 臺座(대좌)를 따로 만들어 부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좌를 갖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머리에 花冠(화관)을 썼으며, 그 정면에 化佛(화불) 1구가 조각되어 있다. 길쭉한 상호는 근엄한 표정으로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올려서 작은 연꽃봉오리를 가볍게 들었으며, 왼손은 내려서 持物(지물)을 잡고 있는 듯 하나 현재 지물은 없다. 얇은 天衣(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가슴과 배 부분에 瓔珞(영락)띠를 드리고 이를 원형의 花紋(화문) 장식으로 연결시켰다. 대좌는 7각형이며 2중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한편 머리 뒷면에는 頭光(두광)을 부착시켰던 고리가 남아 있다.
또 다른 한 구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2중 連珠紋帶(연주문대) 속에 化佛(화불) 1구를 갖춘 花冠(화관)을 쓰고 있다. 이 불상은 특히나 매우 섬세한 영락과 의문이 주목되는데, 이는 불상 뒷면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영락띠에는 어깨에 2개, 아래에 4개, 옆에 2개의 花紋(화문) 장식이 있으며, 정사각형의 3중문 장식이 4개 있다. 그리고 다리부분에는 龍頭(용두)장식으로 물림하였는데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한편 발바닥에 높은 촉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좌를 갖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 뒷면에는 두광을 부착했던 돌기가 남아 있다.
이 3구의 불상 중에서 여래상은 통일신라 초기의 典型樣式(전형양식)을 보이고 있어서 조성 연대 추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나머지 보살상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옷주름과 영락대, 대좌의 연화문, 상호의 표정, 뒷면도 앞면처럼 정교하게 조각된 점 등은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신체의 三曲(삼곡)자세에서 보이는 세련미는 조성 연대 추정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감안해서 이들 보살상은 아마도 8세기정도쯤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찾아가는 길 구미시내에서 구미대교를 건너 대구행 904번 지방도로를 따라 구평초등학교를 지나 신동(새월) 마을로 좌회전하여 새마을회관을 찾는다. 여기서 오른쪽 시멘트 길로 오르다 다시 오른쪽으로 꺽어 언덕을 오르기 전 작은 오솔길로 300m쯤 가면 도로쪽을 바라보며 위치한다.

신동 야산입구에 있으며, 동민들은 이곳을 [부처골]이라고 부른다. 불상의 머리부분 상단이 파괴된 것을 시멘트로 연결·복원시켜 놓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광배는 頭光(두광)과 身光(신광)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는데, 연꽃잎·구름무늬·인동무늬의 표현이 특히 사실적이며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인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 길 해평방면에서 가자면 25번 대구행 지방도로를 따라 산동면을 지나 장천면 소재지 못미쳐 상림동 삼거리('타조연구소'를 이정표 삼는다.)에서 왼쪽 계곡으로 난 도로로 접어든다. 약 6.2km 가면 오로저수지가 나오며, 저수지를 지나 미륵당 안내판이 나오면 오른쪽 소로를 이용하여 약 1.5km정도 가면(비포장도로임.) 중앙고속도로와 만나게 된다. 현재 미륵당 석불입상은 고속도로 우측의 야산에 위치한다. 한편 마을에서 북쪽 계곡으로 올라가면 2km쯤 되는 좌측에 속칭 고로봉이 있다. 이 고로봉 중턱에 지금은 과수원으로 경작되지만 절터의 흔적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마애불좌상이 있다.

이곳 일대는 현재 중앙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옛 절터의 유적·유물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공사장 주변에 몇 점의 옛 기와편만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1968년 조사시만 해도 높이 1m정도의 석축지가 남아 있었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약 60년 전에 소형 석불 1구가 출토된 적이 있다고 하나, 그 행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곳의 석불입상은 68년 조사 당시만 해도 '미륵당'이라는 건물내에 모셔져 있었으나, 앞서 말한 중앙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이곳으로 이전한 듯 하다. 68년 조사를 근거로 해서 미륵당 석불입상과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주변 유물에 대해 살펴보겠다.
長川面(장천면)과 軍威郡(군위군)의 접경지대인 고갯마루에는 2칸의 불당이 있었다. 내부에는 석불입상 1구가 봉안되었고, 앞마당에 拜禮石(배례석) 1座(좌)가 매몰되어 있었다.
미륵당 건물은 그 上樑文(상량문)에 [佛紀二九七七年 庚寅三月三十一辛亥]란 墨書(묵서)가 있어서 1950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목부위가 단절되어 머리부분을 올려 놓았다. 각 부분을 살펴보자면, 머리에는 螺髮(나발)과 肉 (육계)가 있으나 파손이 심하여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양 眉間(미간)의 白毫(백호) 자리라든지 볼과 귓볼의 풍만함은 원형의 원만하고 위엄있던 인상을 추측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手印(수인)은 오른손의 경우 허리까지 내렸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치켜들고 있으나 파손으로 인해 손가락은 뚜렷치 않다.
한편 미륵당에 봉안되어 있을 때 석불의 하반부는 시멘트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시멘트를 떼내다가 파손된 듯 약간의 옷주름이 굵게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의 풍만함이라든지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이 보이고는 있으나, 양어깨가 그리 당당하지는 못하고 신체 비례가 조화롭지 못해서 제작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아울러 석불의 원위치는 현재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한편 68년 조사 당시 미륵당 앞에는 배례석이 있었고, 마당 서쪽 구석에는 八角蓮花臺石(팔각연화대석)·八角臺石(팔각대석)·蓮花臺石(연화대석)·八角竿柱石(팔각간주석) 각 1석씩이 중첩되어 남아 있었다. 이들은 佛像臺座(불상대좌)와 石燈(석등)의 일부로 추정되는 유물들이었다.
拜禮石(배례석)은 불상이나 석등의 앞에 놓아두고서 禮(예)를 올리기 위한 시설이다. 68년 조사에 따르면 미륵당 배례석은 길이 113cm, 폭 52cm의 직사각형으로서 앞면에는 眼象(안상) 2구가, 좌·우 측면에는 1구씩의 안상이 나타나고 있다. 윗면에는 蓮花座(연화좌) 2구가 조각되어 매우 화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八角蓮花臺石(팔각연화대석)과 八角臺石(팔각대석)은 각각 불상대좌의 상대석·중대석으로 추정되며 특별한 조각은 없다. 석등 하대석으로 추정되는 蓮花臺石(연화대석)은 일부 파괴되었지만 方形(방형)의 지대석과 동일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중앙부에 둥근 구멍은 석등 간주석의 돌기가 꽂힐 곳이며, 당시에 조사된 八角竿柱石(팔각간주석)이 그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석조유물들은 다듬은 수법이나 연화문조각으로 보아 나말여초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석불입상보다는 시대가 앞선 것으로 추정되기에 근처의 어느 절터에 방치되었던 것을 미륵당으로 이전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곳 절터는 68년 조사 당시만 해도 높이 1.5∼2m의 석축지가 군데군데 남아 있고 주위에 기와편이 산재하여 '泉井址(천정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나 지금은 모두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절터의 유물로는 석탑재 2석과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나, 현재 석탑재는 찾을 수 없다.
석탑재 2석은 남쪽 산록 계곡변에 남아 있었는데 지형조건으로 보아 절터로 보기는 무리가 있고, 윗쪽 사지에서 이곳으로 굴러 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조사를 따르자면, 2석은 각기 상층기단석과 하층기단 갑석으로 보여 이중기단을 갖춘 석탑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마애여래좌상'(높이: 155cm)은 절터에서 100m쯤 상봉쪽으로 올라가면 큼직한 바위의 남쪽을 평평히 다듬고 조각한 것이다. 불상은 결가부좌하였고 素髮(소발)에 육계까지 갖추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푸른 이끼가 끼고 마멸이 심하여 각부의 특징을 충분히 살필 수는 없다. 암벽면에는 광배 조각도 없고 연화대좌도 조각되지 않은 듯 하나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제작연대를 추정하자면, 무릎 이하의 조각 수법에서 고려 중엽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이 석상은 해평초등학교 정문 앞 동산에 모셔져 있었으나, 1996년 6월 도난당하여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원 위치는 해평면 낙산 2동의 절터로서 [부처밭골] 어구에 護石(호석)으로 있던 것을 舊(구) 해평우체국 앞 대로변으로 옮겼다가 다시 해평초등학교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1968년도 조사 기록에 따르면, 석상은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된 일종의 장승인데 각부 조각이 선산 지역의 다른 석상에 비하여 정제되고 사실적이다.
머리에는 冠帽(관모)를 썼고 안면은 타원형이며 양쪽 귀는 짧은데 약간의 미소마저 어린 입술이 인상적이다. 특히 턱수염이 약간 옆으로 바람에 날리듯 조각된 것이 주목된다. 목부위는 굵게 조각되어서 목이 짧게 보이며, 의복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다. 양손은 가슴 앞에 모았으나 저고리 속에서 합장하여 노출되지 않았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큰 편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나, 조선시대 어느 장승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석상이다.
참고적으로 상의 높이는 153cm이다.

♣ 전설따라 삼천리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의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에 숨어 목숨을 구한 뒤 그 여인을 부처님의 형상으로 조각한 것이라 한다.




☞ 찾아가는 길 구미대교를 건너 옥계·해평방면 67번 도로로 약 500m가면 '石峴(솔뫼)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기 직전에 왼편 소로로 안내판이 있다. 도로에서 좌회전이 되지 않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약 100m정도 소로를 따라가면 현재 [金剛禪院(금강선원)]이라는 기도처가 있다.

이 불상을 흔히 [칠곡인동마애불]이라 칭한다. 그것은 이곳의 행정구역이 본래 칠곡군 인동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구미시에 편입되어 황상동이 되었으므로, 보물 제1122호의 지정 명칭도 [구미 황상동마애여래입상]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마애불은 정동쪽을 바라보는 입상으로 머리위에는 평평한 사각형 寶蓋石(보개석)을 얹었고, 발 아래는 6葉(엽)의 연꽃잎이 새겨진 둥근 대좌를 갖추고 있다. 머리위의 보개가 처음부터 있었는지는 肉 (육계)의 일부와 바위 측면이 파손되어 확실치 않으나, 고려시대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기에 아마도 불상 조성 시기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양쪽 귀는 어깨에 닿아 있고, 머리카락은 자연 그대로 아래로 내려져 있다. 가는 눈과 가볍게 다문 작은 입술, 넓고 낮은 육계, 삼도, 당당한 가슴과 어깨 등의 전체적인 양식은 풍만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手印(수인)은 가슴에 양손을 얹은 채로 설법하는 형상으로서 그 尊名(존명)을 아미타여래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허리 이하는 상반신에 비해 조각을 소홀히 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얇은 옷으로 몸을 감싸 육체의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U자형의 衣紋(의문)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신체의 풍만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양발은 좌우로 발끝을 향하고 타원형의 연꽃 대좌를 밟고 있다.
素髮(소발)인 머리, 弧形(호형)의 눈썹, 반쯤 뜬 긴 눈, 양볼에 살이 올라 탄력성이 있는 얼굴 표현 등에서 이 불상은 북한산 구기리 마애여래좌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고, 법의 주름표현은 함양 마천면 마애여래입상과 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불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할 수 있겠다.



첫째, 마애불은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동할 수 있는 조각과는 달리 확실하게 그 지역의 조각 작품임이 명백하다는 사실이다. 금동불과 같은 이동 가능한 작품들은 어떤 지역에서 아무리 많이 출토되었다 해도 모두 그 지역에서 조성된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데 비해서, 마애불은 그 지역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마애불은 조각의 流波(유파) 연구나 國籍(국적)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파나 국적을 밝히는 것은 제작연대를 밝히는 것 못지않게 불상 연구의 기본이 되며, 이것이 밝혀져야 불상에 얽힌 여러 문제가 풀릴 수 있다. 불상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므로 어느 사회의 산물이냐에 따라 불상의 성격도 바뀌기 때문이다. 마애불은 이런 점을 가장 잘 반영하는 불상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둘째, 마애불은 입체적인 원각상보다는 조각적인 면에서 약간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산 마애삼존불이나 예산 사방불처럼 高浮彫像(고부조상)일 때는 조각적인 면에서 손상이 없으며, 얕은 부조상이거나 線刻像(선각상)일 경우는 조각이 용이해서 표현하기 어려운 불경의 설법 내용이거나 佛傳圖(불전도)같은 설명적인 내용까지도 조각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불화에서나 표현될 수 있는 내용도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애불은 불교 미술 가운데 조각적이면서도 회화적인 특징이 있는 독특한 분야라 할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마애불의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 찾아가는길 선산에서 상주방면 33번 도로 가다가 강변휴게소를 지나 3km쯤 가면 제2구봉교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912번 지방도로를 따라 3.5km직진하면 도로 오른편 복우산으로 난 길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승용차는 가능하나, 대형버스는 어렵다.

현재의 대둔사는 본래 대둔사의 부속암자이던 [靑蓮庵(청련암)]으로서 대둔사가 폐사된 뒤에 이곳으로 옮겨 대둔사라 칭하게 되었다. 본래의 대둔사는 이곳에서 약 300m 되는 서남 중턱으로서 현재는 높이 2m·길이 50m의 석축지뿐이고 주변에 기와편과 청자편이 흩어져 있어 옛 절터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현재 대둔사 경내에는 목조 건물인 大雄殿(대웅전)과 冥府殿(명부전)·應眞殿(응진전)·山神閣(산신각) 등의 법당이 있으며, 康熙五年銘 幢竿支柱石(강희5년명 당간지주석)·性波大師碑(성파대사비)·翫花堂塔(완화당탑) 외 석조부도 1기와 3년전 요사채를 지으면서 발견된 석조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상의 유물들은 모두 17세기 이후의 조성으로서 대둔사는 [康熙(강희)]연간에 중흥불사를 일으켰으며, 이후 계속적인 건물의 재건과 불사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둔사의 본당으로서 중앙 높은 대지에 건립되어 있다. 대웅전 내에는 본존으로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벽에는 {伏牛山大屯寺彌勒庵新設佛糧記(복우산대둔사미륵암신설불량기)}와 {善山伏牛山大屯寺靑蓮庵重創記(선산복우산대둔사청련암중창기)} 2매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내부의 亞字型(아자형) 닫집이 특이하다. 이런 모습의 건물은 실제로는 조영되지 않은 것이나 장엄을 위하여 과장한 것이다. 亞자의 평면을 갖는 건물로는 창덕궁 비원의 芙蓉亭(부용정)이 있고, 목조건축을 모방한 경천사 10층석탑과 원각사 10층석탑이 있다. 대웅전 내부의 닫집은 경천사 10층석탑의 한 층 1면과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의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이다. 건축기법과 양식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내소사 대웅전과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대웅전의 주존인 석가여래좌상은 종이로 만든 불상으로서 전면에 금박을 입혔다. 수인은 說法印(설법인)을 취하였으며, 무릎 너비에 비해 동체가 크기 때문에 약간의 불안정감을 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대웅전 건물과 거의 같은 시기인 17세기로 추정된다.


대웅전 북측의 건물인 명부전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축연대는 각부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보다 조금 후대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건물 내에는 幽冥圖(유명도) 1폭과 歷代祖師(역대조사)의 진영 5폭이 봉안되어 있다.

·幽冥圖 : [康熙甲午]. 조선 19대 숙종 40년인 1714년에 제작된 탱화임.
·奮忠報國弘濟尊者松雲堂大和尙之眞 (분충보국홍제존자송운당대화상지진)
·箕城下第一世白華堂大禪師之眞 (기성하제일세백화당대선사지진)
·碧波堂大禪師蓮友之眞 (벽파당대선사연우지진)
·碧潭堂大禪師包允之眞 (벽담당대선사포윤지진)
·霜峯下第二世月巖堂大禪師之眞 (상봉하제이세월암당대선사지진)

이외에도 1920년에 조성되었다는 묵기가 있는 탱화 1폭이 있다.


대웅전 북측 언덕에 남향하여 세워진 응진전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양식의 건물이다. 정면 3칸에는 각각 띠살무늬의 문짝을 달았으며, 건물 외벽에는 보살상을 벽화로 그려넣었다. 17세기 후반에 축조된 건물로 보인다.
내부에는 흙으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벽을 따라 돌려진 목조불단 위에는 16 제자상과 동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조성 시기는 모두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이 밖에 삼존불 후면의 탱화 하단에서 1920년에 불상을 改金(개금)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대웅전 우측 바로 밑에 소형 당간지주석 1柱(주)가 남아 있다. 북쪽 측면에는 [康熙五年丙午(강희5년병오)]라 음각되어 있어 조선 제18대 현종 7년(1666년)에 당간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康]자 위에는 작게 [大]자가 보이고, [丙]자 옆에도 [火]자가 보인다.

대둔사의 중심 경내에서 동쪽 축대 밑 비탈에 성파대사비가 남아 있다.
자연석을 하대석으로 삼고, 하나의 돌로서 碑身(비신)과 蓋石(개석)을 삼았다. 비신에는 상부에 횡으로 [性波大師碑銘]이라 전제하고, 初頭(초두)에 [有明朝鮮國性波大師碑銘幷序(유명조선국성파대사비명병서)]로 음각하였다. 이 비문에 의하면 進士 沈能泰(진사 심능태)의 撰文(찬문)이고, [崇禎四壬申七月] 즉 23대 순조 12년(1812)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동남쪽 200m되는 산중턱의 작은 석축 위에는 남·북 각 1기의 석조부도가 모셔져 있다. 북쪽에 위치한 부도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나, 남쪽의 부도는 탑신에 [翫花塔(완화탑)]이라는 음기가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이 완화당탑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石鐘型(석종형) 부도이다.
이들 부도 2기는 구성양식이나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인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1994년 요사를 새로 지을 때 땅속에서 몇 점의 석조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사각의 蓮花紋石燈(연화문석등) 하대석과 8각의 불상 대좌, 활주석 3개 등이다. 현재 사찰 경내에 보관중이다.




☞ 찾아가는길 무을면 소재지에서 상주 방면 약 6km가면 도로 우측으로 '연악산 수다사' 안내판이 있으며, 이를 따라 가다 무을저수지 옆 오른쪽 도로로 접어들어 1.8km가면 된다.

현재 수다사에는 중수기록 등의 현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참고할 만한 기록을 현지에서는 볼 수 없고 다만 근년에 작성했다는 [水多寺略誌(수다사약지)]가 있을 뿐이다.
수다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에 [水多寺在淵岳山]이라 있고, {일선지} 불우조에 [水多寺在淵岳 于壬辰重建] 정도 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보자면, 수다사는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후 중건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사찰 규모와 남아 있는 건물들은 중건 당시의 건물들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수다사에는 법당으로 대웅전과 명부전,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동종, 석조부도 2기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수다사의 본당으로서 정면 3칸·측면 3칸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둥구리 기둥을 세워 집을 세웠다. 平柱(평주 ;건물주위기둥)는 민흘림이고, 高柱(고주 ;건물 내부의 기둥)에는 엷은 배흘림이 있는 듯 하나 나무를 돌려 써서 자연히 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둥 윗몸에 창방을 짜고 평방을 놓은 후에 多包系(다포계)의  包(공포)를 설치하였다. 공포는 건물 앞·뒷면에만 설치하고 좌·우 측면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다포계의 공포를 가진 집에 맞배지붕을 씌우려면 시공상 여러 가지 불합리한 부분이 생기기에 생략한 듯 하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도 우물천정이다. 단청은 錦(금)모루단청 문양으로 채색하였다.
수다사 대웅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평고대 연두 중앙에 木 (목예 ;나무꽃술)를 박은 점이다. 연화문의 子房(자방)을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한 장치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양식이다. 원래 건물의 양식은 이 부분에 기와로 구운 연화문막새를 달아야 하는데, 후에는 기와재질로 연꽃봉우리를 형상화하여 나타내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말기 정도에는 목예로 변화하였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보면 창방 좌·우 끝에 여러겹의 나무결을 오려서 乳頭形(유두형)으로 만들어 붙인 것이 있는데 이것을 목예의 원류로 보고 있다. 수다사 대웅전의 목예 양식도 이러한 것이다. 한편 인근 도리사 극락전에도 이러한 목예양식이 있어 구미·선산 지방 건축 양식의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후 중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각 부재 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17세기 초반에 재건되고 그후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웅전 안에는 본존불로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좌상은 본래 삼존상이었다고 한다. 사찰에서 말하기를, 이 법당은 본래 極樂殿(극락전)이었는데 근래 형편이 어려워 삼존중 협시보살 2구를 다른 사찰에 양도하고 중앙의 아미타본존만을 봉안하여 지금의 대웅전으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협시보살중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72호)은 선산읍 이문리 소재 圓覺寺(원각사) 圓通殿(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좌상의 腹藏物(복장물)로 발견된 [順治六年銘 水多寺佛像造成緣記(순치6년명 수다사불상조성연기)]에 의하면, 조선 인조 17년(1649)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어 그 조성연대가 뚜렷한 귀중한 불상이라 하겠다. 觀音菩薩(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다른 협시보살은 대구시 봉산동 棲鳳庵(서봉암)에 양도하였다고 하니, 이제는 이곳으로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명부전은 대웅전 동측의 법당으로서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집이다. 잡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의 주초를 놓고 둥구리 기둥을 세웠으며, 약화된 주심포계 공포에 다섯 개의 기둥을 설치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주존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좌·우에 보처존자 2구를 모셨다. 이외에도 이북에는 수문장 2구가 거친 인상을 하고 있고, 사자상이 좌·우 3구씩, 동자상도 좌·우 3구씩 배치되어 있어 마치 내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내부의 조형물들은 모두 그 양식상 17세기 중엽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명부전의 축조연대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건물 처마에 달려 있는 막새기와 중에서 [乾隆十三年戊辰三月日造]라는 명문기와가 보인다. 건륭13년은 1748년으로서 이 시기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의 내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수다사약지}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이 건물들은 고려 명종대(1171∼1197)에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건물 양식상 도저히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수다사의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 등에는 10여폭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대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웅전내 아미타불 후불탱화 ; [擁正九年辛亥] - 조선 영조7년(1731) 작.
② 대웅전내 주벽 탱화 ; [擁正九年辛亥] - 조선 영조7년(1731) 작.
③ 대웅전내 신중탱 ; [乾隆六十年三月日] - 조선 정조19년(1795) 작.
④ 대웅전내 탱화 ; [乾隆四六年辛丑] - 조선 정조5년(1781) 작.
⑤ 대웅전내 탱화 ; [嘉慶二十三年] - 조선 순조18년(1818) 작.
⑥ 명부전내 시왕탱 ; [乾隆三十六年] - 조선 영조47년(1771) 작.
⑦ 승방에 봉안된 탱화 ; [乾隆四年] - 조선 영조15년(1739) 작.
⑧ 산신각내 산신탱 ; [光武五年] - 1901년 작.


이 범종은 종각이 없어서 현재 대웅전 오른쪽 구석에 걸려있다.
정상부에는 쌍룡이 입에 여의주를 한 개씩 물고 있으며, 용이 교차되는 정상에는 큼직한 여의보주가 있다. 甬筒(용통)은 없는 대신 지름 1cm의 원공이 관통되어 용통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上帶(상대) 4군데에 32판의 연꽃안에 동일한 梵字(범자)를 양각하였다. 또한 범자 밑에는 원형 두광을 갖춘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보살사이에는 4군데에 사다리꼴의 乳廓(유곽)을 배치하고 안에는 9개씩의 乳頭(유두)를 圓刻(원각)하였다.
한편 명문이 있어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乾隆三十七年 壬辰三月 日 化主 又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善山西嶺淵岳山水多寺中鍾改造重二百斤也 三綱]
이 명문에 의하면 건륭37년에 범종을 수다사의 中鍾(중종)으로 개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 수다사에는 "大·中·小鍾"이라는 이름의 범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보다 큰 대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현재의 이 동종은 명문에서 밝히듯이 조선 영조48년(1772)에 조성된 것으로, 그 연대가 확실하므로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 유곽, 용뉴 등의 양식이 다른 범종 연구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대웅전 앞뜰의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있다. 사찰측의 말에 의하면, 본래 明月堂寺址(명월당사지)에 있었던 것을 이전한 것이라 한다. 이곳 연악산에는 골짜기마다 중암, 굴암, 금강대 등 많은 대·소암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명월당사지가 제일 큰 절터라고 한다.
명월당사지의 위치는 현재 수다사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속칭 [이신당골]이라 불리우는 평평한 임야와 경작지로 추정된다. 이곳 절터에는 옛기와편과 2단의 石築(석축),  石(연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삼층석탑의 원위치는 찾을 수 없다.
현재 석탑은 탑신 1석과 옥개석 3석만 남아 있다. 탑신석은 한면에 門扉(문비)와 자물통이 양각되어 있으므로 탑의 초층탑신임을 알 수 있겠다.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모두 3단씩이며, 낙수면의 급경사나 전각의 양식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3층 옥개석 윗면 중앙에는 方形(방형)의 擦柱孔(찰주공 ;탑의 상륜을 구성하기 위한 철심구멍)이 보인다.

명월당사지에는 2단의 石築(석축)이 남아 있는데, 아랫단이 윗단보다는 높은 편이다. 또한 자연석의 柱礎石(주초석)이 옛 건물의 배열대로 남아 있어 절터를 짐작할 수 있다. 동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본래의 [큰절터]이며 60여년전 대홍수로 건물이 파괴되고 완전히 폐사되었다고 한다. 윗단의 축대가 산등성이에서 밀려 내려온 토양으로 인해 거의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민들의 말이 사실인 듯 하다.
한편 경작지에서 동쪽으로 약 50m되는 산길변에 조선시대의  石연석〔맷돌〕이 남아 있다. 이 맷돌은 밑부분만 남아 있으나, 중앙에 圓臺(원대)가 있고 그 주위로 넓고 깊은 홈이 돌려져 있다.


수다사에서 200m쯤 되는 동쪽 산록에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다. 이 일대를 [부도골]이라 부르며, [부도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주변 경작지에서는 옛기와편과 청자편이 다수 발견되며, 축대에서도 몇 개의 장대석을 찾을 수 있다.
부도 2기는 원위치로 생각되며, 약 70년전에 현 상태로 복원한 것이다.
부도에는 각기 [白蓮堂秀裕大師(백련당수유대사)]·[守靜堂德渟大師(수정당덕정대사)]라 음각되어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들은 모두 조선중엽 이후에 많이 유행된 石鍾型 浮屠(석종형 부도)이다. 마치 '종'을 엎어놓은 듯 하기에 '석종형'이라 부른다. 대좌와 탑신석 상부의 意匠(의장) 및 연꽃의 조각 수법 등 조선시대작으로는 상당히 정제된 형태를 띠고 있다.



원각사 사찰내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나무로 만들어진 보살좌상으로 높이 111㎝로 전체적으로 약간 앞으로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다. 불상의 내부에는 다수의 복장유물이 들어 있다. 한지에 목판 인출한 {묘법연화경}과 {다라니경}이 대부분인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불상 조성기가 포함되어 있어 불상 조성의 내력을 알 수 있다.
이 조성기(가로 128cm, 세로 51.8cm)에 의하면 1649년 일선부의 서쪽에 위치한 연악산 수다사에서 조성된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가운데 하나인데 불상의 특징으로 보아 대세지보살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진다.




☞ 찾아가는 길 선산 일선교를 지나 상주방면 25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고개를 넘은 후,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소보방면으로 약 7km정도 가면 수철마을이 나온다. 법주사는 이곳에서 왼쪽 산 중턱에 있다.

법주사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군위군 소보면이지만, 주륵사지가 있는 청화산의 맞은편 골짜기로 도개지역과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또한 현재 전하는 {법주사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도리사와의 직선거리가 4km밖에는 되지 않기에 동일 불교문화권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혜철 주지스님에 의하면, 약 75만평의 사찰대지 곳곳에 건물초석이 산재하고 있으며, 현 법당인 [寶光明殿(보광명전)] 수리 때에 [道光二十八年 丁未七月 化主政豫瓦都藍永默]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1848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듯 하다.
보광명전 뒤편으로 견고한 축대와 그 밑으로 거대한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경내에 5층석탑과 석탑의 기단면석·연화대석·장대석·8각석재·대형맷돌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법주사 입구에는 높이 168.5cm의 고려시대 조성의 석불입상이 있다.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있는데 전·후에 각 2구, 좌우에 각 1구씩 모두 6구의 안상이 돌려져 있다. 석탑은 다른 탑의 일부 부재와 섞여서 복원되어 있는데, 기단부부터 3층 옥개석까지는 원 석탑으로 보인다. 석탑의 남면 1층탑신에는 문비가 양각되어 있고, [康熙三十年辛未三月一 重修]의 명문이 얕게 음각되어 있다. '강희 30'년은 곧 1691년으로서 고려시대의 건조된 이 석탑이 이 시기에 중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광명전의 기단 및 축대에도 탑재와 장대석이 보인다. 보광명전 기단 바로 앞에 4매의 기단면석이 표면만을 노출한 채 묻혀 있는데, 그 중 1석은 양우주와 탱주가 각출되어 있고 1매석은 우주 1주와 탱주 1주, 다른 1매석에는 탱주가 각출되어 있다. 보광명전 앞 화단에는 석등 하대석으로 보이는 복엽 8판의 연화대좌 1석이 놓여 있다. 앞마당에는 옛날 법주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형 맷돌이 놓여 있다.




☞ 찾아가는 길 해평면사무소에서 '낙성교'를 지나자마자 도문리 방향(동화사 표지판)으로 5.4km가면 동화사에 이른다.

베틀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동화사에는 최근에 신축한 대웅전과 기도원, 주지실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높이 6.5m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이 위치하지만 벽면에 새겨진 造像記(조상기)에 따르면 1972년에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화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30m쯤 떨어진 작은 동굴 안에 모셔진 석불좌상이다. 석불의 머리는 비록 없어졌으나,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의 手印수인과 右肩偏袒(우견편단)의 법의 등 양식적인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매우 古式(고식)임을 알 수 있다. 이 석불좌상은 비록 소형이나 당당한 가슴과 양 어깨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는 석불이 3기 있었는데 2기는 마을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또한 원래의 대웅전 터는 숲속에 따로 있다고 하지만 확인 결과 별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한편 대웅전 불단 밑에 작은 석조연화대좌가 보관중이다. 원형 8판연화대좌로서 연화문내에 작은 花紋(화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3중의 원형몰딩이 표현되었다.




☞ 찾아가는 길 선산에서 김천행 910번 지방도로를 이용, 감문-아포 사거리에서 김천방면 4.2km쯤 진행하면 906번 구미-아포행 지방도로와 만나는 개령면 동부리에 이른다. 이곳 버스정류장('개령건강원'을 이정표 삼을 것) 아래 체육공원이 있는데, 북쪽 산 아래 마애보살좌상이 위치함.

마애보살좌상은 현재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나, 암석의 절단으로 보아 원위치는 아닌 듯 하다. 암석의 전면을 다듬어 마치 광배를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원형은 龕室(감실)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머리에는 흡사 '남바위' 같은 冠(관)을 쓰고 있어 다른 마애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관 밑으로 살짝 엿보이는 길고 두툼한 귀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인은 가슴 앞에서 살짝 마주잡고 있어 합장상으로 볼 수 있겠다. 불상 전면의 마모가 심하여 法衣(법의)의 옷주름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부드럽게 흐르는 의문으로 미루어 유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조성시기는 대체로 고려시대로 생각된다.




☞ 찾아가는 길 선산에서 김천행 910번 지방도로를 타고 감포교가 있는 이천마을에서 감문방향 913번 지방도로로 우회전하여 3.1km 진행하면 광덕리 '광덕교'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족 포장길로 2.5km 진행, '광덕저수지' 아래 도달하면 길 왼쪽 경작지 너머 민가 한 채가 있고, 그 너머 보살입상을 안치한 보호각이 보인다. 혹은 무을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원리에서 좌회전하여 감문면 가척마을에서 다시 왼쪽으로 난 포장길로 광덕저수지를 찾아도 된다.

네모난 석주의 전면을 다듬어 조성한 이 보살상은 현재 보호각에 안치되어 있다. 관리인인 정영이氏씨(Tel ;430-5453)에 의하면, 수백년전부터 이곳에 자리하여 이 골짜기를 '미륵댕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위치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지형상 절터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혹 저수지 오른쪽 산중턱, 일명 '문수골' 절터에서 옮겨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塊體型(괴체형) 신체를 갖추고 있는데, 그 보관의 형태가 특이하다. 三山型(삼산형)의 보관은 구슬을 단 듯 둥근 원을 양각으로 가득하게 새겨넣었고, 冠帶(관대)가 길어서 원형 두광에까지 닿아 있다. 이러한 관대 양식은 강원도 한송사지·신복사지 보살상 등 주로 강원도 지방 불상의 양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주목된다.
원형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며, 손에는 연꽃봉우리를 잡고 있다. 조금은 과장된 얼굴 각부의 표현이나 신체비례에 맞지 않는 손, 연꽃으로 장식된 발등은 고려 초기 10세기 경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골' 절터에 사찰(문수사)을 창건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보살상을 이전·보존할 것이라 한다.




도개면 가산리에 위치하며 사찰이 언제 폐허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동리 입구에 거대한 석등·하대석이 방치되어 있다. 동리의 어느 집을 가나 사찰 석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산읍 생곡리 비봉산 동쪽에 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966년에 암자를 중건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2단의 석축과 주초석인 듯한 자연석이 2개 배열되어 있어 당시의 미봉사를 추측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비봉산이 善州府(선주부)와 관련하여 봉황이 나는 형상이므로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어 날지 못하도록 하는 裨補寺刹(비보사찰)로 추정된다.


도개면 다곡리 냉산 서쪽 석벽 위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묵호자가 모례의 집에 이르러 굴을 파고 살던 곳이라 하나 확실치 않으며 사찰이 폐허된 연대는 알 수 없다.


옥성면 초곡리에 있었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 절터 앞에 龍沼池(용소지)가 있으며, 못 아래 鯨谷(경곡)이 있다.


고아읍 대망리 접성산 기슭에 있다. 고아 봉한동 출토 여래·보살상 3구가 이곳 출토로 추정되고 있다.


石泉寺址(석천사지 ;고아읍 대망리 강장 남쪽), 崇巖寺址(숭암사지 ;해평면 송곡리 냉산 남쪽 숭암), 衆愛寺址(중애사지 ;해평면 금산리 조계산 상봉), 井池寺址(정지사지 ;해평면 창림리 조계산), 文殊寺址(문수사지 ;산동면 인덕리), 渤來寺址(발래사지 ;선산읍 독동리)


선산읍을 중심으로 사방 30리에 많은 사찰이 있었으니, 특히나 선산지방에는 거대한 일곱 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전하지 않으나, 죽장사 오층석탑이 그 대표적인 석탑일 것이다. 독동 북쪽 사지의 석탑, 생곡리 금당암 석탑〔탑이 묻혀있는 곳을 지금도 "탑밭"이고 함〕, 생곡리 미봉사 석탑 등이 일컬어진다.


선산읍 죽장리 새마을 사업장에서 흙을 파내다가 발견한 것으로, 이 석조유물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134cm, 높이 24cm, 폭 25cm의 크기로 오른쪽에는 남자불상이, 왼쪽에는 여자불상이 각각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양쪽에 새겨진 불상이 춤을 추는 형태로 문양이 특이하기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찾아가는 길 구미 제3공단을 따라 가다가 '옥계교' 직전에 우회전하여 4km쯤 가면 금전2동 와래마을과 교회가 보인다. 오른쪽 소로로 들어가다 다시 왼쪽 저수지로 길을 접어들면 약 600m정도에 위치한다. 바로 저수지 앞이다.

이 불상은 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좌상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얼굴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육계의 고부조와 어깨까지 닿은 두 귀, 광배의 조각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으로 보인다.


법성사는 1970년대에 창건된 태고종 사찰로서, 경내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이 주목된다. 이 불상은 1840년경 구미시 송정동 정민기씨의 5대조 할아버지 꿈에 나타나 아침 일찍 원남동 781번지 일명 '부처골' 논 가운데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는 화강암의 불상으로서 머리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현재는 흰색 시멘트로 전체를 정비하여 제작 방법이나 원 양식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통일신라시대 조성으로 추정된다.




옥계동에서 임봉초등학교 앞으로 난 도로를 거쳐 25번 국도를 만나기 직전 고개길에서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면 봉산리 [학사]·[숭지]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동북방 1km지점 산중턱에 높은 광배를 가진 여래좌상이 1구 남아 있다. 본래 삼존불상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좌협시불만 파손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선산읍 죽장리 이정희씨가 죽장리 뒷산에서 사방공사중 발견한 불상인데,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손에 약병처럼 보이는 것을 치켜든 것이 특징이며, 전신에 새겨진 문양이 섬세하게 원형대로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경주박물관에 보관·조치하였다.


산동면 임천리 속칭 '부처뱅이'. 옥계동에서 임봉초등학교 앞으로 난 도로로 약 3.5km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부처방'마을 들어가는 소로가 나온다. 앞서 서술한 봉산리 [학사]마을 직전 마을이다.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 서쪽에 있는 오봉산을 '부처방'이라 하고 예전에는 불상이 있었다 한다. 답사 결과 뒷산 서쪽면에 여러개의 龕室(감실)이 있으나, 석불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재 아포초등학교 교정에 옮겨져 있는 이 좌불상의 안면은 많이 훼손되어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며 오른쪽 어깨 부분도 많이 훼손되었다. 법의는 通肩(통견)이며, 수인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고, 결가부좌하였다. 광배는 현재 갖추지 않았으며, 육계는 있으나 나발은 분명치 않다. 불상의 높이 77cm, 어깨 폭 60cm.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구미대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개설된 67번 도로를 따라 반달교와 왼편 OB맥주공장을 지나 동양청정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뒷산을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산에 오르면 마애불상에 관한 안내판이 있으나, 안내자 없이는 찾기가 어렵다.(본존불 : 높이 360, 어깨폭 120)
또한 OB맥주공장 이전에 위치한 삼성코닝 사잇길로 가면 '이보선생거사비'가 있는 계단을 오를 수 있다. 거기에서 오른쪽 배수로를 따라 700m쯤 가면 "유학산마애여래석불 세심사복원추진위원회"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 거대한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 동쪽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곳의 마애삼존불상은 {일선지}나 최근 발행된 {문화유적총람} 등에도 전혀 기록이 없는 불상으로서, 구미·선산 낙동강 유역의 불교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동민들은 예전부터 이 일대를 '부처골'이라 일컬어 왔으나, 불상의 위치때문인지 최근까지도 그 존재를 잘 몰랐던 듯 하다.
하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석은 넓이 8.5m, 높이 4.8m, 두께 3∼4m인데 동쪽의 암벽을 4.5m 넓이로 다듬고, 중앙에 본존불을 모시고 그 좌우에 보살상을 1구씩 협시로 배치하였다. 沙質(사질)이 섞인 화강석으로 인해 지면과 가까운 불상 하단부에는 파손과 마모가 심하여 전체적으로 세부조각을 살필 수는 없으나, 자료 조사 차원에서 현 상태를 서술하겠다.
중앙 本尊佛(본존불)은 머리 정상에 육계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如來像(여래상)으로 생각되며, 寶珠型 頭光(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있다. 法衣(법의)는 通絹(통견)으로 가슴에서 길게 둥근 호를 그리며 흘렸고, 衣紋(의문)은 모두 굵은 띠로 표현하여 당당한 양쪽 어깨와 잘 어울리어 오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手印(수인) 역시 施無畏·與願印(시무외·여원인)이라는 삼국시대 양식으로 표현되어 시대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코와 입 등을 보수하여 고대불상의 얼굴에서 보이는 순박한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
右挾侍菩薩像(우협시보살상)은 암석의 파손으로 머리의 보관부분이 거의 다 없어졌으나, 원형두광을 갖추고 있다. 중앙본존을 향해서 좌측을 향한 측면상을 취하였으므로 얼굴 우측면을 보이고 있다. 寶冠(보관)의 하단부에는 下帶(하대)와 花紋(화문) 등의 장식이 보이며, 특히 콧날이 오똑하고 코끝이 숙여져 이국적인 모습이다. 수인은 측면상이므로 본존을 향하여 공양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左挾侍菩薩像(좌협시보살상)은 중앙본존을 향하여 우측으로 향하였으므로 좌측면을 보이고 있다. 역시 원형두광을 갖추고 머리에는 높직한 보관을 쓰고 있다. 수인은 측면상이므로 본존상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공양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분간하기 어렵다. 다만 본존을 향한 안쪽 어깨높이 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서 寶珠(보주)같은 지물을 받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삼존불의 양식 - 본존불의 양 미간, 통견법의, 圓弧(원호)형의 굵은 띠로 처리된 옷무늬, 시무외·여원인의 수인, 좌·우협시보살상의 보관이나 상호 등 - 을 종합해 볼 때 삼국시대의 양식을 잘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는 대개 7세기 삼국시대인 신라의 조성으로 추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편 삼존상이 조각되어 있는 암벽에서 앞쪽으로 3.5m 되는 좌측 옆에는 큼지막한 판석(170cm×80cm)하나가 놓여있으며, 삼존상 앞 대지에서 삼국시대 평기와편이 몇 점 수집되어 목조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 찾아가는길 선산에서 일선교를 지나 다시 25번 상주행 지방도로를 타고 고개를 넘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소보방면으로 향한다. 약 11km정도 가면 달산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소보면소재지쪽으로 접어들지 말고 왼쪽으로 약 100m정도 진행하며 길 왼쪽 암벽을 살핀다.

정남향의 암벽면 높이 8m 되는 곳에 양각해 만든 군위 마애삼존불은 붉은 색을 주로 하고, 얼굴과 옷, 광배 등을 녹색과 황색, 검정색 등 최소한 5가지 이상의 색으로 채색하여 주목된다. 중국 돈황석굴 불상의 경우 전체적으로 채색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고대 채색불상이 발견된 적은 없다. 이 마애삼존불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여 신라인의 지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애삼존불 바로 위에는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천장 역할을 하도록 하여 자연풍화를 최소화하고 있다. 본존 바로 위 바위 바닥면에는 석굴의 천장 중앙을 장식하는 연꽃무늬의 天蓋(천개)가 붉게 채색되어 있다. 삼존불 주변에도 붉은 연꽃무늬를 8개 정도 둘러싸듯이 장식했다.
불상 높이는 본존 250cm, 좌협시불은 193cm, 우협시불은 220cm이다. 모두 연꽃대좌 위에 선 입상으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길 칠곡군 왜관읍에서 낙동강을 건너 성주행 차도로 약 4km쯤 가다가 왼편 낙동강 쪽으로 접어들어 강가를 따라 지방소로로 2km쯤 가면 되는데, 이곳 노석동에서 주민들에게 도고산이라 하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 불상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주민들의 기억은 전무한 상태이나, 현지 주민들의 제보로 인해 1977년 12월 조사가 이루어졌다.
불상들은 거대한 화강암의 동북쪽 1면을 폭 3.5m, 높이 3m 정도로 다듬고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는 三尊佛(삼존불)과 그 왼쪽의 如來坐像(여래좌상)이 있는데, 아마도 삼존불이 중심이고 여래좌상은 별도의 배치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삼존상은 중앙에 阿彌陀如來坐像(아미타여래좌상 ;높이 140cm)을 본존으로 모시고, 좌우에 각각 觀世音菩薩坐像(관세음보살좌상 ;높이 90cm)과 大勢至菩薩坐像(대세지보살좌상 ;높이 80cm)을 挾侍佛(협시불)로 배치하였다. 삼존상은 神聖(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두 身光(신광)과 頭光(두광)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이중의 선으로 처리된 두광이 주목된다. 한편 單葉伏瓣(단엽복판)의 蓮華臺座(연화대좌)는 큼직한 연꽃잎의 풍만함과 잎 끝단의 날카로움의 조화에서 통일신라 직후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된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신광은 양쪽 무릎 부분에서부터 두광까지 올린 火焰擧身光(화염거신광)이다. 머리는 큼직한 육계를 갖춘 素髮(소발)이며, 相好(상호)는 대체로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려우나,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耳朶(이타 ;귀의 늘어진 아래부분, 흔히 '귓밥')부분이 타원형으로 뚫어져 있다. 이러한 귀의 형태는 삼존상과 옆의 여래좌상도 마찬가지이다. 본존의 衣紋(의문)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오른쪽 어깨 위에 겹쳐진 형식의 의문으로서 한국의 불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른쪽 수인은 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대좌는 연화좌를 갖추고 있다.
왼쪽 관세음보살좌상은 본존상을 향한 측면상으로서 왼쪽 귀만이 보인다. 머리에는 세 개의 연꽃봉오리 장식이 보이는 寶冠(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아래로부터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내려져 있다. 상호는 눈매만이 확실하다. 오른손은 눈높이까지 들어 본존에게 연꽃 공양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쪽에 들어 연봉이 있는 가느다란 연꽃 줄기 하나를 잡고 있다. 한편 가슴에는 通肩(통견)의 굵은 天衣(천의) 띠 외에는 동체의 오른쪽 중간 부분이 크게 파손되어서 어떠한 양식의 衣紋(의문)이 펼쳐져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오른쪽 대세지보살좌상 역시 본존상을 향한 측면상으로서 오른쪽 귀만이 보인다. 관세음보살좌상과 같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通肩 法衣(통견 법의)를 입고 있다. 왼손은 어깨높이에서 주존을 향하여 연꽃을 공양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손끝을 본존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보살상은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나, 발목을 X자형으로 교차시킨 이른바 交脚像(교각상)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조사된 예가 없어 주목된다.

또 하나의 여래좌상(높이 115cm)은 대세지보살상 바로 옆에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도 삼존상의 두광과 같은 넓직한 이중두광이 갖추어져 있다. 정면상을 취하고 있으므로 獨尊(독존)임을 알 수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통견 법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 겹쳐진 의문이 보이는 통견 법의를 입고 있다. 수인은 오른쪽 손을 가슴에 들고 왼쪽 손은 왼쪽 무릎에 내린 듯 하나 암면의 파손으로 인해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여래상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어딘가에 걸터 앉은 듯한 자세로서 安坐(안좌) 혹은 遊戱坐(유희좌)로 불리운다. 이는 대세지보살의 교각자세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이한 자세이다. 오른쪽 다리는 왼쪽보다 더 내리고 발끝을 연화좌 위에 놓고 있다. 왼쪽 다리는 결가부좌에서 약간 흐트러진 채 오른쪽과 같이 발끝을 밑으로 향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삼존상과 독존의 여래좌상을 살펴보았는데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동시에 조성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마애불들은 암벽 전면에 붉은 색채가 보이고 있고 간혹 녹색과 청색의 흔적도 보여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마애불 앞에는 홈이 파여진 초석과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어 木造前室(목조전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연화대좌의 양식 등 각부 수법에 있어서 삼국기 신라의 흔적이 보이기에 인근 팔공산 군위삼존석굴이나 군위 소보 마애불, 구미 진평동 마애삼존불 등과 유사한 7세기 후반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천연 절벽의 자연동굴 속에 만들어진 이 석굴 사원은 인공적 석굴 사원인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석굴보다 조성된 연대가 앞선 것으로, 1962년 발견 조사된 이래 '제 2석굴암'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석굴사원 안에는 서기 700년경에 조성된 삼존석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석굴 앞에는 절터가 있어 模塼石塔(모전석탑)과 石造毘盧遮那佛坐像(석조비로자나불좌상), 柱礎石(주초석) 등이 남아 있다.
삼존석불 중 좌협시보살〔관세음보살, 1.92m〕의 머리에는 化佛(화불)이 있고, 우협시보살〔대세지보살, 1.8m〕의 머리에는 寶甁(보병)이 있어서 이들이 아미타삼존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신앙은 통일신라 직후부터 유행하였는데 이 석불들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룩된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석굴의 입구는 거의 원형에 가깝고 굴안 평면은 대체로 方形(방형)을 이루었다. 천정은 穹 形(궁륭형)을 이루었고 안쪽 벽에 붙여서 圓刻(원각)의 삼존을 안치하였다.
중앙의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2.88m로서 별도로 만들어진 사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素髮(소발)의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으며, 법의는 通肩(통견)으로 얇게 표현되어 있다. 더구나 간결한 衣紋(의문)은 넓은 무릎과 대좌 전면까지 덮은 裳懸座(상현좌 ;마치 치마가 드리워진 것 같은 모양)를 이루고 있다. 한편 본존불을 중심으로 한 안쪽 벽에는 두광과 신광을 조각하였다.
立像(입상)인 협시보살들은 좌·우상이 거의 같은 양식이지만 좌협시보살에는 별도의 광배가 있으나, 우협시보살은 일찍이 없어진 듯 하다. 머리에는 각각 화불과 보병을 조각한 三面冠(삼면관)을 썼고, 寶髮(보발)은 두 어깨로 늘어졌다. 가슴 앞에는 장식성이 가미된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차고 있다. 목에는 三道(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상반신은 벗고 있다. 두 손은 서로 반대로 되어 좌협시보살은 왼손으로 정병을 쥐고 있으며, 우협시보살은 오른손으로 지물을 잡고 있으나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좌협시보살의 寶珠型 頭光(보주형 두광)은 중심에 연꽃과 그 주위에 唐草紋(당초문), 火焰紋(화염문)을 얕게 조각하였다.
이들 삼존의 조각은 본존불의 당당한 체구와 보살의 三曲姿勢(삼곡자세 ;신체를 세 번 틀은 자세)에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려했으나, 아직 사실성은 부족한 듯 하다. 석굴의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자연굴 안에 불상을 봉안한 점은 중국의 석굴 양식의 東漸(동점)과 그것이 경주 토함산 석굴에까지 이른 경로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라 하겠다.




Ⅱ. 유교관련 유적·유물


☞ 찾아가는 길 선산읍 버스터미널에서 상주 방면 33번 국도를 따라 약 600m 진행하면 도로 왼편으로 안내판이 나오고, 비봉산 중턱 아래 향교가 보인다.

비봉산 기슭 아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듯 한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그 후 선산부사 金湧(김용)·沈倫(심륜) 등이 각각 1600년, 1623년에 재건하였다.
향교는 조선 최고국립대학격인 성균관을 모방한 것으로 孔子(공자)와 先賢(선현)을 제사하고 그 가르침을 받는 지방교육기관이다. 선산향교는 공자를 비롯하여 顔子(안자)·曾子(증자)·子思子(자사자)·孟子(맹자) 四聖(사성)의 위패를 '大成殿(대성전)'에 보시고, 그 아래 '東·西 (동서무)'에는 十哲(십철)·송나라 六賢(육현)·우리나라 18賢(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 앞에는 강당의 기능을 하는 '明倫堂(명륜당)'이 있고, 좌우에는 '溫古齋(온고재)'·'學習齋(학습재)'가 있다. 그 아래 '南樓(남루 ;菁莪樓청아루)'와 '東·西齋(동서재)'가 위치한다.
현재 東西 (동서무)·敎官衙(교관아)·典祀廳(전사청)·廚庫(주고) 등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大成殿(대성전)·明倫堂(명륜당)·菁莪樓(청아루) 3棟(동)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구미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건물임. 동락서원도 바로 옆에 위치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의 學校條(학교조)에 의하면, "인동의 북쪽 2리에 향교가 있고, 朴瑞生(박서생)의 記文(기문)이 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조 36년(1760) 간행된 {輿地圖書(여지도서)}의 인동향교조에 의하면, "황상동 御雲山(어운산) 아래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 안태동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인조 12년(1634) 경상감사 李基祚(이기조)의 청으로 다시 인의동으로 옮기고, 1635년에 位牌(위패)를 봉안하였다." 현재 위치로 이전·중수한 것은 1988년이다.
이 향교는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前學後廟型(전학후묘형)으로 경내에는 대성전과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高設三門〔고설삼문 ; 神門신문〕, 명륜당, 출입문 등의 건물, 동·서 회랑까지 갖추고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板額(판액)은 朱子(주자)의 글씨라 전한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기둥을 갖춘 맞배양식의 건물이다.
향교의 釋奠祭(석전제)는 본래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행하는 것이나, 이곳에서는 현재 공자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7일 한차례만 행하고 있다.
한편 향교 정문 좌우에는 인동 각처에 흩어져 있던 역대 縣監(현감)과 府使(부사)의 善政碑(선정비), 不忘碑(불망비), 去思碑(거사비) 등이 세워져 있다.
仁同府使金應祖去思碑(인동부사김응조거사비,1642)
仁同府使李義培淸德善政碑(인동부사이의배청덕선정비)
御使李萬植永世不忘碑(어사이만식영세불망비, 1879)
仁同府使李敎駿永世不忘碑(인동부사이교준영세불망비, 1880)
觀察使李相國永世不忘碑(관찰사이상국영세불망비, 1896)
仁同縣監柳雲龍善政碑(인동현감유운룡선정비)




☞ 찾아가는 길 선산읍 초입에 있는 유공 신진주유소 앞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33번 국도를 따라 0.7km가면 길 왼쪽으로 금오서원 표지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4.7km가면 원1리 새마을 회관이 보이고 회관 바로 못미처 왼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있다. 승용차는 서원까지 갈 수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 3년(1570) 冶隱 吉再(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오산 아래〔현재 金烏池(금오지)〕에 건립한 것이다. 길재 선생은 牧隱 李穡(목은 이색),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말 三隱(삼은)으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1575년 '금오서원'으로 賜額(사액)과 書冊(서책)이 하사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선조 35년(1602) 善山府使 金涌(선산부사 김용이 현위치로 옮겨 지었다. 그 후 광해군 원년(1609) 다시 사액되어 중수되었다.
금오산에 있을 때는 길재 선생만을 享祀(향사)했으나, 이전 후에는 이 고장 출신이거나 이곳과 관련이 있는 김종직·정붕·박영·장현광 다섯 분의 유학자〔이들을 일러 '善山五賢(선산오현)'이라 함〕를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 丁日정일 두 차례 제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개 서원만을 남기던 서원철폐령 때도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었다.
서원은 산비탈의 좁은 터를 이용하여 세워진 탓인지 계단식으로 터를 닦고 총 다섯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다락집  淸樓(읍청루) 좌우에 宿舍(숙사)인 東齋(동재)와 西齋(서재)가 위치하고, 이보다 한 단 높은 대지에 강당인 正學堂(정학당)이 자리하였다. 정학당을 돌아 三門(삼문)을 지나면 다시 한 단 높인 대지에 文廟(문묘)의 大聖殿(대성전) 격인 尙賢廟(상현묘)가 터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를 前學後廟(전학후묘)의 구조라 하며, 누각과 강당·사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있는 매우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글은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정학당 대청 안쪽 벽에 붙은 현판이다. 점잖키만 한 옛 선비들에게도 이런 구석이 있었음이 오히려 친근하게 여겨진다.
한편 금오서원 읍청루 앞에는 신묘년 7월에 세운 [府伯金公思轍頌功碑(부백김공사철송공비)]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로서 본관은 海平(해평), 자는 再輔(재보), 호는 冶隱(야은) 혹은 金烏山人(금오산인)이다. 고아읍 봉계리(지금의 봉한리)에서 태어나 11세에 냉산 도리사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색·정몽주·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1398년에는 門下注書(문하주서)가 되었다. 그러나 장차 고려조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이듬해 봄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명분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조선이 건국된 뒤 정종 2년(1400) 함께 수학하던 세자 방원(조선 태종)이 불러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신이 듣건대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고 했습니다.……"라고 글을 올려 허락을 받고 향리로 돌아왔다.
훗날 유학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이 고려 말 성리학을 체계화한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道統說(도통설)'을 정립하여 길재를 두 번째로 들고 있다. 이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참다운 隱者(은자)로 일생을 마친 점,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범절을 철저히 실행한 점, 그리고 후진 교육을 통해 성리학의 정통이 계승되도록 한 점 등을 평가한 때문이다.




☞ 찾아가는 길 구미시내에서 구미대교를 건너자마자 도로 왼편에 위치. 인동향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강 아래길로 내려간다.

낙동강변에 자리한 이 서원은 조선 인조때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성리학자 旅軒 張顯光(여헌 장현광 선생)의 영정을 봉안·향사하며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경내에는 景德廟(경덕묘), 中正堂(중정당), 允壤齋(윤양재), 神道碑閣(신도비각)과 출입문인 遵道門(준도문) 등이 있다. 동락서원의 연혁에 관해서는 {仁同邑誌(인동읍지)} 學校條(학교조) 및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祠院條(사원조) 등이 참고된다. 1601년 '不知巖精舍(부지암정사)'를 창건하여 선생이 사용하다가 효종 6년(1655) 서원을 건립, 숙종 2년(1676) '동락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고종 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32년에 중건하였다.
'東洛(동락)'이라 함은 東方(동방)의 伊洛(이락)이란 뜻이다. 현재 서원내에는 여헌 선생의 유물인 가죽신, 삿갓, 우의대 등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서원 옆에 2개의 바위가 포개어져 있는데, '天淵臺(천연대)'라는 刻字(각자)가 있다.




☞ 찾아가는 길 해평면소재지의 낙성교에서 낙동강쪽으로 안내판이 있다. 거리는 약 1.1km.

조선 인조 24년(1646)에 江湖 金叔滋(강호 김숙자), 眞樂堂 金就成(진락당 김취성), 龍巖 朴雲(용암 박운) 등 세 분을 모시다가 그후 久庵 金就文(구암 김취문), 杜谷 高應陟(두곡 고응척) 두 분을추가로 모시어 총 다섯분을 향사하고 있다. 정조 11년(1787) 사액되었으나, 고종 5년 훼철되었다. 1977년 다시 세웠다.




정조 16년(1792) 察訪 金宗武(찰방 김종무), 臥遊堂 朴晋慶(와유당 박진경) 등 5분을 모심. 고종 5년 서원철폐령시 훼철.


순조 7년(1807) 判書 吳湜(판서 오식), 孤山 黃耆老(고산 황기로) 등 5분을 모심. 고종 5년 서원철폐령시 훼철.


경락서원에 모신 塤齋 尹弘宣(훈재 윤홍선)을 모심.


헌종 9년(1843) 중건하여 栗谷 李珥(율곡 이이)와 그 동생 玉山 李瑀(옥산 이우)를 모심. 고종 5년 서원철폐령시 훼철.


숙종 18년(1692) 중종때 張潛(장잠)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 고종 8년 훼철.


영조 연간에 고려말 충신이던 松隱 張安世(송은 장안세)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


인조 8년(1630) 籠巖 金澎(농암 김팽), 丹溪 河緯地(단계 하위지), 耕隱 李孟專(경은 이맹전) 세분을 모심. 숙종 20년 월암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고종 5년 훼철된 후 지금은 '월암정'만 있다.

인조 25년(1647) 해평리에 松山祠(송산사)를 건립하였으나, 효종 7년(1656) 창림리로 이건하고 屛庵 金應箕(병암 김응기), 敬庵 盧景任(경암 노경임) 등 여섯 분을 모심. 고종 5년 훼철.


효종 원년(1650)에 性庵 田佐命(성암 전좌명), 玉山 李瑀(옥산 이우),  亭 田胤武(가정 전윤무)를 모심. 고종 5년 훼철.


정조 20년(1796) 遯峰 金寧(둔봉 김녕)을 모심. 고종 5년 훼철.


정조 22년(1798) 幕華齋 金善初(막화재 김선초) 등 네 분을 모심. 고종 5년 훼철.


松岩 盧守誠(송암 노수성), 盧景必(노경필), 盧景倫(노경윤)을 모심. 고종 5년 훼철.


현재 淸風齋(청풍재)만이 남아 있고, 1948년 3월 도량동으로 이건되었다.


新堂 鄭鵬(신당 정붕) 선생의 講學(강학)장소로 경내에는 祠堂(사당)과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이 건물은 지금의 선산초등학교 부근에서 客館(객관)으로 쓰던 건물을 옮겨온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내력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5량 팔작지붕 건물이다. 객사의 지붕 용마루에는 네 마리의 사자를 안치하였다.
{일선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一善(일선)은 옛부터 큰 고을로서 고려의 충신 길재가 머문 곳이며, 고려의 후삼국통일 때 격전지였기에 수없이 많은 빈객이 찾아들었다. 이에 그들이 머물만한 처소를 마련하는 것에 고심하게 되었다. 北館(북관)은 좁고 너절하여 성종 23년 府使 宋侯出(부사 송후출)이 옛터에 새로이 집을 짓고 단청을 하니 몇 달 후 완성되었다. 그 경관이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장엄하니 모두들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새로이 지은 客館(객관)이 北館(북관)을 고쳐 지은 것인지 아니면 완성 후 南館(남관)이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비록 현재의 객사는 남관에서 옮겨 왔다는 일화가 전하기는 하나 북관의 한 건물을 옮겨온 것인지, 남관을 옮겨 온 것인지 알 수가 없겠다.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선산읍 진입시 석탑이 있는 화단 뒷편.

선산읍 입구 유공 신진주유소 앞을 지날 때면 즐비하게 늘어선 비석들과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삼층석탑은 교리 비봉산의 죽림사지에 남아 있던 석탑의 부재를 1979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시킨 것이다. 자세한 것은 원동 사지(죽림사지)를 참조하길 바란다.
현재 총 23座(좌)의 비석이 전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가 이곳 선산지방에 부임해 온 역대 부사들의 頌德碑(송덕비)로서, 원위치인 것도 있으나 옮겨온 것이 대부분이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사무소 앞에서 무을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단계교' 직전에서 우회전하여 250m 가면 오른족 가옥 뒤('단계식당' 옆) 보호각에 위치한다.

이 碑(비)는 조선 단종 때 死六臣(사육신)의 한사람인 丹溪 河緯地(단계 하위지 ;1387∼1456) 선생의 遺墟碑(유허비)이다. 비의 앞면에 碑銘(비명)만 기록되어 있고 碑文(비문)이 없어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경 야은 길재·농암 김주·경은 이맹전 선생의 유허비와 같이 당시 善山府使(선산부사)가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단계 선생은 1387년(고려 우왕 13년) 선산 이문리〔영봉리〕에서 출생, 조선 세종 20년 문과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수양대군이 예조참판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묘소는 선산읍 죽장리에 있다. 字(자)는 천장, 號(호)는 단계, 本貫(본관)은 진주이다.




☞ 찾아가는 길 구미시 순천향병원이 위치한 동-서도로에서 옛 동국여상 옆 남-북도로를 통해 끝까지 진행하면 오태동에 이른다.('성안합섬'을 이정표로 삼는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꺽어 오태교를 건너 다시 왼쪽으로 약 100m진행(오태슈퍼)하면 낙동강변으로 '지주중류비'가 위치한다.

마을 우측 산록에 '길재' 선생의 묘가 있다.
조선 선조 20년(1587) 仁同縣監(인동현감)으로 부임한 謙庵 柳雲龍(겸암 유운룡 ;서애 유성룡의 형)은 야은 선생의 묘를 찾아 동쪽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충효당과 두칸짜리 방을 지어 동쪽은 明城(명성), 서쪽은 直方(직방)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東·西齋(동서재)와 淸風樓(청풍루)까지 갖추어 '吳山書院(오산서원)'이라 했다. 고종 5년 훼철되고 지금은 강당만 복원되어 '오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서 낙동강이 바라뵈는 언덕에는 砥柱中流碑(지주중류비)라는 큰 글자가 사람을 위압하며 서 있다. '지주중류'는 중국 하남성 협현 황하강 중류에 위치한 기둥과 같이 생긴 砥柱山(지주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중국 순임금과 우임금의 설화가 어린 곳이다. 또한 중국 은나라 충신 伯夷·叔齊(백이·숙제)의 굳은 절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겸암 유운룡이 야은 선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지주비 묵본을 얻어 비 전문에 새겼으니, 중국 양청천의 글씨로서 사람을 위압하는 듯한 명필이다. 뒷면의 陰記(음기)는 유운룡의 아우 유성룡이 홍문관제학 당시 썼다. 지금의 碑(비)는 선조 당시의 것은 아니고, 정조 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 찾아가는 길 현재 현일고등학교에서 선산방면으로 보면 육교를 지나 교통신호등이 있는 작은 사거리가 있다. 여기서 오른쪽 소로를 이용, 낙동강까지 가면 '강정마을'이 나오며, 마을 끝 낙동강가 언덕에 위치한다.

이 정자는 寶泉灘(보천탄) 언덕 맞은편 '江亭(강정)'이란 곳에 위치하며, 그 뒤 야트막한 산은 '孤山(고산)'이라 한다. 이곳은 "草書(초서)의 聖人(성인)"이란 칭호를 받은 孤山 黃耆老(고산 황기로)선생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황기로는 조부 필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梅鶴亭(매학정)]이라 하였다. '매학'의 연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 송나라때 선비 林逋(임포)는 西湖(서호)의 '孤山(고산)' 아래 집을 짓고 맑은 생활을 하며 20년동안 사람을 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매화를 많이 심고 학을 많이 길러 매화로써 아내를 삼고 학으로써 자식을 삼았기 때문에 뒷날 '梅妻鶴子(매처학자)'라는 문자까지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선생도 '孤山(고산)' 아래 '매학정'을 짓고 스스로 號(호)를 '孤山'이라 부르며, 세상명리와 벼슬을 탐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평생을 隱者(은자)로 살았다.
이 정자는 고산이 죽은 뒤 고산의 사위인 玉山 李瑀(옥산 이우)의 소유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아들 없는 고산의 제사는 옥산과 그의 자손들이 받들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효종 5년에 옥산의 증손자 鶴汀公 東溟(학정공 동명)이 옛 터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와 새 정자를 중건하니, 강이 가까워 한결 더 풍경이 좋았다. 다시 철종 13년(1862) 화재로 없어졌던 것을 중건하였다.
한편 매학정 부근에는 栗谷 李珥(율곡 이이)와 그 동생 玉山 李瑀(옥산 이이)를 모신 '梅江書院(매강서원)'이 있었다.



해평면 해평리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너편은 고아읍 江亭(강정)으로 강정나루(江亭津)가 있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보천탄은 해평면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인데, 매년 봄·가을이면 배가 이곳까지 와서 물건을 팔고 돌아간다(寶泉灘 在海平縣西五里 海商每春秋泊船于此 販 以歸)"는 기록이 있으며,  畢齊(점필제)의 [善山十節詩(선산십절시)]에도 이곳이 옛날 해상 교통시에는 큰 시장을 이룬 명승지였다고 적어 놓고 있다.
지금도 松林(송림)이 하늘을 가리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매년 여름이면 휴양객이 많이 몰려 들고 있다. 바로 앞에는 筆聖 孤山(필성 고산)이 세운 梅鶴亭(매학정)과 낙동강의 맑은 백사장이 명사십리를 이루고 있다.




☞ 찾아가는 길 25번 국도의 한화에너지 해평주유소에서 해평리로 가는 마을길을 따라 약 1km가면 있다. 청소년 수련관과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4번 도로를 따라 1.6km가면 길 오른쪽에 해평리로 들어가는 마을 골목길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약 500m정도 직진하면 된다.

'北厓宗宅(북애종택)' 혹은 '北厓古家(북애고가)'는 최종석씨 가옥으로, 약 400여년 전 이 고을에 정착한 입향조 儉齋 崔水智(검재 최수지)의 후손이 건립하였다. 건립 연대는 사랑채의 상량문에 "崇禎紀元後 三戊申四月 初二日 午時 立佳"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정조 3년(1779)임을 알 수 있다. 본래는 사당채·안채·안대문채·사랑채·대문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구성된 조선후기 지방 상류가옥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안대문채·사랑채·사당채만 남았다.
이 고가의 몇가지 특이한 점을 보면, 평탄한 지형 조건을 바탕으로 안채 중심의 대청을 동북으로 시원스럽게 배치하였고, 안방·부엌·안사랑 등은 모두 동남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는 '□'자형 가옥의 단점인 일조 불량을 극복할 수 있는 시설로서, 한편으로는 사랑채와 사랑마당, 안사랑채와 안사랑마당, 안채와 안마당 등의 내외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또한 사랑채 뒷부분에 장지문을 달아 필요하면 마루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점도 보기드문 수법이다. 특히 사랑채의 뜰을 쌓은 전돌은 주거공간의 운치를 더욱 더하고 있다.
이 가옥을 '북애종택'이라 하는 것은 바로 길 건너 '쌍암고가'에 살던 형이 북쪽 언덕에 동생을 위해 이 집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雙岩古家(쌍암고가)' 역시 1779년에 지어진 것으로, 대문채·사랑채·안채·중문채로 구성된 조선후기 대표적인 지방 상류층 가옥이다. 안채와 중문채는 '□'자를 이루고, 안채는 6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정남향으로서 정면 4칸, 측면 3칸반으로 동편에 4칸의 온돌방이 '田(전)'자 형으로 붙어 있어 일자형의 겹집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대문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큰 바위 두 개가 집 앞에 있어 '쌍암고가'로 불린다.




☞ 찾아가는 길 구미시에서 33번 도로를 이용, 선산방면으로 오면 고아향토부대를 지나 약 500m 지점에 도로 왼편 경작지에 위치한다. '봉한 삼우힐타운'을 이정표 삼으면 될 것이다.

'三綱(삼강)'은 임금과 신하간의 '忠', 아버지와 자식간의 '孝', 남편과 아내 사이의 '烈'을 말한다. '旌閭(정려)'는 충신·효자·열녀를 나라에서 표창하여 마을 입구에 세운 징표이다. 곧 봉한마을 출신의 충신·효자·열녀 세 분의 정려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충신은 '길재' 선생으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금오산 아래에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현재 정려각 왼쪽에 '高麗忠臣吉再之閭(고려충신길재지려)'비가 있다. 효자는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한 '배숙기'인데 역시 봉한이 고향이다. 현재 정려각 가운데 '孝子弘文著作裵淑綺之閭(효자홍문저작배숙기지려)'라는 흰색 현판이 있다. 열녀는 당시 봉한에 살았던 조을생의 아내 '약가'인데 남편이 왜구에게 잡혀간 이후 8년을 하루같이 남편만 기다리며 살았다고 한다. 후일 많은 선비들이 야은 길재 선생의 감화를 받아 '약가'의 정절이 높았다고 칭송하였다. 현재 정려각 오른쪽에 '烈女趙乙生妻藥哥貞表(열녀조을생처약가정표)' 비가 위치한다.


동남으로 배고개(梨峴), 서남으로 쌀고개(米峴), 동북으로 가마고개(釜峴), 북으로는 蓬谷(봉곡)과 網張(망장) 고개를 넘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이곳이 '들성'이란 동네이다.
고아읍 원호리·문성리가 분지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뒷산은 구름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미는 형상이다. 푸른 송림이 우거진 앞산은 부채를 거꾸로 세운 듯하며, 아래엔 거울같이 고요하고 맑은 호수(둘레 1.1km) 여우못이 한폭의 그림인 양 펼쳐져 있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 일선교를 건너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으로 가다보면 낙산동 고분군 조금 못 미쳐 왼쪽에 위치한다.

[의열도] 의구전에 따르면, 약 3백여년전 선산 해평면 산양리에 김성원이란 사람이 매우 영리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웃 마을에 놀러 갔다가 술에 만취되어 돌아오는 길에 잠이 들었다. 때마침 산불이 나서 김성원이 잠든 곳까지 불이 번졌는데, 이를 본 개가 멀리 떨어진 강물에 뛰어들어 꼬리를 물에 적셔 근방의 불을 끄고 지쳐 죽었다. 잠을 깬 김성원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棺관을 갖추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1665년(조선 현종) 선산부사 안응창이 충견을 기려 [義狗傳(의구전)]을 기록하고, '義狗圖(의구도)' 4폭을 남겼다.
일선리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1993년 12월 이곳으로 옮겨 왔다.
전라북도 임실 오수에도 이와 같은 전설이 전하여 義犬(의견)을 기리는 碑(비)와 像(상)이 있다.




☞ 찾아가는 길 산동면 경운대학교 옆에 위치한다.

{일선지} 의우총조에 따르면, 이곳 문주점(지금의 산동면 인덕리)에 사는 金起年김기년이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해 여름(1575) 주인이 농기구를 갖추어 소와 함께 산 밑에 있는 밭을 갈고 있을 즈음 미처 다 갈기도 전에 홀연히 숲속에서 호랑이가 뛰어나와 소에게 달려들었다. 너무나 놀란 주인이 괭이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호랑이를 치려하자 호랑이는 소를 버리고 주인에게 대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소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호랑이에게 뛰어들어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히니 그 사납던 호랑이도 기진맥진하여 사람을 버리고 달아나 수십보 밖에서 쓰려졌다. 주인 김기년은 다리를 물리어 정신을 잃었으나, 얼마 뒤 정신을 차리고 절룸거리며 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부터 20일 뒤에 주인이 호랑이에게 당한 상처가 심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가족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내가 호랑이의 밥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누구의 힘인줄 너희들도 알겠지. 내가 죽은 뒤에 이 소를 절대로 팔지 말 것이며, 비록 소가 늙어 저절로 죽더라도 그 고기를 먹지 말며, 반드시 내 무던 옆에 묻어다오"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주민들이 주인에 대한 소의 충성을 기려 그 사실을 돌에 새겨 무덤가에 세웠다. 1630년 선산부사 조찬한이 [의우전]을 기록하고 화공이 '의우도' 8폭을 그려 의열도에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여양인 陳洙發(진수발)의 처 밀양 박씨가 기르던 암소가 산독으로 수일 만에 죽자, 그 송아지를 가련하게 여겨 잘 길러 수년 후에 개령장에 팔았다고 한다. 그 후 박씨가 병이 들어 죽자, 팔려간 송아지가 미친 듯이 날뛰며 절규하다가 죽으니 이를 기특히 여겨 박씨의 무덤 근처에 매장하고 府尹(부윤) 박수홍이 '의우총'이라 하였다고 한다.




☞ 찾아가는 길 선산에서 '일선교'를 지나 상주-대구간 국도 삼거리에서 대구방면으로 직진하여 약 600m가면 국도 왼편의 마을이 일선리 마을이다.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인해 안동군에서 문화재 용와종택과 침간정, 만령초당, 대야정 등 10여점을 해평면 일선리로 이건, 단장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안동군 임동면 수곡리 入鄕祖(입향조) '柳城(류성)'의 아우인 '水南位 柳垣(수남위 유원 ;1540∼1568)'이 박곡동으로 분가하여 지은 집이다. '一字(일자)형 겹집'으로 구성되었다.


'萬嶺 柳益輝(만령 류익휘 ;1629-1698)'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웠다. 선생의 호는 '만령', 본관은 전주로 통훈대부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저서로는 {萬嶺詩稿(만령시고)}가 전한다.


'柳奉詩(류봉시 ;1654-1709)' 선생이 두 아들 ' 窩 柳升鉉(용와 류승현 ;1680∼1746)'과 '陽坡 柳觀鉉(양파 류관현 ;1692∼1762)' 선생의 교양수학을 위하여 서재를 짓고 세 그루의 가목을 심어 '삼가정'이라 하였다.


숙종 영조 때의 학자인 ' 窩 柳升鉉(용와 류승현)' 선생의 종택과 강학의 장소인 침간정으로, 숙종 36년 안동군 임동면 박곡동에 세웠다. 선생은 숙종 45년(1719)에 문과 급제하여 예조정랑 등에 올라 풍기 군수를 역임하고, 이인좌의 난에 倡義(창의)하여 의병장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이건되었다.


'桐巖 柳長源(동암 류장원 ;1724-1796)'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선생은 영·정조 연간의 학자로 학문에 정진하여 경학 및 성리학 등 여러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영조 39년(1763) 사마시에 합격하여 만년에 大山 李象靖(대산 이상정)선생에게 특히 禮學(예학)을 전수받아 {常變通攷(상변통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조·순조 연간의 학자인 '大  柳健休(대야 류건휴 ;1768-1834)'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理學集解(이학집해)}, {大 集(대야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박공기와지붕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진 기둥을 세웠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조선 정조·순조 연간의 실학자 '好古窩 柳徽文(호고와 류휘문 ;1773-1832)' 선생이 지은 고택으로, 원래 안동군 임동면 마령리에 있었다. 그는 성리학, 역학, 천문, 지리는 물론 의복제도와 음악율여까지 통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小學章句童者問答(소학장구동자문답)} 등이 있다.


조선 철종때의 실학자 '近庵 柳致德(근암 류치덕 ;1823-1881)' 선생이 고종 7년(1870)에 건축한 고택이다. 현재 '□'자형 안채와 '近庵亭(근암정)'이 남아 있다. 그의 저서로는 {典禮攷證(전례고증)}이 있다.


'용와 류승현' 선생의 현손인 '柳致儉(류치검1807∼1853)' 선생의 수곡리 분가 후 성리학을 계승한 '修齋柳廷鎬(수재류정호;1837-1907)'와 그의 아들 '淵龜(연구;1861-1938)'가 지은 집으로 '修齋古宅(수재고택)'이라고도 부른다. 그 후 한말 독립지사인 '입헌 柳東煥(류동환;1885∼1973)' 선생이 1939년에 중건하였다.


이 집은 '종서 金圭鎭(김규진)' 선생이 조선 영조 51년(1775) 안동군 임동면 망천리에 건립하였으며, 1986년 현재 소유주가 매수하여 '丹浦古宅(단포고택)'이라 부르고, 1987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5칸의 '□'자 집으로 사랑채 부분에 좌우로 한칸씩 돌출되어 있는 홑처마 박공집이다.




☞ 찾아가는 길 67번 옥계-해평행 도로를 이용,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을 지나 '솔뫼고개'를 넘자마자 도로 오른편에 위치한다. 도로특성상 주차공간이 없어 승용차는 오른쪽 소로에 잠시 주차한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 서양의 침입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鎖國政策(쇄국정책)의 일환으로서 온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서울 종로 및 전국지방의 주요도로변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의 표면에는 큰 글자로 12자를 새겼고,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주문 말미에는 작은 글자로 12자의 글씨를 새겼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그 후 1882년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각국과 교역됨에 따라 모두 철거되었으나, 아직도 전국의 몇몇 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미 척화비는 큰 암석에 글씨를 새겨 놓았고, 특히 연봉 옥개지붕석도 부조되어 있다. 일제시대 石床으로 쓰기 위해 파괴될 뻔 했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내에서 일선교 못미쳐 국도 왼편으로 송당 박영 정사 안내판이 있고, 여기서부터 1.1km 진행하면 마을 끝 언덕위에 우치한다.

조선시대 무신인 松堂 朴英(송당 박영)은 성종때에 해직되어 낙향을 하고, 이곳 신기리 태조산록 낙동강변에 堂(당)을 건립하고 이를 '松堂(송당)'이라 이름하였다. 이곳은 그가 영산암의 절경을 바라보며 강학에 전념한 곳이기도 하며, '학송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송당은 임진왜란 후 개건한 것이다.



경은 이맹전(1392-1481) 선생은 조선 세조의 등극을 반대한 생육신이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물러나 처갓집이던 고아읍 망장리에 은거하고,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멀었다는 '靑盲過泥(청맹과니)'라 자칭한 채 두문불출하였다.
선생의 유허비는 선산지역의 절의를 대표하는 농암 김주 선생, 단계 하위지 선생의 유허비와 함께 선산부사가 1778년 건립하였다.
해평면 금호1리 산 1번지에 있는 선생의 묘비는 비석의 뒷면에 쓴 글, 즉 陰記(음기)를 조선후기 안동 출신의 대유학자 대산 이상정 선생이 지었다.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구미대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67번 도로를 따라 반달교를 지나 삼성코닝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보면 언덕위에 위치한다.

이 비는 1604년 인동 읍민들이 세웠으나, 1933년 인동중학교 뒷산인 화산재 앞으로 이건하였다가 다시 1976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보 선생은 연안인으로 호는 南溪(남계)이며, 영릉 참봉에 제수되어 재임중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선조 28년(1595) 인동 주민들의 청으로 인동현감에 유임되었다.




☞ 찾아가는 길 진평동사무소 맞은편.

두 구의 입석들은 원래 진평동 378-1번지에 위치하였으나, 1986년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된 것이다.
'掛鞋岩(괘혜암)'이라 새겨져 있는 입석은 뒷면에 '仁同水口石(인동수구석)'이라 되어 있다. 입석의 연혁에 대해서는 또 다른 면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조선 선조 17년(1584)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李鄧林(이등림) 선생의 淸白(청백)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大韓民國建國記念(대한민국건국기념)'이라 새겨진 또 하나의 입석은 일명 '출포암'이라고도 불린다. 인동관아가 설치될 무렵 고을의 풍수지리를 이롭게 하고, 고을을 노리는 도둑을 잡기 위하여 세워졌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이 '大正紀念碑(대정기념비)'라 새겨 놓았으나, 광복 이후 이 글을 지우고 '대한민국건국기념'이라고 새긴 것이다.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선산방면 33번 국도를 이용하여 고아읍 예강리 시내버스정류장을 이정표로 삼는다. 정류장 옆에 '시묘암' 안내표지판이 있다.

조선 태종 때 영의정 심온의 아들이요, 세종의 처남인 영의정 沈澮(심회)가 자신을 길러준 강거민 내외의 죽음에 이르러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부모요, 나를 길러준 분도 부모와 다름없다"하며 슬픔을 금치 못하고 이곳 강씨 부부의 묘소 곁에서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던 곳이다.
일명 '居留岩(거류암)'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연안인 性庵 田佐命(성암 전좌명)을 추모하는 곳이다. 조선 순조 9년(1809)에 후손이 건조하여 議所(의소)로 하였다. 무이재에는 明廟御製詩(명묘어제시)가 있어 "白鳥 香盒南山代田民(백조함향합남산대전민)"으로 본판에 양각하여 달았다.



김선궁은 신라 김알지왕의 29세손이며, 경순왕의 재종질이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선산에 이르러 종군자를 모집하자 당시 현직 관리로서 응모하고 뒤에 문하시중과 삼중대광정난보국벽상공신으로 추존되었다. 현재 그는 '一善 金氏'의 시조가 된다. 비문의 전면에는 楷書縱行(해서종행)으로 "高麗三重匡領門下侍中 諡訓忠公金宣弓遺墟碑"라 음각되어 있다.



왕산 허위 선생은 고종 22년(1885)에서 융희 1년(1907)간의 구한말 의병장으로 선산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 반대 격문을 살포하고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擧義(거의)라는 밀조를 받고 의병을 모집, 경기지방에서 거병하였다. 1907년 이인영 등과 원주에서 전국의병대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양주로 이동하고, 서울에 있는 외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 한국 정식군대로서의 발족을 선언했다. 이때 선생은 軍師長(군사장)이 되어 서울을 함락하고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결의한 후 정병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고군혈투 끝에 패하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 1908년 10월 21일 순국하였다.
1975년 이 비석을 건립하였다.



이 문적들은 선조때 과거시험 합격을 증명하기 위해 발급된 교지와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으로 작성자인 조정(趙靖)의 능숙한 시문과 필적이다.
종류는 조정문과 병과 제21인 급제 교지(78.5×66㎝), 시권(84.4×215㎝), 조정문과 병과 제21인 급제 시권(79.6×224㎝)이 있다.



임진왜란시 상주지역에서 위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전몰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김종무(金宗武, 1548-159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1675년(숙종 1년)에 충신으로 정려(旌閭)하면서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은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이고, 현판에는 김종무의 임진왜란때 세운 전공과 1675년 이래의 정표(旌表) 및 상주 충렬사에의 배향, 증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년)에 중건하였다.



Ⅲ. 금오산 일대 유적·유물
■ 금오산 안내도


소백산맥의 큰 줄기가 대덕산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지리산으로 뻗어가고 다른 하나는 가야산까지 이어지며, 나머지 하나가 동으로 달려서 구미시와 김천시·칠곡군의 경계에서 금오산으로 매듭을 짓는다. 금오산의 높이는 977m밖에 안되지만 군데군데 험준한 바위가 솟아있고, 맑은 물이 넘치는 골짜기가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나다. 더구나 곳곳에 전설과 일화가 얽힌 유적·유물이 있어 신령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금오산은 본래 '大本山(대본산')이었으며, 중국 五嶽(오악) 가운데 하나인 崇山(숭산)에 비교하여 '南崇山(남숭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金烏(금오)'란 이름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스님이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 곧 태양 속에 산다는 금오가 나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선산쪽에서 보면 붓끝같이 보이는 금오산의 '筆峰(필봉)'으로 선산에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많이 난다고 생각하였다. 인동쪽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쓴 것 같아서 '貴峰(귀봉)'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인동지방에는 부자와 벼슬아치가 흔한 듯 하다. 또한 김천에서는 노적가리처럼 보인다해서 금오산을 '노적봉'이라 부르며, 김천시 개령에서 보면 도적이 짐을 지고 내려오는 모양이라 하여 '賊峰(적봉)'이라 한다. 이 때문인지 개령지방에는 큰 도적이나 모반이 자주 일어났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성주지방에서는 이 산이 여자처럼 보여 '陰峰(음봉)'이라 부르며, 성주 기생이 유명한 것도 이러한 산세 때문이라 여긴다.
금오산에는 대혈사·보봉사·동양사·약사암·금종사·보제사 등의 크고 작은 절들이 골짜기마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약사암·해운사의 옛 절과 마애보살입상, 대각국사비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산의 남서쪽에는 일반인들의 무관심속에도 불구하고 국보 제 99호로 지정된 쌍탑의 고향, 갈항사터가있다. 한편 금오산 정상에는 금오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도선굴과 대혜폭포(일명 명금폭포)를 만날 수 있다. 해운사에서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현재 금오산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산의 경관을 조망하기에 더욱 좋을 것이다




금오산성의 축조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우리 지방에서 '천생산성'과 더불어 국방상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그 구조는 산의 정상부를 따라가며 석축을 돌린 '테뫼'형의 內城(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包谷式(포곡식)으로 석축을 쌓은 外城(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의 석축산성이다.
내성만이 있던 조선초기의 모습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善山古跡(선산고적) 金烏山城條(금오산성조)에 의하면, "돌로 쌓아 둘레가 7.644척·높이가 7척이며, 절벽을 따라 城성이 된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되는데 매우 높고 험하다. 안에는 못이 셋, 시내가 하나 있다."고 한다. 조선 태종 10년(1410) 3월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산성을 수축할 당시 선주의 금오산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산성이었음은 틀림없겠다. 또한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慶尙道地理志(경상도지리지)} 山城條(산성조)에 경상도 31개 산성의 하나로서 개령과 약목의 軍倉(군창)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금오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선조 28년(1595) 下四道〔하사도 ;강원, 충청, 전라, 경상좌우도〕都體察使(도체찰사)의 本營(본영)을 이곳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인조 17년(1639)에는 경상감사 김응이 왕의 윤허를 받아 선산부사 이각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북쪽 계곡을 둘러싸는 외성을 쌓아 이중의 산성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형태는 이때 이룩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방의 요지로서 끊임없이 증축·수축되던 금오산성은 순조 임금 이후 국가의 鎭管體制(진관체제)의 해이와 더불어 그 가치가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의 軍額(군액)기록으로 보아 조선말까지는 그 기능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종 5년(1868)에 건립된 {金烏山城重修頌功碑(금오산성중수송공비)}로 미루어 금오산성의 內城(내성)은 지속적인 修築(수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大惠門(대혜문) : 금오산성 외성의 門樓(문루)로서 현재 복원되어 있다.
·大惠倉(대혜창) : 금오산의 외성 문루인 대혜문 안쪽에 위치한 서향 건물이며, 약 30칸 규모였다.
·內城倉(내성창) : 내성에 있었으며, 규모는 확실치 않으나, {금오산성중수송공비}에 의하면 곡식과 소금이 가득하다 했다.
·座起廳(좌기청) : 내성안에 있던 別將(별장)이 근무하면서 군대를 지휘 감독한 곳이다. 정유재란시 下四道都體府(하사도도체부)가 위치하였을 것이고, 규모는 약 100칸 정도였을 것이다.
·軍器庫(군기고) : 내성안에 있었다.

1991년 외성의 일부를 복원하여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외성의 출입문이자 북문에 해당하는 문루의 홍예 밑을 통과할 수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길게 이어진 성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碑(비)는 산성내 부락에 전하며, 장방형의 지대석과 조선시대 석비 양식인 개석을 갖추고 있다. 개석의 아랫면에는 각형 1단의 넓은 받침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장방형 구멍이 비신의 정상부에 꽂히게 되어 있다. 개석의 상면 낙수부는 용마루가 굵게 나타난 팔작지붕형으로서 轉角(전각)의 反轉(반전)이 심한 편이다. 비문은 전후면에 半草書(반초서)로 음각되었으나, 이끼로 인해 전문판독이 곤란한 실정이다. 그러나 비명중에 [大院位閤下院位閤……]이나 [今上五年春季李承宣……]등으로 보아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고종연간 1868년 重修(중수)시에 세운 '頌功碑(송공비)'로 추정된다. 대강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지 용직이 소임을 띠고 鎭(진)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성이 무너지고 헐려져 樓(루)와 廓(곽)이 모두 쓰려져서 국방에 믿을 것이 못되어 대원군에게 이를 아뢰었다. 그리하여 倉 (창름)을 밝게 하고, 여러 공인들과 사졸들을 白徒(백도)로 갖추어 重修(중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이에 감명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니 성곽이 새로워졌다. 성은 그 길이가 무릇 3,370보요, 누각은 모두 백칸이 되었다."




☞ 찾아가는 길 대각국사비는 약목삼거리에서 김천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약 2.8km가면 길 오른쪽에 숭오리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나 있다. 마을길을 따라 약 3km가면 숭오리 '숭산마을' 끝에 있는 '대자연가든 식당' 앞에 닿고, 식당 앞에서 계속 이어진 비포장길을 따라 1.2km 가면 '大覺寺(대각사)'가 나온다. 승용차는 대각사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숭산마을'에 주차해야 한다.

선봉사지는 현 대각사 계곡어구 왼편 산기슭에 위치한다. 현재 古式(고식)의 석축지가 상·하단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약간의 건물지와 초석들이 있을 뿐 다른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석축으로 보아 본래 남향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비는 현재 '大覺寺(대각사)'내에 위치한다. 보호각 안에 있는 비는 주인공인 대각국사 의천의 명성이나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그 형태도 고려시대 石碑(석비)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龜趺(귀부) 대신에 연꽃무늬로 사방을 두른 장방형의 臺石(대석)을 두었고,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이 호화롭게 조각되어 있을 법한  首(이수)는 구름무늬만 가득한 지붕돌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碑身(비신) 주위로 얕게 새긴 당초문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禪師(선사)들의 부도나 탑비가 대체로 호화롭고 장식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자 출신인 대각국사의 비석이 이처럼 간결하고 간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개성 영통사에 세워진 또 다른 대각국사비가 귀부는 갖추고 있지만 이수는 이미 지붕형으로 바뀌고 있음에서 고려시대 석비의 양식적인 변화로 추정할 수 있겠다.
대각국사비는 고려 인종 10년(1132) 건립하였다. 비문은 한림시독학사 임존이 짓고, '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이라는 題額(제액)과 楷書 (해서체)의 본문글씨는 승려 린이 썼다. 碑文(비문)에는 의천의 인적사항과 송나라 유학에서의 구법활동, 귀국 후 천태교를 확립하는 과정·교화, 그밖에 국사가 남긴 遺敎(유교) 등이 실려 있다.


대각국사는 고려 天台宗(천태종)을 창시한 고승으로, 法名(법명)은 義天(의천)이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경덕국사를 스승으로 하여 출가했다. 1085년 중국 송나라로 유학하여 이듬해 불교서적 3천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요·송·일본 등에서 서적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를 모아 {고려속장경}을 간행하는 한편, 고려 초부터 큰 세력을 형성한 선종과 이에 맞서 현종 이후 점차 힘을 회복하던 교종의 두 종파를 아우르기 위해 천태종을 열어 교단의 정리와 국민사상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속장경의 간행목록이라 할 {신편제종교장총록}, 화엄관계 전적에서 핵심만을 뽑아 모은 {신집원종문류}, 그의 행적과 시문이 담긴 {대각국사문집} 등 여러 저서를 남겨 고려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금오산 삼도봉 아래 북쪽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동남쪽으로 藥師庵(약사암)이 바라보이는 평평한 대지의 서북쪽 암벽에 마애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입상의 앞쪽 대지에는 자연석 柱礎石(주초석)도 보이고 주변에 많은 기와편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혹시 {一善志(일선지)}에 보이는 [普峰寺址(보봉사지)]가 이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의 대지로 보아 작은 사찰이 경영될 만한 충분한 공간이고, 남동으로 수백리를 조망할 수 있으며 또한 금오산 최상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니 곧 [보봉사]와 일치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상은 각을 이룬 암벽에 남향하여 조각되었다. 동체의 중심이 모서리에 오게 하고 양변이 좌·우 암벽에 부조되게 하였으므로 두상과 어깨부분은 사실상 圓刻(원각)에 가깝다. 이렇듯 모서리 합각면에 조각된 유례는 아직 발견·조사된 적이 없어 주목된다. 또한 두·신광을 갖추고 대좌까지 구비하여 이곳 금오산의 불교 유적 가운데 가장 귀하다 하겠다.
머리에는 3면 寶冠(보관)을 쓰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하기 어렵다. 원만한 相好(상호)는 목에 돌려진 三道(삼도)와 잘 어울려 보살상의 위엄을 더해 주고 있다. 法衣(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가슴 앞으로 내려지고, 배 앞에서부터 圓弧(원호)를 그리면서 양 무릎에까지 내려진 衣紋(의문)은 매우 부드럽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손을 펼쳐 들면서 천의자락을 잡은 듯 하다. 이러한 수인으로 인해 신체가 흡사 좌측으로 약간 비튼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경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팔공산 군위삼존석굴의 협시보살상과 유사한 형태로서 건립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光背(광배)는 2중의 舟形擧身光(주형거신광)으로서 두·신광의 내부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臺座(대좌)는 반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측면에는 11판의 伏蓮單瓣蓮花紋(복련단판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원만하고 풍만한 상호나 세련된 몸매로 보아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부드러운 의문, 형식화된 의문의 표현과 경직된 신체 등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세련된 몸매 등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9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약사암은 금오산 약사봉 아래에 위치한 작은 암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시대의 창건이라고 하나, 당시의 유적·유물은 전혀 볼 수 없고 근래에 신축된 대웅전·산신각·범종루·요사 1동만이 남아 있다. 약사암에 관한 기록은 {일선지} 佛宇條(불우조)에 [藥師殿(약사전)]이란 사찰명으로 약간 기록되어 있으나 그리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현 법당 내에 있는 {藥師庵重修記(약사암중수기)} 현판이 오히려 주목된다.
법당 내의 주존으로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전면에 도금을 하였다.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手印(수인)으로 보아 釋迦如來像(석가여래상)일 것이나, 사찰측에서는 도금할 때 왼손에 藥盒(약함)을 올려 놓고 약사여래부처님이라 부르고 있어 원상을 그르치고 있다.
머리는 螺髮(나발)로서 큼직한 肉 (육계)가 있으며, 전면에  珠(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비록 귀가 짧은 편이나 풍만하여 목에 돌려진 삼도가 어울려 위엄이 있어 보인다. 通肩(통견) 法衣(법의)는 양쪽 팔에 걸쳐 결가부좌한 무릎위를 덮었다. 앞가슴에는 사선으로 내려진 衣帶(의대)가 조각되었으며, 뒷면에도 양쪽 어깨 위에서 내려진 衣紋(의문)이 부분마다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특히 三道(삼도)는 지나치게 굴곡이 심하여 어색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양 무릎은 다소 얇은 편이어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원만한 상호와 부드러운 의문의 조각수법으로 인해 통일신라 말·고려 초로 추정되지만, 계주의 존재라든지 안정감의 상실 등에서 조선시대 이후 수리를 한 듯 하다.
한편 이 석불의 원위치에 대해서는 앞에 소개한 {藥師庵重修記(약사암중수기)}를 참고할 수 있다. 본래 지리산에 석불 3구가 있었던 것을 1구는 직지사 삼성암으로, 또 1구는 수도암(청암사 수도암)으로, 나머지 1구는 이곳 약사암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2구의 불상도 조사하여 양식적 친연성과 조성 시기 추정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 정자는 조선 영조 44년(1768) 參議 宋明欽(참의 송명흠)의 건의로 선산부사 閔百宗(민백종)이 세운 것으로 길재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採薇(채미)'라는 顯額(현액)은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은나라 충신이던 伯夷(백이)와 叔齊(숙제)가 不忠(불충)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노라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을 캐어 먹다가 아사한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야은 길재 선생은 '不事二君(불사이군)'의 뜻으로 귀향하여 금오산 아래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에 후인들이 야은을 추모하여 '烏山書院(오산서원)'을 세우고, 낙동강변 지금의 오태동에 '砥柱中流碑(지주중류비)'를 세움으로 해서 모든 선비들의 사표로 삼았다.
채미정 건물은 기둥만 16개로 된 벽체가 없는 특이한 양식의 정방형 정자이다. 들창만 들어 올리면 모두가 대청으로만 된 건물로서 선조들의 특이한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구조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입구에 下馬碑(하마비)가 서 있고, 興起門(흥기문)·求仁齋(구인재)·敬慕閣(경모각)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숙종 30년(1694) 새로 건립한 '高麗門下注書 吉先生遺墟碑(고려문하주서 길선생유허비)'가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 孤竹君(고죽군)의 두 아들 伯夷(백이)와 叔齊(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하기를 "不可(불가)합니다. 아비가 죽어 장례 전에 창칼을 든다는 것이 어찌 孝(효)라 할 수 있으며, 신하로서 임금을 해치려 함이 어찌 仁(인)이라 할 수 있으리까" 하니 좌우에서 곧 목을 베고자 하므로 姜 太公(강태공)이 이는 義人(의인)이라 하여 놓아 보냈다. 이후 은나라가 멸망하자, 두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노라고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아사하였다.




☞ 찾아가는 길 구미에서 김천방향 904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아포를 지나 왼쪽으로 나오는 8번 시도로를 이용하여 오봉저수지를 찾는다. 계속가면 '삼가마을' 앞 사거리에 이르고, 여기서 직진하여 1.7km가면 '갈항마을'이 나온다. 마을 왼편 농로를 따라 가면 갈항사터가 위치한다. 대형버스는 '갈항마을'까지만 갈 수 있다. 참고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데 전각의 열쇠는 갈항마을 김정기 씨가 관리한다. 남면 면사무소는 김천방향 904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신촌 못미쳐 왼쪽 2번 시도로를 따라 가면 된다.


이곳 갈항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김천시이나, 금오산 서쪽 골짜기에 위치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나 지금은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지만, 우리 석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쌍탑의 고향이다.
신라시대에는 신라 왕실사람들로 분주했을 갈항사의 내력에 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효소왕 1년(692)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종 고승 勝銓法師(승전법사)가 갈항사를 짓고 80여 매의 돌해골을 청중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갈항사가 소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 무슨 까닭으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불타버린 기와의 존재로 큰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세인의 눈길에서 멀어져 그저 조용하던 갈항사가 분주해지기 시작한 것은 1914년 동쪽 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金石文(금석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이다. 그 후 1916년 2월 12일 밤 유물을 탐낸 도굴꾼들에 의해 탑은 무너지고 그 안의 유물은 도난당하였다. 이로 인해 동·서 쌍탑은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갈항사지에는 현재 석조비로자나불상과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남아 있으며, 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있다. 그다지 물이 넉넉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지금도 해마다 밭에 물을 대는 우물로서 마치 커다란 독을 묻은 모양으로 생겼다. 위치는 절터로 들어서는 길 왼쪽 밭둑 아래에 있다.
현재 옛 절터 북쪽에 새로운 갈항사를 신축하여 불사를 보고 있다.


경작지 한편의 한칸짜리 보호각 안에 대좌를 갖춘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결가부좌한 두 무릎과 양손이 상당 부분 파손되었지만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螺髮(나발)의 정수리에는 肉 (육계)가 있고 미간에는 白毫(백호) 자리가 남아 있다. 얇게 뜬 눈과 은행알처럼 도톰한 눈두덩은 통일신라시대 부처님의 자비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만 너무 둥근 얼굴 윤곽과 양쪽 콧방울을 벗어나지 않을 만큼 작은 입, 짧은 귀는 약간의 부조화를 가져오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부드럽게 흐르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右肩偏袒(우견편단)의 옷주름은 가슴 가운데에서 모아졌다가 펴지면서 부드럽게 흐르지만 오른쪽 겨드랑이에 지나치게 붙어 부자연스럽다. 두 손은 파손되었지만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둔 降魔觸地印像(항마촉지인상)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을 석가여래상으로 부르고 있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두툼하지만 전체적인 신체비례로는 적절한 편이다. 제작연대는 절터에 있던 두 탑과 동시기이거나 약간 후대로 생각된다.

한편 절터에는 철창에 갇힌 석조불상이 하나 있다. 이 불상은 智拳印(지권인)의 수인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분명하지만, 본래의 머리를 잃어버려 보기가 흉하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종의 주존불로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집게손가락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쪽 엄지가 왼손집게손가락 끝에 맞닿도록 한 모양이다. '지권인'은 '理이'와 '智지',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 하나라는 뜻이다.


우리가 갈항사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곳의 쌍탑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경복궁 민속박물관 입구에 위치하여 지나가는 관광객의 눈길 속에 무심히 서 있지만, 우리나라 석탑들 중 매우 중요한 석탑이다.
이 석탑들은 건립연대가 확실한 신라시대 석탑 중 하나로서 석탑 기단부에 금석문이 남아있다. 또한 불국사 삼층석탑(일명 석가탑)에서 완성을 본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이 경주를 벗어나 어떠한 경로를 통해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두 탑은 원래 갈항사에서 동·서로 서 있었으며, 비록 동탑은 상륜부가, 서탑은 3층 옥개석 이상이 결실되었지만 그 규모나 양식은 동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하층기단에 각각 두 개씩의 탱주와 우주, 옥개석의 5단 받침, 옥개석의 직선 추녀 등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다만 하층기단의 지대석·면석·갑석이 한 돌로 이루어진 점이 아쉽다.
한편 탑에는 풍경이 달리는 옥개석 네 귀퉁이 외에도 탑신 곳곳에 '丁穴(정혈)'이 있어 주목된다. 이는 사천왕상이나 보살상 등의 석탑부조상을 직접 석탑 표면에 부조하지 않고, 금속판에 새겨서 탑신에 고정시켰던 흔적으로 보인다. '보령 성주사지 삼층석탑'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도 이러한 양식이 보이는데, 이들 사찰은 모두 왕실이나 귀족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 탑의 건립 연대는 동탑 상층기단에 새겨진 銘文(명문)에 의해 경덕왕 17년, 곧 758년으로 밝혀졌다. 이 때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후 가장 발전된 문화의 꽃을 피우던 시기로서,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영되기도 하여 명문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갈항사의 재정적 기반을 엿볼 수 있겠다. 명문에는 신라의 이두문이 문장 말미에 차례로 들어 있어 더욱 소중하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풀이는 다음과 같다.
"이 두 탑은 天寶(천보) 17년 戊戌年(무술년)에 세웠으며, 오빠와 두 자매, 셋의 힘으로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손위누이는 소문황태후이며, 손아래누이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 "
1916년 2월 12일 도굴 이전의 기록을 보면, 동탑에서 陶器(도기) 파편과 함께 부패된 종이가 발견되었고, 서탑에서는 파손된 청동병과 종이조각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편 갈항사에는 또 다른 탑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이 있다. 현재 남면 면사무소 뜰에 보관중인 석탑 기단부 부재 4점이 그것으로서 八部衆像(팔부중상)이 새겨진 석조물이다. 추후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금오산 북록 현 해운사 아래 있으며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석축한 축대가 양식으로 보아 고려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운사는 1925년 4월에 창건된 절로써 현재 대웅전, 제하당, 종응각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보살좌상과 칠성탱화, 석조나한상 등이 전한다.


'도선굴'은 천연동굴로서 신라 말 道詵國師(도선국사)가 이곳에 들어와 道(도)를 깨우쳐 우리 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그 후 언제부터 '도선굴'이라 불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일선지}에 의하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내부에는 2칸짜리 얽어 만든 집이 있어, 임진왜란 때는 인동·개령의 수령과 백성 600여명이 피난하였다." 한다.
아마도 고려 시대에 '大穴(대혈)' 즉 '큰 구멍'이란 의미로 불리고, 이에 따라 굴 아래 '대혈사'라는 사찰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굴 내부 길이 7.2m, 높이 4.5m, 너비 4.8m)


금오산 백운대 아래에 있는 4칸 건물이다. 조선 명종때 문신인 선산사람 金就文(김취문)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현종때 후손들이 강학장소와 齋舍(재사)로 백운재와 대혜재라는 齋號(재호)로 창건되었던 것이 1976년 다시 중건된 것이다.


금오산 대혜폭포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刻字(각자)로서, 금오산성내에 9개의 샘과 7개의 못을 파고 그 준공을 기념하여 당시 선산부사 裵楔(배설)이 선조 29년(1596)에 새긴 것이다.


금오산 북쪽 기슭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 바위벽에 '금오동학'이라고 새겨져 있다. 가로·세로 2척이나 되는 큰 글자로서, 孤山 黃耆老(고산 황기로) 선생의 글씨이다. 금오산의 깊고 크고 아름다운 골짜기를 뜻함이다.


玉林寺址옥림사지, 普峰寺址보봉사지, 東陽寺址동양사지, 全宗寺址전종사지,
鎭南寺址진남사지, 窟庵寺址굴암사지, 華巖寺址화암사지, 萬勝寺址만승사지,
葛嶺寺址갈령사지.





Ⅳ. 기 타
유적·유물


☞ 찾아가는 길 천생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서 황상동 코스와 장천 코스가 오르기 쉽고 거리도 가깝다. 황상동 코스는 구미대교를 지나 황상동 버스 종점까지 가서 '검성池'로 오르면 된다. 이 코스의 경우 승용차로 '검성지'까지 오를 수 있기에 교통편이 편리하다. 반면에 장천 코스는 장천면소재지에서 대구방향으로 좀 더 직진하면 장천교 오른쪽으로 안내표지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비포장길로 다소 교통이 불편하지만 천생산의 위용을 즐기며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천생산성이 위치한 천생산은 인동과 장천면 경계에 위치한다. 해발 407m의 一字峰(일자봉)으로서 그 생김새가 특이하여 하늘이 낸 '天生山(천생산)'이라 하고, 함지박을 엎어 놓은 듯 하다 해서 '방티산'이라고도 한다. 천생산은 사면이 천애의 석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이며,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활동한 곳으로 성내에 있던 만지암·산성창·군기고 등은 없어졌으나 성문지·성곽 등이 남아 있다.


천생산성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쌓았다는 기록이 {仁同邑誌(인동읍지)}·{輿地圖書(여지도서)}·{萬機要覽(만기요람)}·{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려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慶尙道地理誌(경상도지리지)} 山城條(산성조)에 [천생산성은 인동에 있다.]라 하여 도내 31개 산성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후 {世宗實錄地理誌(세종실록지리지)}에 간단한 沿革(연혁)이 보이나,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慶尙道續撰地理誌(경상도속찬지리지)}에 [山城古基(산성고기)]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시기에 이미 廢城(폐성)된 듯 하다.
그러한 천생산성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시기는 임진왜란때이다. 당시 재상이던 서애 유성룡은 한탄하기를 "왕년에 해안과 내륙에 산성을 쌓아 국방의 요새로 활용한 것이 백여개나 되나, 태평세월이 오래되어 못쓰는 성을 수리하지 않아 급할 때 쓸모가 없나니, 대구의 公山山城(공산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이 그 일례이다." 하였다. 이후 도원수 권율에 의하여 "金烏山城(금오산성), 天生山城(천생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을 끼고 있는 嶺南中路(영남중로)의 요충이다."라고 강조되고, 곽재우 역시 천생산성의 수리를 주청하니 선조 37년(1604)에 산성의 外城(외성)이 축조되었음이 확실하다. 이렇게 영남의 중요요지로 부각된 천생산성으로 인해 '인동'은 일약 都護府(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 후 조선 인조 16년(1638), 현종 5년(1664)의 어전회의에서 천생산성의 폐기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는 지세가 높고 험하며 물이 없어 행군시 잠시 머무를 수는 있으나, 오래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獨鎭(독진)으로 승격된 '금오산성'과 달리 '천생산성'은 정규군이 없는 예비산성으로 군창과 군기고 및 소수의 군병만이 잔류하고 監司(감사)의 순찰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령지방에서 倡義(창의)하여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天降紅衣將軍(천강홍의장군)'이라 하였다. 곽재우 장군의 천생산 활약 기록은 {인동읍지}, {여지도서}, {만기요람} 등에 보이고 있다. 察里使(찰리사)로 재직중이던 선조 37년(1604)에 천생산성을 수축하고,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米德岩(미덕암) 설화도 남아 있다. 그러나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이나 장군의 傳記(전기) 및 文集(문집) 등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사실상 그 활약상을 확인할 길은 없다.

천생산성에는 將臺(장대)·쌀창고·軍器庫(군기고)·萬持庵(만지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고, 단지 城壁(성벽)·북쪽 城門(성문)터·軍旗(군기) 꽂은 구멍, 防彈石(방탄석), 幢竿支柱(당간지주)와 유사한 石柱(석주) 두개 등이 남아 있다.


천생산성 米德岩(미덕암)에서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진을 치고 있을 때 설화이다. 천생산성에 물이 없는 것을 왜군이 알면 전략으로 이용할까 싶어 물이 있다는 것을 거짓으로 알리기 위해, 미덕암에 말을 세워 놓고 백미(쌀)를 말 등에 부으니 성 아래 왜군들에게는 물로 말 목욕을 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한다. 또한 산성을 포위한 왜군이 진격할 때 미덕암 주위에 칡으로 돌을 달았던 것을 끊고 활을 쏘니 왜군들이 일제히 섬멸되었다. 왜군들이 죽어서 검붉은 피가 골을 이루어 내려가니 이 골이 '금성골'이라 하고 쌀덕으로 승전했다 전한다. 혹은 쌀로 인해 승리를 얻었다 하여 '米得岩(미득암)'이라고도 한다.




일선교 동편에 있는 '용선마을'에 2기가 있고, '산재마을' 동북편에 8기가 있다.


'농바위마을'에 2기, '재궁마을' 앞 국도변에 1기가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외에도 10여기가 있었으나 최근 2∼3년 동안 개간으로 인하여 깨뜨려 제거하였다고 한다.


'송천마을' 입구에 80m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쪽벌판을 향해 위치한다.


모두 2기로서 1기는 '하도동마을' 뒷편 골짜기 낙산사지 경내에 위치한다. 다른 1기는 일선초등학교에서 500m 남쪽의 평지에 있다.


구미와 선산 사이의 33번 국도를 따라 약 5km 북상하면 고아읍 송림리 삼거리에 이른다. 삼거리에서 동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구운초등학교가 있다. 지석묘는 구운초등학교에서 남동쪽에 있는 '모산마을' 앞 송림에 있다.


선산읍 교리 '용골동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200m 가면 차로변에 접한 논 가운데 2기의 지석묘가 있다.


생곡리 '솝실마을' 서쪽 구릉지역과 남쪽 골짜기에 걸쳐 지석묘의 蓋石(개석)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다수 있다. 그러나 주위에는 크고 작은 자연석도 많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지석묘와 자연석을 쉽게 구별할 수 없겠다. 외형으로 보아 도저히 자연석이라 보기 어려운 것도 지석묘가 갖추어야 할 하부구조가 전혀 확인되지 않아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만약 정밀 조사를 하여 몇 기만이라도 지석묘로 확인된다면 이 지역은 거대한 지석묘군으로 주목을 받을 것이다.


낙동강변에 인접한 원리 '강창마을'은 6·25 전쟁의 격전지로 현재는 폐촌이 되어 일부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논가운데 지석묘 1기가 전하고 있다. 개석 아래 지석으로 보이는 것이 약간 돌출되어 있으나 매몰이 심하여 확실하지 않다.


구평동 지석묘군은 인동에서 동쪽으로 개설된 장천행 지방도로를 따라 약 2.7km 가면 '불바위마을' 북쪽에 지석묘 1가 있고, '구주불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0.6km 가면 경작지 가운데 또 1기가 있다.





☞ 찾아가는 길 선산읍에서는 일선교를 지나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방면으로 1.9km가면 길 좌우로 낙산동 고분군이 나온다. 승용차 주차는 가능하다.

낙산동 고분군은 해평면의 월파정산, 불로산, 정묘산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개의 고분들이 그렇듯이 이곳의 고분들도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은 상태이다. 이곳은 1917년 일본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조사와 아울러 28호분에 대한 표본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1987년 대구 효성여자대학교(현 효성카톨릭대학교)에서 재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에 발굴된 금제·금동제의 각종 유물과 토기·등잔 등 400여점의 부장품들은 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조사에 의해 밝혀진 것은 도로 좌우 6만 7천여 평의 구릉지대에 모두 205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토광묘·옹관묘·돌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 등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다양한 고분 양식이 분포하고 있다.


'원동서원 마을' 뒤편에 감천을 향하여 동남으로 뻗은 나지막한 능선에는 石槨墳(석곽분)이 산재하고, '강창마을'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낙동강을 향한 동쪽사면에는 石室墳(석실분)이 수십기 확인되지만 대부분 봉토는 유실되고 도굴로 심하게 파괴되었다.


원동과 독동을 경계로 하는 능선, 즉 '그물이마을' 바로 위 낮은 지역에 석실분이 10여기 전한다.


생곡리 '솝실마을' 서쪽에는 선산-상주간 지방도로로 인해 허리가 잘린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의 북쪽 경작지에 약 백여기의 석곽분, 석실분 등 크고 작은 고분이 산재하여 있다.


'송삼마을' 동남편의 원통산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 끝부분과 '송삼마을' 바로 뒤 서편 기슭의 두 곳에 주로 밀집되어 있다. 석곽분, 석실분이 수십기 혼재한다.


옥관 1동 마을 뒷산의 동남사면 끝부분에 형성된 나지막한 구릉에는 중형석실분이 수백기 넓게 산재하고 있다. 봉분은 거의 유실되고 내부도 도굴로 인하여 심하게 파괴되었다.


현재 상주시와 구미시의 경계를 이루는 삼봉산 동쪽 능선지대, 즉 구봉동의 '봉촌·내산마을' 뒷산에 중형석실분이 약 60여기 산재한다. 봉분은 대부분 유실되어 10여기 정도만 외형을 갖추고 있으나 이것마저 도굴로 인하여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또한 논밭에 인접하여 있어 더욱 심하게 파손되어 가고 있다.


일선교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냉산, 청화산 사이의 협곡에 있는 '우실마을'과 주륵사지 입구에 산재하여 있다.


도개중학교에서 2.5km 서북방에 위치한 신곡리 마을 뒷편 신곡池(지) 좌우 능선에 집중하고 있다. 너비 5∼12m의 봉토를 갖춘 중소형 고분이다.


해평초등학교에서 국도를 따라 1km 떨어진 도로 우측 구릉에 있다.


'쟁골마을' 뒷산 완만한 경사면과 연못안 마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해평초등학교에서 국도로 2.5km 북상하면 우측 창림池(지) 북쪽 능선에 있다.


일선교에서 3km 남쪽 국도변 동편의 능선과 그 능선의 좌우 비탈에 있다.


인덕리 '문수마을' 뒷산에 약 5천평 규모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된 듯 하고, 최근까지도 도굴당시 노출된 긴목항아리·짧은목항아리·적색토기 등이 흩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철제품인 長刀(장도)도 간혹 수습할 수 있었다.


산동면사무소에서 동북방 1.5km 지점의 작은 능선에 위치한다. 최근에 밭으로 경작하기 위해 다수의 고분이 파괴되었으며, 그나마 봉토 지름 약 5m 내외의 소형석곽분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학사·숭지마을' 동북쪽 송림골의 작은 능선에 거의 원형을 갖춘 소형봉토분 10여기가 집중 분포한다.


'못골마을'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도굴이 자행된 듯 주변에는 긴목항아리편이 목격되고 있으며, 아래 고분들은 농지개간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장천면사무소에서 오로리로 들어가는 지방도로의 왼쪽 산비탈과 구릉에 있다.


구미시와 칠곡군 가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천생산'에서 서쪽편 인동으로 뻗어내린 능선 끝부분인 '황상마을' 뒷산에 위치한다. 인동에서 보면 북쪽에서 내려오는 야산에 해당한다.


구미대교에서 인동행국도로 약 1km 가면 국도를 가로지르는 능선에 위치하며, 동편의 황상동 동 고분군과 나란히 하고 있다.


구미고등학교 뒷산 능선 중턱에 약 200여기 산재해 있다. 대부분 소형의 수혈식석곽분으로 추정되고, 봉토 직경 10∼15m 교모의 중형급 고분도 다수 산재한다.


금오초등학교 서남쪽 뒷산 정상부에 좌우사면에 위치한다.




신곡동 마을 뒤쪽 신곡저수지 옆에 위치한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요지이다.


창림저수지를 지나서 '점말마을' 윗쪽 300m지점에 위치한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요지이다.{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磯器所(기기소)가 2곳인데 그중 하나는 해평현 동쪽 鳩等堤里(구등제리)에 있고, 下品(하품)에 해당하는 곳이 이곳인 듯 하다.


냉산에서 낙산동고분군으로 내려가는 골짜기의 '사기점마을'에 위치한 조선시대 일반民窯(민요)이다.


'상림마을' 북편 1.5km지점의 산아랫 계곡에 위치한 조선시대 일반민요이다. 귀얄문·인화문 사기가 주로 제작되었다.


장천면사무소 우측 2km지점의 산 아래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요이다. 주변 능선을 따라 요지가 분포하는 대규모토기요지이다.


냉산 도리사 북편의 산 중턱과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쌓은 성으로서 산 정상에는 城樓(성루)자리가 있으며, 우물도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으로 보아 둘레는 약 1km정도로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게 팔공산전투에서 패하고 이곳에 성을 쌓고 싸워 승리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한다. 충남 開泰寺(개태사)의 기원문에 "고려 태조가 병신년 가을에 崇信城(숭신성) 주변에서 백제와 더불어 교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봉산 능선을 따라 구축된 토성으로 현재 약 300m정도 남아 있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권29에 의하면, [선산의 읍성으로서 고려말에 축조되었으며, 주변이 2,740척이며 현재는 남문과 서문만이 남아 있다.]


원리 서원마을 뒷산 북쪽 약 1km 지점에 토석이 혼재된 약 400m의 산성이 남아 있다. 북쪽 능선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 보아 북쪽세력을 방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무을면과 옥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원통산 정상에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및 {善山邑誌(선산읍지)}·{仁同邑誌(인동읍지)} 壇廟條(단묘조)에 의하면, 선산지역의 사직단은 선산 관아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0리 지점인 지금의 죽장리에 있었고, 인동지역의 사직단은 인동 관아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리인 지금의 임수동에 있었다. 그러나 모두 조선 말엽에 없어지고 그 유적만이 남아 있다.
社(사)는 土地神(토지신)이요, 稷(직)은 穀神(곡신)으로 옛날에 제후가 될 때 반드시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와 존망을 같이 하였다. 사직단은 신라 37대 선덕왕 때 처음으로 세웠으나 지방의 각 고을에서도 백성을 위하여 사직단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백성은 땅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의 천자나 제후가 새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모두 사직단을 만들어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직은 흔히 국가나 조정을 일컫기도 한다.
구미·선산 지역의 사직단 설치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기록상 조선초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지방 고을의 사직단은 山城(산성)의 서쪽에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선산지역의 사직단은 읍성 서쪽인 죽장리 현재 '四方(사방)마을'에 있었고, 인동지역은 천생산성의 서쪽인 임수동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가뭄이 심하게 계속되어 농사에 지장이 있을때는 하늘을 우러러 천신께 고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사를 일컬어 '祈雨祭(기우제)'라 한다. 이러한 제를 지내기 위해 만든 단이 바로 '기우단'이다.
구미·선산 지역에는 선산읍 飛鳳山(비봉산)과 龍山(용산), 낙동강변, 鯉埋淵(이매연), 仁同 遊鶴山(인동 유학산), 不知岩(부지암) 등에 있었다. 이외에도 天生山(천생산)과 금오산 大惠瀑布(대혜폭포) 위의 大惠(대혜)골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우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기우 행사의 시작은 신라 헌덕왕 9년 5월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제를 올리니 비가 내렸다고 한다. 고려 현종 2년 4월에도 국가에서는 기우제를 지냈고, 이듬해는 전국적으로 산천에 대하여 기우제 행사를 하였다.
기우제 의식은 五方(오방)의 土龍(토룡)과 四門(사문)을 향한 제사로서, 오방과 사문은 천지신명을 뜻한다고 보며 의식이 끝나면 불을 피워 밖에 걸고 병으로 물을 퍼고 시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용을 만들어 새끼줄로 끌고 다니며, 暗葬(암장)을 발굴하는 등 갖가지 행사가 계속된다.


성황당은 지방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제사하는 祠堂(사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한 시대부터 崇神思想(숭신사상)이 성행하고 각 고을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수호신은 '天王(천왕)' 혹은 '天皇郞(천황랑)'이라 한다. 수호신을 위하는 壇(단) 혹은 神祠(신사)가 산꼭대기에 있어서 '山王(산왕)'이라 한다. 남쪽지방에는 '老姑神母(노고신모)' 혹은 '聖母(성모)'라는 이름의 女神(여신)이 많다. 이는 일종의 모계사회 단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생각된다. 이 수호신을 위한 풍속은 신라를 거쳐 고려에도 전해져 고종 23년 몽고병이 온수군(충청 온양)을 공격하여 왔을 때 그 지방 성황신이 도와서 이긴 것이라 하여, 국가에서는 정식으로 성황당을 인정하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성황당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인해 '미신타파' 일환으로 전부 없애 버렸고,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현재 선산읍 이문리의 구미농업기술센타 뒤 구미농경유물관 자리가 성황당 지역이며, 또한 인동관아 북쪽 3리인 지금의 황상동에 성황당이 있었다.


여제단〔아기당〕은 '서낭신'과 '無祀鬼神(무사귀신)', '無祀 15位(무사15위)'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단으로 혹은  壇(여단)이라고도 한다. '무사귀신'은 자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귀신을 말하며, '무사 15위'는 어린 아기들의 죽은 신, 길을 가다 병으로 죽은 신, 떠돌아 다니며 얻어 먹다 죽은 신,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꺼번에 많이 죽어서 갈곳이 없는 신 등을 말한다. ,
{輿地圖書(여지도서)}·{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善山邑誌(선산읍지)}등에 의하면, 선산읍에는 교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인동에는 지금의 황상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을 분류해 보면 나무장승·돌장승이 있고, 성질상으로 사원의 장승·동구 밖 장승·경계의 장승·길가의 장승·이정표로서 장승·수호신으로서의 장승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보통 장승은 윗부분에 사람의 얼굴모습을 조각하고, 남녀가 쌍이 되어 마주 서 있다.
남상은 머리에 관을 조각하여 목신 전면에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 또는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 등의 글씨가 쓰여 있다. 또 여상은 관이 없고 전면에 '地下大將軍(지하대장군)' 또는 '天下女將軍(천하여장군)'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 등의 글씨가 쓰여 있다. 이정표 장승의 경우 거리가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
장승에 대한 신앙 실태를 살펴보면, 수호신으로서의 장승에겐 정월 15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고 금줄을 친다.


동제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유구한 전통이며, 일하는 농민의 그 해 첫 행사이다. 또한 협동성을 띤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민주성을 띤 민중의 행사라고도 하겠다. 이는 매우 지역적이어서 폐쇄성을 띤다고 하겠으나 각기 유사한 점이 많아 민족적인 공통성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지방의 수릿제, 각 지방의 별신굿 등도 모두 동제의 한 유형이라 하겠다.
제사 일시는 일정하지 않으나, 선산군은 대개 음력 정월이 압도적이다. 제관은 보통 그 마을에서 예의 바르고 단정한 50세 이상의 남성이 선출되며, 제사 전 일정기간 동안 금줄을 치며 목욕을 깨끗이 한다. 또한 동신제를 지내기 얼마 전부터 일정한 신성기간이 있어 이때에는 외부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임산부는 출타시키고 喪故(상고)가 나면 일단 중지시킨다.
선산군의 8개 읍·면에서 행해지는 동제는 거의 내용이 같으며 祭主제주의 선정방법이나 금기사항이 동일하다. 대상 神體(신체)는 거의 나무이며, 나무 중에는 느티나무·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산동면 도중리의 신체는 將軍石像(장군석상)과 童子石像(동자석상)이다.




구미역은 김천찰방 관할로 서쪽으로는 안곡역, 동쪽으로는 연향역에 닿는다. 대마 1필, 중마 2필, 하마 4필로 역사 28인으로 운영하였다. 고종 32년(1895) 서울에서 통신국이 설치되고 이어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됨으로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안곡역은 김천찰방 관할로 남쪽으로는 개령 楊川驛(양천역), 북쪽으로는 상주 靑里驛에 닿는다. 중마 2필, 하마 4필, 역리 62인, 奴(노) 20인, 婢(비) 5인으로 역을 운행하였다.


봉수지는 선산읍 원리 뒷산인 남산 정상에 있다. 선산은 東來(동래)에서 시작되는 제 2선의 직봉에 소속되었다. 仁同(인동) 件垈山(건대산) 봉수로부터 남산봉수로 연락되고 다시 開寧(개령)의 甘文山(감문산) 봉수로 통보하였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는 전국에 6백여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다. 각 봉수대 군사는 別將(별장) 1명, 監考(감고) 1명, 伍長(오장) 5명, 軍丁(군정) 수십명으로 당번을 교체하며 봉수대를 지키게 하였다. 조선 세종때 전국에 5간선을 정하니, 제 1선은 慶興(경흥)에서 제 2선은 東來(동래)에서 제 3선은 江界(강계)에서 제 4선은 義州(의주)에서 제 5선은 順天(순천)에서 각각 시작되어 서울 목멱산에 집결되도록 하였다. 이상의 간선은 直烽(직봉)이라 하고 그 사이에는 지선격인 間烽(간봉)을 두었다.




낙동강 기슭 국도변에 우아하고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세상의 모든 풍상과 긴 세월의 발자취를 그대로 간직한 채 묵묵히 입 다물고 오로지 덕스럽게 꿋꿋이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둘레가 15m, 높이가 30m, 밑너비가 9m로 어른 7명이 양팔로 벌리고 서면 손이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큰 나무이다. 약 1380년쯤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엄씨라는 사람이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이 마을 수호신으로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동민이 정성을 모아 洞祭(동제)를 올린다.
그 울창한 모습은 나무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사를 자아내게 하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은행알을 주렁주렁 달고 말없이 늠름하게 서 있다.


불교의 상징이 보리수 나무와 佛頭花(불두화)라 한다면, 은행나무는 儒敎(유교)의 상징이다.
공자께서 천하를 순회하면서 제자를 가르칠 때 대부분은 은행나무 아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직하게 되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이런 연유로 하여 은행나무가 유교의 상징적인 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杏亶(행단), 杏林(행림) 등은 모두 공자께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약 500년 묵은 반송으로 지상 40cm 높이에서 10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 18m.



발갱이들(발검들)은 지금의 구미시 지산동에 위치한 넓고 기름진 평야이다. 예로부터 농작업이나 일할 때 부르던 노래가 곧 발갱이 들소리이다.
현재는 지산동을 중심으로 발갱이들 주변의 괴평리, 문성리 등 일대의 농민들이 발검들소리 보존회(보유자 : 백남진)를 조직하여 1996년에는 구미발검들 노래 유래비를 세우고 전승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소리는 모두 10가지로 영남아리랑, 어사용, 가래질소리, 망깨소리, 목도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타작소리, 칭칭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리는 1983년부터 조사하여 1991년도에 일괄하고 엮어서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발표하여 민요부문 우수상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출연자들은 모두 지산동에서 태어나고 이 들에서 생활한 주민 53명으로 보존회를 구성 영원히 전승 보존될 것이다.
선창자 백남진은 타고난 맑고 구성진 창(唱)으로 무리없는 창법을 구사하는 기능 보유자이다. 이 들소리는 총 열 가지로 영남아리랑을 시작하여 어사용을 주고받으면서 시작된다. 다음으로 농사짓는 순서를 따라 가래질소리, 망깨소리, 목도 소리를 부르고 이러한 기초작업을 마친 후에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소리를 메기고 받으면서 부르고 이어 타작소리로 이어진다. 끝으로 풋굿이 베풀어질 마을을 향하여 상머슴을 깽이말(들채)에 태우고 흥겨운 칭칭이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산 지역의 농경생활상을 '세시풍속'과 '농부의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농기구를 비롯한 유물과 입체 모형 전시로 생동감 있는 현장 교육을 하고 있다.




1993년 개관한 구미민속관은 전통적인 농경생활에서 1년을 주기로 되풀이 되는 세시풍속을 전시하여 전통농경사회의 일과 제례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Ⅴ. 부 록




읽 을 거 리 1·2·3


문화재 용어 해설집 및 명칭도


추천 답사 코스
Ⅰ. 읽을 거리 1 - 신라 불교의 전래와 공인 전후의 모습

신라 불교의 전래와 공인 전후의 모습

머 리 말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정비를 갖추던 시기이다. 부족간의 연맹체제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단계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더욱 복잡해진 사회를 원시불교나 조상숭배 신앙만으로는 이끌어 가기 힘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배층은 새로운 지배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사상을 원하게 되었다. 이에 불교가 그들에게 한차원 높은 인간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고대국가의 지배체제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사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초기 불교의 수용은 민중이 아니라 왕실에 의해 이루어졌고,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서 점차 발전해 나갔다.
이 글에서는 우선 중국과 신라, 고구려, 백제에 영향을 준 원시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고 신라 불교의 전래와 전래된 후 공인되기까지의 불교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原始佛敎(원시불교)의 性格(성격)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카필라국 淨飯王(정반왕)의 태자인 '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 때의 인도는 물질적인 향락이 들끓고 여러 가지 사상이 혼재하였으며, 분열되어 존재했던 여러 城邑國家(성읍국가)들이 점차 강대국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던 시기였다. 성읍 국가 당시의 인도는 제정일치 사회로서 제사가 중요시되었으나 석가 생존 당시에는 세속권력이 더 중요시되어 브라만 계급〔제사장 집단〕이 쇠퇴하고 크샤트리아 계급〔무사 집단〕이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원시불교의 성격은 성립 당시 인도의 사회상황과 연관시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원시불교는 크샤트리아 계급 중심의 종교였다. 통일사업이 진척되면서 주체 세력인 크샤트리아 계급이 브라만 계급보다 현실적으로 세력이 더 강해지자 불교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세속적 권능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원시불교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원시불교는 정복국가의 이념에 합당한 면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었다. 이는 轉輪聖王(전륜성왕)과 王卽佛(왕즉불) 관념에서 잘 나타나는데, 세속적 권능을 가진 그는 무력으로 이웃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정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한다. 이때 전륜성왕의 치세를 돕기 위해 彌勒(미륵)이 출현하여 교화한다. 이러한 전륜성왕의 관념은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며, 강대국을 중심으로 통일사업을 진척하려는 정치이념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석가가 말년에 주장한 七不衰法(칠불쇠법)도 정복왕조의 윤리관을 제시한 것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원시불교는 성읍국가에서 왕권중심의 고대 정복 왕조를 성립시키려는 사회변화 과정속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신라 또한 이러한 성격의 불교를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국가체제가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新羅 佛敎의 傳來(신라 불교의 전래)

신라는 삼국 중 불교가 가장 늦게 전래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秦王 符堅(진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順道(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 전래되었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摩羅難陀(마라난타)가 東晋(동진)에서 오면서 전래되었다. 신라 불교의 전래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2가지의 예만 들도록 하겠다.
(1) 우선 {三國史記(삼국사기)} 卷4 新羅本紀(신라본기) 法興王 15年 '肇行佛法條(조행불법)'에 의하면, 신라불교의 初傳(초전)에서 공인까지의 과정이 3단계로 나뉘어 있다.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沙門〔사문 ;스님의 통칭〕墨胡子(묵호자)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와 있었는데, 중국 梁(양)나라 사신이 가져온 香(향)의 용도를 왕실에서 모르자 이를 알려주면서 말하길 '이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고, 정성을 들이면 神聖(신성)에 통할 수 있다. 이른바 신성은 三寶(삼보)로서, 첫째는 佛陀〔부처〕이고, 둘째는 達磨〔Dharma ;佛法(불법)〕이고, 셋째는 僧伽(승가 ;스님)이다. 만약 이것을 불태우면서 발원하면 반드시 신령의 응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 때 마침 왕녀가 병이 들어 향을 피워 발원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4세기 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해 온 것을 생각하면, 이 기사는 타당하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가 민간에 전해졌음을 말하는 경우이다. 이는 유적·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덧붙여 고구려와 통하는 또다른 경로인 榮州(영주)·安東(안동) 방면으로도 불교는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상과 같이 신라로의 불교 전파가 오직 고구려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신라와 백제는 羅濟同盟(나제동맹) 이후 외교·군사·문화면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신라는 521년(법흥왕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양나라에 처음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라는 백제를 통해 중국 南朝(남조)의 불교도 수용하였을 것이다.

(2) {三國遺事(삼국유사)} 卷3 阿道基羅條(아도기라조)에 인용된 阿道本碑(아도본비)의 설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미추왕 2년(263) 鷄林(계림)에 와서 불법 시행을 청하였지만 허용받지 못하고 해치려 함으로 續林(속림 ;一善) 毛祿(모록 또는 모례)의 집으로 숨었다. 여기에 3년간 은신해 있다가 成國公主(성국공주)가 병이 들어 巫醫(무의)가 효험이 없으므로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료했다. 왕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소원을 묻자, 아도는 '天鏡林(천경림)에 佛寺(불사)를 지어 邦家(방가)의 복을 비는 것이라.' 했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왕이 돌아가시어 國人(국인)이 아도를 해치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大敎(대교)가 폐하게 되었다."
'아도본비'에는 미추왕 2년에 계림에 온 아도가 曺魏人(조위인) 我 摩(아굴마)의 아들이라 했는데 一然(일연)은 아도를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보고,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魏(위)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일연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海東高僧傳(해동고승전)}의 저자 覺訓(각훈)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도본비'로서, 각훈은 고구려·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본 것이다. '아도본비'는 시대착오가 심하며 설화의 인위적 구성이 짙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의 아도는 晉(진)나라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佛敎 公認 前後(불교 공인 전후)의 모습

(1) 공인 이전의 모습
신라불교는 공인 이전에 이미 수용되어 믿어지고 있었다. 공인 이전의 신라 불교는 왕실이 중심이 되어 수용하였다. 원시불교가 왕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까닭은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원시불교의 '轉輪聖王(전륜성왕)' 관념과 '王卽佛(왕즉불)' 사상으로 인해 王者(왕자) 계급에게 유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왕실이 제 부족보다 우월하다는 관념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 각 부족을 통합하기에 유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수용과 동시에 왕권에 복속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귀족들은 불교수용에 반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고대국가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에서 왕과 상하 종속관계에 있기는 하였지만 제사장으로서 동등하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자기 부족에 대한 지배력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하 지배질서를 성립시킨 왕실이 관념적으로도 귀족보다 우월하다는 불교사상의 수용을 모색하게 되자, 불교에 반대하고 종래의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나가려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차돈의 순교와 같은 진통을 겪은 신라의 거센 반발의 배경에는 신라민의 자립정신이나 고유정신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강하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불교를 수용하기 위한 필수충분요건인 왕권의 발달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왕실을 중심으로 받아들인 초기 불교는 종래의 巫格(무격)신앙을 대체하는 성격을 보인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무격신앙과 불교를 비교하면서 佛僧(불승)의 위력을 강조하는 설화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이차돈의 순교는 재래 토속적인 무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이다. 이차돈이 당초 興輪寺(흥륜사)를 세우고자 했던 天鏡林(천경림)은 신라의 무격신앙을 대표하는 신성지역으로 이 곳에 절을 세워 흥법의 의지를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법자체에 반대하는 군신들과의 갈등으로 이차돈은 순교하게 되는 것이다.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불교세력은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흥법사를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2) 공인 이후의 모습
불교의 공인은 왕실과 귀족이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가능해졌다. '轉輪聖王(전륜성왕)'과 '彌勒思想(미륵사상)'이 왕실과 귀족의 타협을 이루어 낸 것이다. 불교를 공인하면서 왕실은 전륜성왕 관념을 포용하였다. 원시불교 경전 속에 나타나는 전륜성왕은 정복사업을 추진해가는 세속적 군주의 상징적 존재로 무력으로 이웃의 모든 국가를 정복하고 그 땅에 불법통치를 이루는 장본인이다. 삼국은 모두 정복국가의 과정을 통해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체제를 완비해가는 시기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소수림왕이나 광개토대왕 또는 근초고왕이나 침류왕, 법흥왕, 진흥왕은 모두 정복군주로서 이들은 '전륜성왕'으로 자처하였으며, 이로 인해 공인 이후 초기 불교는 軍國的(군국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륜성왕 사상을 기반으로 군국불교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공인된 불교에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났다. 미륵신앙은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기에 삼국의 귀족들은 자신을 브라만 계급으로 자처하며 미륵은 곧 귀족인 자신의 자제로 태어난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미륵은 삼국사회에서 童子(동자)의 모습으로 출현하게 된다. 또한 미륵신앙은 전통적인 무격신앙의 모습을 불교 신앙으로 포섭함으로써 토착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귀족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불교가 귀족들에게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輪廻前生思想(윤회전생사상)'이었다. 윤회전생사상은 현세와 내세를 연결시켜 줄 뿐 아니라 현세를 전생과도 연결시켜준다. 즉 현세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실들은 전생에서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因果應報說(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은 骨品制度(골품제도)와 같은 고대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초전불교가 전파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오다가 결국 공인되는 것은 귀족의 입장에서도 불교사상이 유리한 면을 지녔기 때문이며, 공인과정을 거치면서 초전불교 사상 자체가 변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전불교가 '왕즉불 사상'을 받아들였던 반면 공인 이후의 불교는 남조의 '救世菩薩(구세보살) 사상'을 받아들였다. 왕이 여래가 아닌 보살이라는 구세보살 사상은 신라의 공인불교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 법흥왕과 진흥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며, 왕비들도 출가하여 僧尼(승니)가 된다. 이러한 구세보살사상으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대는 무마되고 불교가 공인되니, 이는 왕권의 전제주의를 지양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해 '왕권 중심의 귀족정치'를 성립시키려는 면으로 작용하였다.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 삼국의 불교수용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 중 왕권 강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왕실과 중앙 귀족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이전까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무격신앙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상이다. 따라서 일단 채용되어진 불교는 이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발전해나가게 된다.
Ⅰ. 읽을 거리 2 - 잃어버린 왕국 군미국(軍彌國)

잃어버린 왕국 軍彌國(군미국)

군미국의 실체

{三國志} 魏志 弁辰傳(삼국지 위지 변진전)에 의하면, 기원전후 경상도 지방에는 辰韓 12小國(진한 12소국)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구미'라는 현재 지명과의 유사성 및 고분군의 분포 등으로 볼 때 '군미국'의 존재이다.
군미국은 지금의 인동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다가 신라에 편입됐다. {삼국사기} 권34 지리 성산군조에는 "사동화현을 수동현으로 고쳤다."고 하였는데, 같은 내용을 {고려사} 권56 지리(1) 상주목 인동현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동현조 외에 각 읍지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인동지방이 신라영토에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눌지왕(417-458) 때에 오늘의 구미 도개면 지방으로 고구려에서 불교가 들어온 사실과 소지왕(479-500) 때에 국왕이 오늘의 선산지방인 일선군을 들러 이재민을 위문하고 장정을 징집하였다는 사실에서 이 시기에 낙동강 중상류 지방까지 신라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미국은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인동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던 군장국가였음에 틀림없다.

수난당한 황상 고분군과 군미국의 위용

군미국은 황상고분군만을 남겨두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일하게 군미국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줄 황상고분군은 일제치욕 때 한차례 수난을 당했다. 그 후로 도굴꾼들에 의해 봉분이 처참하게 파헤쳐졌다. 조상들이 남겨준 유일한 문화유산이 일인들에게 유린당하고 다시 한번 우리들의 손에 의해 수난을 당한 것이다.
황상동은 70년대 들어 급격히 변모를 거듭했다. 구미공단이 들어서고부터 논밭이 공단과 택지로 변했다. 따라서 수천년 전에 존재했던 군미국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단지 현재 생존해 있는 이 지역 村老(촌로)들의 입을 통해서만 군미국의 존재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했던 황상고분군은 1962년에 들어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황상동 뒷산의 낮은 구릉에 소재하던 3기의 고분을 23일간 발굴해 금동제 장신구, 철제무기, 토기 등 많은 유물을 출토했다. 황상고분군은 1962년 3기의 석실분 발굴 이후 35년만에 대구대학교 박물관 측에서 종합발굴에 들어갔다. 대구대 박물관은 1998년 7월 10일부터 11월 11일까지 구미 황서초등학교 예정부지내 문화유적 발굴 조사에 들어가 113기의 고분을 확인하고, 1000여 점의 유물을 수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물은 대부분 산사태로 교란되고 도굴된 상태였으나, 한 무덤에서 단야구집게와 망치가 출토되어 매장 주체의 직업이 대장장이였음을 추측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집단의 출토품 중에는 철기를 제외한 금속류가 매우 희귀하고 마구류의 출토 예도 전혀 없다. 대구대 박물관 측은 발굴조사지역 북쪽에 조성된 중·대형 봉분을 지배세력으로 보고, 이 지역은 주체세력과는 구별되는 기층집단의 묘역으로 판단했다.
이번 발굴은 4세기 말경에서 6세기 초경까지의 묘제변화양상과 토기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인동지방에 뿌리를 둔 고대 군미국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미발굴된 황상고분군 능선 아래 우측에는 지표상에서 30∼50cm를 파내려가면 깨진 도자기와 거의 완형의 모습을 지닌 도자기 뚜껑 등이 출토되곤 한다. 현재 이 지역은 마을 주민들이 옥수수 등을 심기 위해 땅을 일구고 있다.

황상고분군은 명당 중 명당에 위치해 있다. 한낮에는 볕이 잘 들고 마사토층으로 무덤 조성에 유리했다. 현재의 지명 황상(黃桑)은 일제치욕 때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겠다는 일인들에 의해 개명된 지명이다. 원래는 황상(凰桑)으로 '뽕나무에 앉은 봉황'의 뜻이었는데 일인들이 '황금색의 뽕나무'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격하한 것이다. 황상고분군은 봉황이 알을 품고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
윤원백(66)씨는 "황상고분군 일원에는 높이 2m, 너비 1.5m 가량의 둥근 화강암들이 지상에 노출돼 있는데 마치 알이 흩어져 있는 것 같다."며 "군미국 백성들은 다산과 부족의 번영을 기원해 묘지를 조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상고분군은 황상벌을 사이에 두고 봉두산과 마주하고 있다. 봉두(鳳頭)란 '봉황의 머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봉두산은 봉황의 수컷이었고 황상은 봉황의 암컷으로 군미국 백성들은 그 사이의 평원에서 농경·수렵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군미국의 가상도

군미국은 어떠한 모습을 지녔을까. 특이한 것은 군미국의 중앙에 황상고분군이 마련됐다는 사실이다. 군미국 백성들은 아마도 풍수지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군미국의 화복과 번영을 기원하며 조상의 묘를 명당 중의 명당에 조성한 그들은 한 때 구미지역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던 듯 하다.

현재의 황상동 '검성池' 부근을 '검성골'이라 불렀다. 검성지 부근은 천혜의 요새였다. 양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성의 역할을 했고, 골의 좁은 입구는 적을 차단하기에 적당했다. 물이 많고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이곳에 군미국의 왕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검성지의 '검'은 '왕'의 상징적인 형태소로 해석된다.

검성골 아래는 '진골'이라 부른다. 현재의 인의주택 부근의 '진골'은 군미국의 지배계층이 상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군미국이 신라에 합병된 후 신라의 진골 중 한 사람이 군미국에 파견되어 이곳을 통치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골'에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큰 우물이 있었다. 윤씨는 "인의주택 경로당 부근 놀이터에 있었던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물이 철철 넘쳐 흘렀으며 나무 뿌리에서 내뿜는 감로수와 같이 맑았다."고 말했다.

'진골'에서 더 내려오면 '화동골'과 '옥터'가 있었다. 지금의 구미정보고등학교와 인동시장 부근인데 이곳에서는 주로 군미국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동골'에 대한 내력은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옥터에 대한 내력은 구전되고 있다. 인동시장 부근의 옥터에는 편편하고 넓다란 바위가 있었다. 논 한가운데 있었던 바위 주변이 옥터라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옥터 부근에서는 여러구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 옥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동시장 부근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현재의 인동 사거리 부근을 일컬어 '성황지'라 불렀다. 성황지에서 옥계 쪽으로 2km 가량을 일컬어 '어은골'이라 칭했다. 성황지에는 커다란 연못이었는데 연못 한가운데에는 봉분처럼 불룩하게 솟은 땅이 있었다. 현재 <주> 델코 부지에 있었던 '성황지'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황상동 주민들은 연못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땅이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곳에서 주춧돌과 기와장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황지는 아마도 군미국의 지배계급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추측된다.

- {중부신문}의 기사를 인용 -

Ⅰ. 읽을 거리 3 - 소위 '선산 7탑'의 현재적 의미

소위 '선산 7탑'의 현재적 의미

구미·선산지역의 역사적 의미는 크게 4가지 측면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먼저 신라 불교 초전지로서 삼국기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발전된 불교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도리사와 도개면 일원 및 선산지역 7탑 기록이 될 것이다. 둘째로는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고려의 대표적인 각축장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지어서는 지금도 고아읍 일원에 숭신산성, 태조방천, 여진나루, 어갱이, 발갱이, 점갱이 같은 이름을 지닌 당시의 싸움터가 전하고 있다. 셋째로는 조선 사림문화의 여명을 알린 본향임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 이 지역의 지도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지주중류비'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국방의 요새로서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의 존재이다.
이렇듯 구미·선산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중심이 되어 왔다. 그러던 이 지역의 역사는 현대사와 더불어 성장해 버린 구미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졸부처럼 성장한 도시쯤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이에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제는 향토애를 가지고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지역에는 선산읍을 중심으로 사방 30리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선산지방에는 거대한 일곱 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위치와 명칭은 남아 있지를 않다.
이 글에서는 현재적 입장에서 '선산 7탑'을 새롭게 조명하여 신라 불교 초전지로서 신라시대의 경주 못지 않은 지역적 특수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원리 강창 삼층석탑(보물 제 1186호, 현 소재지 : 김천 직지사 경내 청풍료 앞)
석탑에 관해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기록이 남아 있으나, 현장 조사가 시급한 실정이다. 단지 문헌상 조사를 통해 혹시 '선산 7탑' 가운데 독동 북쪽 사지 석탑이 아닌가 한다. 일제시기 말엽 부장물을 노린 자들에 의해 무너진 것을 1917년도의 실사진을 바탕으로 기단부와 탑신부 일부 석재를 보강하고, 상륜부는 보림사 삼층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 현재 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江洛寺三層石塔址(강락사삼층석탑지)]라는 표석이 있고, 1980년 직지사로 옮겨 일명 '청풍료 앞 삼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이전·복원된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부를 형성한 신라의 일반형 석탑으로서, 조성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생곡리 금당암 석탑

3) 생곡리 미봉사지(彌鳳寺址) 석탑
생곡리 비봉산 동쪽에 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966년 암자로 중건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2단의 석축과 주초석인 듯한 자연석이 2개 배열되어 있어 당시의 미봉사를 추측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비봉산이 善州府(선주부)와 관련하여 봉황이 나는 형상이므로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어 날지 못하도록 하는 裨補寺刹(비보사찰)로 추정된다. 석탑지는 현재 알 수가 없다.

4) 낙산동 삼층석탑(보물 제 469호)
석탑에 관해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기록이 보이고, 현재 위치가 원위치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전형적 양식인 2층기단 위에 탑신을 건립한 模塼石塔(모전석탑)류로서 선산읍 죽장동 오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 탑은 하층기단의  柱(탱주 ;가운데기둥)가 셋, 상층기단의 탱주가 둘인 점이 매우 주목된다. 이러한 구조는 신라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경주의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1층탑신 남쪽에는 龕室(감실)이 마련되어 있어 사리나 작은 불상을 봉안하고 門扉(문비)로 여닫은 듯 하다. 이상의 기단부 탱주 구조 및 탑신·옥개석의 治石(치석) 수법으로 보아, 그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중대인 8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5) 죽장사지(竹杖寺址) 오층석탑(국보 제 130호)
죽장사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에 보이고 있다. 총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석탑으로서 양식적으로 본다면 인근의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나 빙산사지 오층석탑과 유사한 模塼石塔(모전석탑)류이다. 18매의 長大石(장대석)으로 구성된 地臺石(지대석) 위에 2중의 기단부를 마련하고,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탑신 남면에는 龕室(감실)이 있어 본래는 불상을 모셨을 것이다. 감실 입구에는 角形(각형)과 四分圓(사분원)의 몰딩으로 額(액)을 돌렸으며, 그 내부 좌우의 상·하에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본래 양쪽으로 여닫이 門扉(문비)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 뿐만 아니라 윗면에도 계단식의 층급을 두어 塼塔(전탑)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인 2층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기단부와 탑신부에 있어서 양우주와 탱주가 각출되지 않아 이형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 규모가 워낙 거대하여 생긴 양식상의 축약이거나, 혹은 복원과정의 일실로 생각된다.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1층·2층·3층·4층·5층 각각 6단·5단·4단·3단·3단인 것과 아울러 탑의 건조시기는 8세기 이후로 생각된다.

6) 주륵사지(朱勒寺址) 석탑(문화재자료 제 295호)
주륵사에 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 {일선지}등에 보인다. 주륵사의 폐사관련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산부 궁실조 [南館(남관)]의 기록이 주목되며, 석탑에 대해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보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3층석탑으로 추정되며 현재 옥개석도 3석뿐이나, 현존하는 각 부재로 보아 석탑의 원형을 짐작하자면 5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상·하 2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는데, 기단부의 구성방법은 확인할 수가 없다. 상·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隅柱(우주)와  柱(탱주)를 각각 2주씩 나타냈으며, 각 탑신석 역시 양 우주를 표현하였다.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5단이며, 낙수면 네귀퉁이의 轉角(전각)과 反轉(반전) 양면에는 風鈴(풍령)을 부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기단부의 우주·탱주 양식수법, 5단의 옥개받침 등 양식적인 측면으로 미루어 탑의 축조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나 1층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石材(석재)의 추녀 1변 길이가 2.32m로서, 이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 못지 않은 巨作(거작)인 동시에 당 시대의 秀作(수작)임을 알 수 있다.

7) 교리 죽림사지(竹林寺址) 삼층석탑
죽림사지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선산도호부 '불우조'와 {일선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현재 죽림사지 일대에는 석탑이 있던 자리에 [校洞三層石塔遺址(교동삼층석탑지)]라는 표석만이 있다.
석탑은 상층기단 갑석 부재 1매와 탑신석 2석, 초층 옥개석 부재 2석과 삼층 옥개석 1석만이 온전한 상태였으나, 1979년 선산 입구 비석거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으로서, 상·하층기단 면석의 양우주와 1탱주 양식, 5단의 옥개받침, 隅柱(우주)가 나타난 탑신석 등 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기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선산지역에 전하는 소위 '선산 7탑'을 현재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정리하였다. 현재 확인이 되지 않는 생곡리 금당암 석탑을 제외하고 나머지 6기의 석탑은 이전·복원의 과정을 밟고 있다.
'선산 7탑'은 그 규모나 양식면에서 통일신라시대로 비정할 수 있다. 흔히 신라의 문화라 함은 경주 지역의 문화를 꼽고 있으나, 구미-선산 지역은 동 시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불교관련 유적·유물이 상당히 많이 잔존하고 있다. 거대하고도 웅장한 7기의 석탑을 건립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당시의 국력이나 불교의 위치 혹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되는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불교 초전지로서, 북방교통요지로서의 지역적 특수성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빠른 시일내에 생곡리 금당암 석탑과 미봉사지 석탑, 주륵사지 석탑의 조사·복원이 필요할 것이며, 직지사에 이건된 원리 강창 삼층석탑은 원위치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또한 기존에 조사된 석탑의 불교사상적 배경도 연구하여 이 지역의 불교사상적 위치도 체계화 되어야 할 것이다.
Ⅱ. 문화재 용어 해설집 및 명칭도




문화재란 우리 민족(넓은 뜻에서는 인류가 이룩한)이 이룩한 유형, 무형의 모든 문화적 소산을 포함하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혹은 유적, 유물이란 용어를 일제 강점기 이래로 사용하여 오다가 1961년 10월 2일 각령 제 181호에 의거한 문화재관리국 직제공포로 문화재란 용어를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1962년 1월 10일 법률 제 961호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렇게 분류된 것들을 국보, 보물, 사적 및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시·도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 밖에 시·도 단위로 지정하는 문화재자료와 시·군 단위로 지정하는 향토유적이 있다.



1) 유형에 따라



건조물·전적(典籍)·고문서(古文書)·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를 말하며, 국가에서 지정하는 국보·보물과 시·도지정유형문화재가 있다.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민속놀이 등 전통 생활속에서 전래되어 온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또는 예술적 가치가 큰 기능과 예능을 말하며, 그런 관계로 문화재와 달리 예술이나 기술상 기능을 보유한 사람을 함게 지정하게 된다. 기능보유자는 후계자를 육성하여 그 기능을 전수시킴으로서 그 맥을 이어나가야 하며, 국가에서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와 시·도지정무형문화재로 나뉜다.



패총(貝塚)·고분(古墳)·성지(城址)·궁지(宮址)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과 경승지로서 예술적 또는 관상상 가치가 큰 것 및 동물(서식지, 도래지 등 포함)·식물(자생지 포함)·광물·동굴로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지정유형별로 살펴보면 국가지정인 경우에는 사적·명승·천연기념물로 세분되고, 시·도지정인 경우에는 기념물로 포괄하고 있다. 역사적 기념물과 아울러 자연물을 함께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인데, 이는 인간이 처해 있는 역사적·문화적 또는 사회적인 환경과 자연적 환경이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확립된 것이다. 그 밖에 사지(寺址), 단지(壇址), 능묘(陵墓), 비(碑), 지석묘(支石墓), 제방(堤防), 연못(池), 서원(書院), 다리(橋), 석빙고(石氷庫), 특정 건물터, 진(鎭), 사묘(祠廟), 교회 및 성당 등 근세 건물 등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의식주, 생업,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구, 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을 말한다. 국가에서 지정하는 중요민속자료와 시·도지정민속자료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옷, 주택, 장승, 장신구, 당상, 탈, 도장(印), 공문, 기(旗), 상여, 방아, 유품일체, 민속마을 등이 지정되어 있다.



국가 또는 시·도로부터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중 향토문화의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유적을 지정한 것을 말한다. 문화재 자료는 종류별로 구분하여 지정하지 않고 총괄적으로 지정한다.



문화재보호법에 준하여 지역내에서 지정, 보호하고있는 중요문화재 외에도 향토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문화재는 많이 있다. 향토유적이라 함은 첫째,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문화재 및 건조물로 지정되지 아니한 향토의 역사·예술상 가치가 있는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둘째 향후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충분히 있는 유적, 셋째 향토문화, 토속, 풍속을 연구하는데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료이다.

2) 지정여부에 따라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문화체육부장관이 지정하는 국가지정문화와 시·도문화재보호조례에 의거 시·도지사가 지정하는 시·도지정 문화재 및 문화재자료를 말한다.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나 문화재보호법 및 시·도 문화재보호조례에 의하여 지정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 일반동산문화재
전적·서적·판목·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 및 민속자료로서 역사상·예술상 보존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지정되지 않은 동산문화재를 말하며, 이들은 제작된 지 50년 이상이고 생존인의 작품이 아니어야 한다.
- 매장문화재
토지·해저 또는 건조물 등에 매장되어 노출되지 않은 문화재를 말한다.
- 기타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다.

3) 지정권자에 따라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체육부장관이 지정한 중요문화재로서 다음 8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국보 :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국보 제 1호 : 남대문)
- 보물 :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문구 등의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보물 제 1호 : 동대문)
- 사적 : 기념품 중 유사(有史) 이전의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교육·사회사업·분묘 등의 유적으로서 중요한 것.(사적 제 1호 : 경주 포석정지)
- 명승 : 기념품 중 경승지(景勝地)로 중요한 것.(명승 제 1호 : 명주 청학동소금강)
- 사적 및 명승 : 기념물 중 사적지·경승지로서 중요한 것.(사적 및 명승 제 1호 : 경주 불국사 경내)
- 천연기념물 : 기념물 중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 포함), 식물(자생지 포함), 광물 동굴로서 중요한 것.(천연기념물 제 1호 : 달성의 측백수림)
- 중요민속자료 :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 중 중요한 것.(중요민속자료 제 1호 : 덕온공주당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시·도지정문화재보호조례에 의거 시·도지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로 다음 4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유형문화재 / 무형문화재 / 기념물 / 민속자료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시·도지정문화재보호조례에 의거 시·도지정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를 말하며 건조물, 사적 등의 구별없이 일률적으로 지정한다.

▣ 伽藍(가람)내 殿閣(전각) 해설

·관음전(觀音殿 ; 圓通殿) :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권능과 구제의 능력을 가진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
·나한전(羅漢殿 ; 五百羅漢殿) :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봉안하고 좌우 주위에 석가의 제자인 16대 나한상을 봉안한 전각이다.
·대웅전(大雄殿 ; 大雄寶殿) : 본존불상(釋迦牟尼佛)을 모신 전각으로 한국 사찰에서 가장 많은 불전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 ; 華嚴殿, 毘盧殿) : 화엄경에 의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
·독성각(獨聖閣) : 독성이란 스승없이 혼자 깨우친 성자, 즉 독수선정(獨修禪定)을 말한다. 한국사원에서 독성이란 단군신앙의 불교적 전개라고 볼 수 있는데, 산신이나 칠성과 같은 과정을 거쳐 불교로 융합되었다.
·명부전(冥府殿 ; 地藏殿, 十王殿) :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배열한 전각이다. 지장보살이 강조되면 지장전, 명부시왕이 강조되면 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한다.
·산신각(山神閣) :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해 먼저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원래의 성격을 불교안에서 되찾게 되었다. 산신을 호랑이와 노인상으로 표현하고 탱화로서 이를 도상화(圖像化)한 전각이다. 산신각은 한편으로는 가람의 수호신의 기능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래의 산신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나타낸다.
·삼성각(三聖閣) : 산신·칠성·독성을 한 전각에 봉안한 것으로, 이 경우 재래의 수(壽)·복(福)·재(財)의 3신앙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다.
·아미타전(阿彌陀殿 ; 極樂殿, 無量壽殿) :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봉안한 전각.
·약사전(藥師殿) : 약사여래를 주존으로 모신 전각. 이 불전은 약사여래의 정토인 동방약사유리광세계(東方藥師琉璃光)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영산전(靈山殿 ; 八相殿) :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인 팔상탱화를 봉안한 전각이다. 영산(영산)이란 석가의 설법 회상인 영산회상(靈山會相)의 준말이며, 팔상(八相)이란 석가의 생애를 여덟 개로 구분한 것을 의미한다. 석가팔상이란 降兜率(강도솔)·託胎(탁태)·降誕(강탄)·出家(출가)·降魔(항마)·成道(성도)·說法(설법)·涅槃(열반)을 말한다.
·용왕각(龍王閣 ; 水閣) : 한국사원에서 보기 드문 전각으로서 용왕을 모시거나 청정한 물을 위하여 세우는 전각이다.
·용화전(龍華殿 ; 彌勒殿) : 현재 도솔천에서 수도중이며 내세에 성불할 것이라고 이미 수기(授記)를 받은 미륵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 舍利塔殿) :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 전각 가운데 하나로서,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한다.
·조사당(祖師堂 ; 應眞殿) : 선종사찰은 조사(祖師)에 대한 신앙이 강하기 때문에 조사의 사리탑인 부도(浮屠)를 건립하고 조사당을 지어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봉안한다. 한편 영정을 봉안했다는 점에서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천불전(千佛殿) :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기 이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며, 단순히 천불이라 할 때에는 현겁(現劫)의 천불을 말한다.
·칠성각(七星閣) : 칠성도 산신과 마찬가지로 원래 불교와는 무관한 신이나, 산신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 성격을 되찾게 된다. 칠성각에는 칠성의 화현(化現)인 7여래 등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여 신앙하게 된다.
▣ 石塔·浮屠(석탑·부도)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 탑(塔)
① 돌이나 벽돌 또는 목조의 여러 층을 쌓아 종교적·기념적 의미를 나타내는 집 모양의 건축물
② 부처나 승려의 시신의 일부 또는 유품 등을 묻어 두는 무덤의 일종

◎ 부도(浮屠, 舍利塔)
·고승의 열반후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탑. 삼국 시대부터 있었으며, 그 형태는 단층에 8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찰 경내의 변두리에 塔碑(탑비)와 함께 세워진다.

·감실(龕室) : 벽에 작고 우묵하게 만든 자리. 일반적으로 불상 등을 모셔 둔다.
·갑석(甲石) : 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하고 판판한 돌.
·갑석부연(甲石副椽) : 갑석 아래부분에 계단형식의 돌.
·귀꽃 : 석탑 등의 귀마루 끝에 새겨진 초화형(草花型)의 장식.
·기단(基壇) : 건물, 비석, 탑 등의 밑에 한 단 높게 만든 지단(地壇).
·기단부(基壇部) : 기단이 되는 부분. 탑에서는 지반(地盤)에서부터 초층탑신괴임까지이다.
·낙수면(落水面) : 탑이나 비석의 옥개석 지붕면
·노반(露盤) : 탑의 상륜을 받치는 보통 사각형의 돌. 이 노반 위에 복발(覆鉢)이 있다.
·노주(露柱) : 불당 밖의 정면에 세워 둔 두 기둥.
·면석(面石) : 석탑 등에 있어서,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 댄 넓은 돌.
·모각(模刻) : 돌이나 나무에 본떠 새기는 일.
·모전탑(模塼塔) :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깍아서 쌓아 올린 탑.
·몰딩(moulding) : 건축이나 공예에서 창틀, 가구 등의 테두리 장식으로서 보통 사분원(四分圓)의 형태를 띤다.
·문비(門扉) : 문짝.
·반전(反轉) : 반대로 구르거나 굴리는 일, 또는 반대로 뒤집거나 돌아가는 일.
·보개(寶蓋) : 상륜부의 보륜(寶輪)과 수연(水煙)사이에 있는 닫집 모양의 부분.
·보륜(寶輪) : 탑에서 상륜부의 중심이 되는 부분. 노반 위의 앙화(仰花)와 보개(寶蓋)와의 중간에 위치한 9개의 바퀴 모양으로 된 부분.
·보주(寶珠) : 불교의 여의주. 탑이나 석등에서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공 모양의 부분으로서 위가 뾰족하고 좌우 양쪽과 위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형식으로 된 구슬.
·복발(覆鉢·伏鉢) : 상륜부의 노반 위에 있는 발(鉢)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된 부분.
·복련(伏蓮) :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 모양의 무늬.
·부연(附椽) : 처마서까래 끝 위에 씌운 네모진 짧은 서까래.
·사리(舍利) : 부처나 고승의 열반 후 화장(火葬)하면 남는 구슬.
·사리용기(舍利容器) : 사리나 유골을 넣는 용기.
·사리탑(舍利塔) :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셔둔 탑.
·산개(傘蓋) : 탑 꼭대기에 있는 우산 모양으로 장식된 부분.
·상대갑석(上臺甲石) : 석탑에서 옥신석을 받는 크고 넓적한 돌. 상대중석 위에 있다.
·상대중석(上臺中石) : 석탑에서 상대갑석과 하대갑석 사이에 세워진 돌로써 상대갑석을 바치고 있다.
·상륜(相輪) : 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부분.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등으로 구성되는 데 이를 상륜부 또는 탑두부라고도 한다.
·석조(石槽) : 큰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들어진 돌그릇.
·수연(水煙) : 탑의 상륜부에서 보개와 용차 사이에 있는 불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장식.
·안상(眼象) : 격간(格間)이나 석물(石物) 좌대의 8면에 새김질하여 파낸 조각의 한 가지.
·앙련(仰蓮) :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 모양의 무늬.
·앙련좌(仰蓮座) : 앙련을 새긴 대좌.
·앙화(仰花) : 탑 꼭대기의 보륜 밑에 꽃이 위로 피어난 듯이 조각된 부분.
·옥개석(屋蓋石) : 탑의 옥신석 위에 덮은 지붕 모양의 돌.
·옥신·탑신(屋身;塔身) : 불탑에서 탑신부 하부에 있는 옥개를 받치고 있는 돌.
·옥신괴임 : 석탑에서 옥개석과 옥신석을 이어주는 괴임돌.
·용차(龍車) : 석탑 상륜부의 수연과 보주 사이에 있는 일종의 장식물.
·우각(隅角) : 모퉁이, 구석.
·우동(隅棟 ; 仰角) : 탑 옥개석의 귀마루 부분.
·우주(隅柱) : 건물이나 탑의 귀퉁이에 세운 기둥.
·장대석(長臺石) : 섬돌 층계를 놓거나 축대를 쌓는 데 쓰기 위하여 길게 다듬어 만든 돌.
·전탑(塼塔) : 흙벽돌로 쌓아 올린 탑.
·중대석(中臺石) : 석등의 화사석을 받친 대석.
·지대석(地臺石) : 지대를 이루는 돌.
·찰주(擦柱) : 상륜의 심주(心柱).
·청석탑(靑石塔) : 점판암으로 쌓은 탑.
·탑신부(塔身部) : 탑의 기단부와 탑두부 사이에 있는 탑의 몸체를 이루는 부분.
·탑신괴임 : 탑신 밑에 단을 이루어 탑신을 바치는 돌. 상대갑석과 탑신과의 사이에 놓는다.
·탱주(撑柱) : 탑의 기단부 면석 가운데에 있는 버팀목 기둥.
·풍령(風鈴) : 풍경. 처마 끝에 다는 경쇠. 작은 종 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에 쇳조각으로 붕어 모양을 만들어 달아서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려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하대갑석(下臺甲石) : 탑 기단부에서 중석 받침과 하대중석 사이에 있는 받침.
·하대석(下臺石) : 석등이나 또는 탑의 간석, 혹은 상대석 밑에 받친 대석.
·하대중석(下臺中石) : 탑 기단부에서 하대갑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

☞ 석탑 각부의 세부 명칭

☞ 부도 각부의 세부 명칭
▣ 石燈(석등)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간석(竿石) : 석등의 하대석과 중대석 사이의 기둥 부분. 보통 팔각기둥임
·간주석(竿柱石 ; 竿石) : 석등의 하대석과 중대석 사이에 있는 기둥 모양의 부분. 보통 8모 기둥으로 되어 있다.
·간주석괴임 : 간주석을 받치고 있는 돌.
·개석(蓋石) : 비석이나 석등 위에 지붕모양으로 만들어 얹는 돌.
·귀꽃 : 석탑 등의 귀마루 끝에 새겨진 초화형(草花型)의 장식.
·기대석(基臺石) :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 竿石 혹은 竿柱라고도 함)·하대석(下臺石)으로 나뉜다.
·낙수면(落水面) : 탑이나 비석의 옥개석 지붕면
·노주(露柱) : 금당밖 정면에 세운 석조물.
·반전(反轉) : 반대로 구르거나 굴리는 일, 또는 반대로 뒤집거나 돌아가는 일.
·보개(寶蓋) : 상륜부의 보륜(寶輪)과 수연(水煙)사이에 있는 닫집 모양의 부분.
·보륜(寶輪) : 탑에서 상륜부의 중심이 되는 부분. 노반 위의 앙화(仰花)와 보개(寶蓋)와의 중간에 위치한 9개의 바퀴 모양으로 된 부분.
·보주(寶珠) : 불교의 여의주. 탑이나 석등에서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공 모양의 부분으로서 위가 뾰족하고 좌우 양쪽과 위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형식으로 된 구슬.
·복련(伏蓮) :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 모양의 무늬.
·석수(石獸) :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짐승.
·석인(石人) : 왕릉이나 지체 높은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
·앙련(仰蓮) :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 모양의 무늬.
·안상(眼象) : 격간(格間)이나 석물(石物) 좌대의 8면에 새김질하여 파낸 조각의 한 가지.
·연화하대석(蓮花下臺石) : 연꽃 모양으로 상대석을 받친 대석.
·옥개받침 : 옥개석을 받치는 돌.
·옥개석(屋蓋石) : 탑의 옥신석 위에 덮은 지붕 모양의 돌.
·처마( 下) : 지붕이 기둥과 기둥 위에 돌려 얹히는 굵은 재목 밖으로 내민 부분.
·하대석(下臺石) : 석등이나 탑의 간석, 혹은 상대석 밑에 받친 대석.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부분.
·화창(火窓) : 화사석에서 사면을 장방형으로 뚫어 창을 낸 부분으로 이곳에 불을 밝힌다.

☞ 석등 각부의 세부 명칭
▣ 石碑(석비)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귀두(龜頭) : 귀부에서 거북 모양의 머리모양.
·귀부(龜趺) :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
·귀갑문(龜甲文) : 거북의 등껍데기 모양과 비슷한 육각형의 무늬나 모양.
·반룡(蟠龍) : 지상에 서려 있어 아직 승천하지 아니한 용.
·보주(寶珠) : 불교의 여의주. 탑이나 석등에서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공 모양의 부분으로서 위가 뾰족하고 좌우 양쪽과 위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형식으로 된 구슬.
·비신(碑身) : 비문(碑文)을 새긴 비석의 중심되는 돌.
·비좌(碑座) : 비신(碑身)과 비대석(碑臺石)을 연결하는 부분. 비신을 받치는 부분.
·여의주(如意珠, 如意寶珠) : 용의 턱 아래에 있는 구슬. 이를 얻으면 온갖 조화를 부릴 수 있다고 함.
·운룡문(雲龍文) :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의 모양을 그린 무늬.
·이수( 首) : 용 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릿돌.
·전액(篆額) : 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의 제액.
·제액(題額) : 이수 중앙에 액자 모양으로 만들어 글을 써 넣는 부분.

☞ 석비 각부의 세부 명칭
▣ 幢竿支柱(당간지주)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두는 기둥이다. 사찰 경내 전면에는 법당(法幢)을 다는 당간을 세우고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두 개의 지주를 세우게 된다.
지주의 대체적인 형태는 지주 밑에 방형의 대석(臺石)이 마련되고 지주 사이에 원형 간대(竿臺)를 놓아 지주를 고정시켰다. 지주 안쪽은 장식없이 수직으로 되어 있고,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중간에 2∼3개 고정시켰다. 지주 안족은 장식없이 수직으로 되어 있으나 간혹 세로로 능선을 표시한 예도 있다. 내면은 수직으로올라가다가 꼭대기에 1단의 굴곡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주의 기대부(基臺部)는 대부분 파괴되어 지주의 하단부가 노출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으나 완전한 형태의 것도 많다.
또한 당은 사찰의 문 앞에 세우는 기(旗)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기리거나 고승의 명예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또 중생을 계도하고 마군(魔軍)들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불전이나 불당앞에 세운다.

·당(幢) :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을 행할 때, 당간(幢竿)에 다는 불화를 그린 기(旗).
·당간(幢竿) : 사찰 앞에 당을 달아 세우는 데 쓰이는 대.
·괘불대(掛佛臺) : 당간지주와 모습은 유사하나, 일반적으로 법당 바로 앞 좌우에 세워 법회 등의 의식때에 불화 등을 게시한다..

☞ 당간지주 각부의 세부 명칭
▣ 梵鐘(범종)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견대(肩帶) : 천판 주변에 연판문양의 장식이 있고, 상대보다 높은 곳, 종의 어깨부분에 배치되며 고려 전기 종의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
·당좌(撞座) : 종을 치는 부위. 일반적으로 연화문(蓮花文)을 장식한다.
·명문 : 종의 주조(鑄造)와 관련된 기록.
·비천상(飛天像) 또는 불·보살상(佛·菩薩像) : 신라 시대에는 비천상, 고려시대에는 불·보살상,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상대(上臺) : 종신의 상부 주위에 돌린 띠를 말한다.
·용뉴(龍 ) : 종을 종각에 거는 부위로 현가부(懸架部) 또는 종고리라고도 한다.
·유곽(乳廓) : 상대에 인접하여 4개소에 배치한 네모난 장식부를 말한다.
·유좌(乳座)와 유두(乳頭) : 일명 종뉴(鐘 )라고도 함. 유곽 내부의 9乳는 유두 자리인 유좌가 있다. 유의 중심부를 유두라 하고, 유두의 형상은 원호형, 반구형, 볼록한 융기형, 연봉오리형 등이 있다.
·음관(音管) 또는 음통(音筒) : 혹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도 한다. 용두의 뒤쪽에 있는 한국종의 특색으로 되어 있는 원통형 관이다. 종소리와도 관계가 있다고 하며, 표면에는 문장양식이 있다.
·종곽(鐘廓) : 유곽(乳廓)
·종구(鐘口) : 종의 최아래층으로서 입구를 말한다.
·천판(天板) : 종신의 상부에 있는 종의 덮개부를 말하며 천개(天蓋)라고도 한다.
·하대(下臺) : 종하부에 돌린 띠를 말한다.

▶종의 앞과 뒤 - 한국종에서 용두 방향이 앞쪽이고, 음관방향이 뒤쪽이다.
▶종의 두께 - 종 최하부인 종구(鐘口)의 두께가 종의 두께가 된다.

☞ 범종 각부의 세부 명칭
▣ 佛像(불상)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 대좌(臺座)
·금강좌(金剛座) : 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성도(成道)했을 때에 앉았던 자리.
·복련좌(伏蓮座) :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은 대좌.

■ 불신(佛身)
·가사(袈裟) : 스님이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
·감실(龕室) : 불교에서 부처님 등을 모셔두는 방.
·군의(裙衣) : 부처가 입는 아랫도리 내복.
·나발(螺髮) : 나사 모양으로 된 부처의 머리털.
·보관(寶冠) : 보석으로 꾸민 관(冠).
·삼도(三道) : 불상의 목에 음각(陰刻)되어 있는 두 줄기의 선으로 인해 구획된 세 부분. 각각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를 나타낸다.
·소발(素髮) : 부처의 흰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해 별다른 조각이 없는 머리모양.
·우견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는 벗어서 노출하고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형식.
·육계(肉 ) : 부처 32상의 한 가지로 부처 정수리에 상투처럼 돌기한 살의 혹. 인도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올려 묶었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통견(通肩) : 가사(袈裟)가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형식.

■ 광배(光背)
·광배(光背) : 부처의 초인성(超人性)을 상징하여 불신의 뒷면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圓光). 머리 뒤의 것을 두광(頭光), 등 뒤에 있는 것을 신광(身光), 몸 전체를 싸고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것을 거신광(擧身光)이라고 한다.
·보주형 광배(寶珠形光背) : 불신의 광배 중에서 신광과 거신광이 없이 두광만 있을 경우에는 그 광배 전체의 모양이 보주와 유사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 수인(手印)
·선정인(禪定印)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겹쳐 놓되 두 엄지손가락을 마주 대는 형식.
·시무외인(施無畏印) : '無畏' 곧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베풀어 주는 수인.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보호하여 두렵고 무거운 마음을 없애주어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켜주는 대자대비의 덕을 보이는 수인이다.
·아미타불 구품수인((阿彌陀佛 九品手印) : 아미타여래가 취하는 아홉 가지의 손모양을 말한다. 사람이 내세에 나는 것은 본래 타고난 '品'과 부처가 이끄는 '生'의 종류에 따라 아홉가지로 나뉜다. '上品'은 양손을 올린 모양, '中品'은 한손을 올리고 한손은 내린 모양, '下品'은 두 손을 다 내려 배꼽 부근에서 맞잡은 모양으로 표현된다. '품'마다 갈 수 있는 '생'이 셋으로 나뉘니 모두 아홉 가지가 된다. '상생'은 엄지와 검지, '중생'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 '하생'은 엄지와 약지를 맞댄 모습으로 표현한다.
·여원인(與願印 ;施與印 ;施原印 ;與印) :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대자대비의 덕을 표시한 결인(結印)이다.
·전법륜인(轉法輪印) : 석가모니의 설법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처음 정각(正覺)을 이룬 석가모니는 다섯명의 비구를 위하여 녹야원(鹿野苑)에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도(四聖道) 법문을 설하였던 것이다.
·지권인(智拳印) : 비로자나불이 결하는 수인. 그 형상은 좌우 손으로 엄지를 속에 넣고 다른 네 손가락으로 주먹을 쥔 다음에 손가락으로 왼손 집게 손가락의 첫째 마디를 잡는다. 그리고 오른손 주먹 속에서는 오른손 엄지 끝과 왼손 집게 손가락 끝을 서로 댄다. 이러한 형식은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 또는 이(理)와 지(知)는 둘 같지만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함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천지인(天地印) : 탄생불의 모습. 한손은 하늘을, 한손은 땅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인(通印) : 부처의 인상 중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降魔印 ;觸地印 ;指地印) : 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성도하려고 할 때 석가를 협박하고 유혹하려던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

■ 각종 불상, 보살, 신장상
·불(佛 ;부처) : 각자(覺者). 곧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을 일컬음.
·보살(菩薩) : 보살이란 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위로는 부처를 통해 정각(正覺)의 지혜이자 최고의 이상인 불계(佛界)에 이르는 일을 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한다. 특징으로는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전이므로 그 모습이 부처의 출가상(出家相)과는 다를 뿐 아니라 정토(淨土)에서 부처를 모시는 존재이므로 천계(天界)의 복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장(神將) : 수많은 호법 선신(善神) 가운데 무력으로 적을 항복시키며, 불법을 옹호하고 불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

·가릉빈가(迦陵頻伽) : 칼라빙카.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 극락정토에 산다고 하여 '극락조'라고도 한다.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새의 모습으로 생겼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건칠불상(乾漆佛像) : 진흙으로 골을 만들어 삼베로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바른 다음 숫돌 가루를 섞은 칠을 바르고, 속에 들어 있는 골을 빼내어 버린 속이 빈 소상(塑像).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괴로울 때 이 보살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해 준다고 한다.
·나한(羅漢) : 아라한(阿羅漢)의 준말,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불상에 있어서는 대개 수행상으로 표현된다. 16나한, 5백나한, 10대제자 등.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 삼불(三佛)의 하나. 지혜의 광명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道 : 악인이 죽어서 간다는 세 괴로운 세계)에서 건지는 보살이다.
·마애불(磨崖佛) : 암벽에 새긴 불상.
·문수보살(文殊菩薩) : 석가 여래의 왼편에 있는 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다.
·범천(梵天) : 제석천과 한가지로 불상의 좌우에 모시는 신으로 범천왕의 준말.
·법신불(法身佛) : 법과 진리를 의미하는 근본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말한다.
·보현보살(普賢菩薩) : 석가 여래를 오른쪽에서 모시고 이(理)·정(定)·행(行)의 덕을 맡아보는 보살이다.
·비로자나불 : 연화장(蓮花藏) 세계에 살며, 그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비춘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나 진리(眞理) 그 자체이며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진리의 구형체인 석가의 본신(本身)이기도 하다.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비천(飛天) : 비천은 하늘 곧 상계에 살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상상의 선인.
·사천왕(四天王) : 사방을 수호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네 신.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각각 두명의 팔부중을 거느리며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면서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수호한다고 한다.
·삼불(三佛) : 극락 세계에 있는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일컫는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 阿는 '無', 彌陀는 '量'의 뜻. 곧 無量光·無量壽의 뜻. 서방 정토에 있다고 하는 부처의 이름이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은 부처인데, 이 부처를 염하면 죽은 후에 극락 세계에 간다고 한다.
·약사여래(藥師如來) : 12대원(十二大願)을 품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法藥)을 준다는 여래로서 보통 왼손에는 약병을 가지고 있다.
·응신불(應身佛) : 삼신불(三身佛)의 하나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태어난 석가모니.
·인왕(仁王) :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인데, 산문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쌍의 금강역사를 말한다. 금강신(金剛神),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 : 범왕(梵王)과 더불어 불법을 지키는 신. 12천의 하나로서 동쪽의 수호신이다.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에 살고, 희견성(喜見城)의 주인으로서 대멸덕(大滅德)을 지니고 있다.
·천(天) : 광명(光明)·자재(自在)·최승(最勝) 등의 뜻. 호법신(護法神)으로 불교에 흡수된 인도의 여러 토착신들의 총칭이다.
·천인상(天人像) : 비천상(飛天像). 비천은 하늘 곧 상계에 살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상상의 선인(仙人).
·팔부중(八部衆) :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장으로 곧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파(乾 婆)·아수라(阿修羅)·가루나(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迦)이다.

■ 불상의 자세(姿勢)
·결가부좌(結跏趺坐) : 완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가부좌. 두 가지가 있는데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얹고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얹어 놓은 것을 항마좌(降魔坐)라 하고, 그 반대를 길상좌(吉祥坐)라고 한다.
·교각상(交脚像) : 두 다리를 밑으로 늘여뜨리지만 양 발목을 서로 교차시키고 단(壇)에 걸터앉은 모습을 본뜬 불상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 왼쪽 무릎 위에 오른다리를 걸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손 손가락을 대어 명상에 잠겨 있는 상. 본래 출가 전의 삿다르타가 태자 시절에 인생의 네가지 고통인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뇌하는 상에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모습을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무렵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하나의 독립된 상으로서 널리 숭앙되었다.
·삼굴(三屈) : 부처의 입상 자세 중의 하나. 몸의 무게를 한쪽 다리에만 얹고 다른 다리는 무릎을 꺽고 발을 약간 앞으로 내놓은 자세이다. 앞에서 보아 몸이 무릎, 엉덩이, 목의 세 군데에서 꺽이는 결과가 된다.
·열반상(涅槃像) : 석가가 입멸할 때의 모습을 본뜬 와상(臥像), 두 다리를 가지런히 뻗고 모로 누운 상이다.
·의상(倚像) : 두 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밑으로 늘어뜨리면서 걸상에 걸터앉은 상이다.
·입상(立像) : 두 발을 가지런히 해서 직립한 자세이다.
·장륙상(丈六像) : 높이가 1장 6척이 되는 불상.
·좌상(坐像) : 삼매경(三昧境)에 빠질 수 있는 자세로, 항마좌와 길상좌가 있다.
·탄생불(誕生佛) : 석가모니가 탄생했을 때의 모습. 부처는 탄생하자마자 7보를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자세는 바로 이 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불상 각부의 세부 명칭
☞ 수인 및 자세 1
☞ 수인 및 자세 2
▣ 建築(건축)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가구(架構) : 공간을 형성하는 목조 건물의 골격 구조.
·겹처마 : 처마 끝 서까래가 2단 이상으로 된 처마.
·고복형(鼓腹形) : 고복(鼓腹)은 세상이 안락하고 태평하여 의식이 풍부해서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고복형은 배가 불룩 나온 형을 말한다.
·고주(高柱) : 평주(平柱)보다도 키가 큰 기둥.
·공간포(空間包) : 다포(多包) 집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짜 놓은 공포( 包).
·공포( 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들의 총칭.
·교두(翹頭) : 살미나 첨차의 하단이 원호(圓弧)로 잘라진 모양 또는 그 부분.
·굴도리 : 단면이 둥그렇게 된 도리(道里).
·기단(基壇) : 집터에 집을 짓기 위해 높이 쌓은 단.
·기둥 : 주춧돌(초석) 위에 세워서 기둥 위로부터 오는 무게를 받치는 나무.
·기둥머리 : 기둥의 윗부분.
·꽃살문 : 문살에 꽃무늬를 놓아 만든 문.
·난간(欄干·欄杆) : 층계나 다리 등의 가장자리에 가로 세로 나무나 쇠를 건너 세워 놓은 살.
·납도리 : 단면이 사각형인 도리(道里).
·대공(臺工) : 대들보 위에 서서 종보와 중도리(中道里)를 받치거나, 종보 중앙에 서서 종도리(宗道里)를 받치는 구조물.
·대들보 : 기둥 위에 얹힌 들보 중에서 가장 큰 지붕보.
·도리(道里) : 기둥과 기둥 위에 돌려 얹히는 굵은 재목.
·동자주(童子柱) : 대들보 위에 세워 종도리와 종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
·맞배지붕 : 건물의 측면에서도 지붕면이 용마루까지 올라가게 되어 측면에 삼각형의 벽이 생기는 지붕.
·민흘림 : 기둥의 상하 굵기가 똑같은 양식.
·배흘림 : 기둥의 중간이 가장 굵게 되고, 상하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게 하는 기법. 기둥 높이의 3분의 1 되는 부분이 가장 굵고, 위는 밑동보다도 더 가늘어지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같은 기법은 기둥의 구조상의 안전성과 시각상의 착오를 시정하고자 하는 착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엔터시스'라고도 한다.
·보 : 간과 간 사이의 두 기둥의 가로지른 나무.
·부연(附椽) : 처마 서까래 끝 위에 덧얹는 네모진 짧은 서까래.
·사래 : 지붕 귓부분 추녀 위에 대각선으로 댄 부재.
·사천왕문(四天王門) : 절을 지키는 의미에서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만들어 좌우에 세운 문.
·살창 : 울거미 없이 인방 또는 문틀에 살대를 나란히 세워 댄 창.
·서까래(연목:椽木) : 지붕 경사에 따라 도리에서부터 처마끝까지 건너지른 나무·서까래.
·소로(小累) : 두공·첨차·제공·장여·화반 등의 사이에 틈틈이 끼우는 네모난 사각 목재.
·소로굽 : 빗깍거나 둥글게 굴려 도려 낸 소로의 아랫부분.
·솟을대문 : 지붕이 좌우간 또는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만든 대문.
·쇠서(牛舌) :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部材).
·연암 : 처마 끝에서 암기와를 받치는 부재.
·이익공(二翼工) : 기둥 위에 덧붙이는 쇠, 촛가지가 둘로 된 익공.
·익공(翼工) : 익공집에서, 첨차( 遮) 위에 얹히어 있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
·인방(引枋) : 기둥과 기둥, 또는 문설주에 가로질러 벽체의 뼈대 및 문틀이 되는 가로재.
·일주문(一柱門) : 절의 입구에 기둥을 일렬로 세워 만든 문.
·장여(長舌) : 도리(道里)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
·제공(諸工) : 공포에 있어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으로 짜인 것.
·종도리 : 가장 윗부분에 있는 도리.
·종량, 종보 : 보 위에 걸은 보.
·주두(柱頭) : 기둥머리 위에 놓여 포작(包作)을 받아 공포를 구성하는 대접처럼 넓적하게 네모난 나무.
·지붕마루 : 지붕과 지붕이 마주친 곳에 높이 쌓은 턱.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있음.
·창방(昌枋) : 기둥과 기둥머리 사이를 뚫고 건너 가로 지른 부재.
·처마( 下) : 지붕이 벽 바깥으로 나온 부분.
·첨차( 遮) : 기둥머리나 소로 위에 도리와 평행 방향으로 얹힌 짤막한 공포 부재의 한가지.
·초석 : 礎石(주춧돌, 주초석) 기둥 밑을 괸 돌.
·추녀 : 처마 네 귀의 기둥 위에 끝이 번쩍 들린 크고 긴 서까래.
·출목(出目) : 공포에 있어서 첨차가 주심(柱心)으로부터 돌출되어 도리나 장여를 받치는 것.
·퇴간(退間) : 집채의 원간살밖에 딴 기둥을 세워 붙여 지은 간살.
·평방(平枋) : 기둥 머리 위에 얹혀 기둥과 기둥 사이로 건너 가로지른 평평한 부재.
·포(包) : 동양식 목조 건축에 있어서 처마를 길게 내밀기 위하여 기둥 위 처마 도리밑에 짧은 부재(部材)를 써서 장식적으로 받치게 한 부재의 총칭.
·홑처마 : 처마 서까래만으로 된 처마, 부연을 달지 아니한 처마.
·화반(花盤) : 초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하여 화분·연꽃·사자 등을 그려 끼우는 판조각.
·활주(活柱) :추녀 뿌리를 받치는 가는 기둥.

▶지붕의 꾸밈새
·3량(樑)집 : 건물을 측면에서 단면으로 봤을 때 도리가 3개인 집.
·5량(樑)집 : 건물을 측면에서 단면으로 봤을 때 도리가 5개인 집.
·7량(樑)집 : 건물을 측면에서 단면으로 봤을 때 도리가 7개인 집.
☞ 한국의 건축양식

건축은 그 양상이 다양하고 발전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그 근본은 인간의 본능적 건축 행위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사시대에 본능적으로 조작된 건축의 기본형이 어떠한 경로와 발전과정을 거쳐서 고유한 한국건축으로 형성·발전되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건축이란 석재·목재·전재 등에 의한 모든 가구물을 말하며, 탑·성곽·교량·석빙고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답사과정에 참고가 되도록 건축의 일반적인 뜻인 기와를 덮은 목조와가당우물(木造瓦家堂宇物)을 서술 대상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시대별·양식별 특징 등을 서술하고자 한다.

Ⅰ.시대별 건축양식

① 구석기시대 :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공주 석장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자연동굴이 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② 신석기시대 : 움집=수혈식주거지·귀틀집·고루식 등을 거치며 평면적인 생활공간으로 발전되어 갔다고 여겨진다. 이것들은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주거형식이 되었다. 이후 한사군 설치에 따르는 중국건축양식의 보급과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에 따른 중국 육조시대 건축양식 등의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궁궐이나 사원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목조와가(木造瓦家) 건축양식이 정착되었다.
③ 고구려 : 안악 3호고분(357). 6세기경의 쌍영총·무용총·장군총 등의 고구려 고분의 축조방식이나 고분벽화에 그려진 목조건물 구조를 살펴보면 단층 또는 중층의 우진각 지붕에 두포·도리·소루·기둥 등과 보주형이나 우각형의 치미 등이 구비된 채색단청의 목조와가건축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④ 가야 :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 형태의 고루식가형토기(高樓式家形土器) 출토
⑤ 신라 : 『삼국사기』권33 지(志) 제2 실사조(室舍條)에 성골 이하의 계급에는 막새기와나 금·은칠을 한 단청을 못하게 한 기록으로 보아 기술의 발전과 계급별 가옥의 차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군치지(郡治址)나 사지(寺址) 및 그곳에 출토된 와당과 부재 등의 유물을 통해서 본격적인 목조 건축술이 이미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⑥ 고려 : 고려의 건축양식은 주심포·다포양식의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주심포 양식은 중국의 재래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듯 삼국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남송에서 세부적인 변화 후 새로운 주심포 양식으로 변화하여 고려시대에 다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포양식은 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다. 현재 고려 중기 이후의 건물이 남아 있다. 고려 말기 두 양식의 절충양식도 나타나며 이러한 양식들은 조선시대에 그대로 이어진다.
〔주심포 양식의 예〕
봉정사 극락전(경북 안동시 서후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부석사 무량수전 및 조사당(경북 영주시 부석면)/수덕사 대웅전(충남 예산군 덕산면; 1208년의 墨銘 발견)/강릉 객사문
〔다포 양식의 예〕
심원사 보광전(황해도)/성불사 응진전(황해도)/석왕사 응진전(함경남도)
⑦ 조선 : 전반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세부적으로 장식화된다. 그러나 당대의 중국이나 일본의 건축에 비하면 한국색이 뚜렷하고 불필요한 곡선·부가물을 떠난 소박하고 겸손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인공을 최소한으로 줄인 '정원'에서 더욱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15세기까지)에는 다포집이 증가하나 고려 건축의 전통이 남아서 견실하고 실용적이며 공포에 있어서도 쇠서가 간결하여 고졸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개성 남대문(1394)/서울 남대문(1938; 다포양식으로 조선시대 성문 중 백미, 본명은 숭례문)/강진 무위사 극락전(주심포집, 내부벽화 밑에서 1476년 記銘의 벽화가 발견)/강화 수사 법당(1426)/여주 미륵사 조사당(1469)/합천 해인사 판고/서산 개심사 대웅전(1484)/순천 송광사 국사전·하사당/영암 도갑사 해탈문(1473)/강릉 문묘대성전.〕
·중기(16-17세기)의 건축은 초기에 비해 쇠서가 갸날파지고 쇠서에 계속되는 첨자의 측면에 여러 가지 초화문(草花文)을 새기는 등 장식성이 증대하고 다포집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강릉 해운정(1530)/오죽헌/안동 도산서원 전교당상덕사(1574)/경주 옥산서원(1572)/영주 소수서원/강화 전등사 대웅전(1621; 정면·측면 각 3간의 팔작지붕, 다포집)/강화 전등사 약사전/보은 법주사 팔상전(1624; 현존 유일의 오층목탑형식건물로서 중요)/양산 통도사 대웅전〕
·후기(18-19세기)의 건물에서는 공포의 쇠서와 첨차 사이에 초화동물형(草花動物形)을 입체적으로 조각하고, 살미첨자는 원래의 구조적 부재로서의 성질에서 벗어나 간략화되어 마침내 익공(翼工)이라고 불리는 한 장의 장식판처럼 변화되었다. 익공식은 한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존재이다.〔수원 화성 팔달문(1796)/밀양 영남루(1844)/경복궁 근정전(1867)/서울 동대문(1869)/구례 화엄사 각황전(1724; 중층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최대 사찰건물)/경주 불국사 극락전·대웅전/합천 해인사 대웅전(1769)〕

Ⅱ. 양식별 특징

① 주심포 양식
기둥 윗부분에만 역학적으로 된 공포( 包)가 꾸며지고 기둥과 기둥을 잇는 창방(昌枋)이 있으며, 주두(柱頭)나 소로(小累) 끝이 곡면화되고 굽받이도 나타나며 첨차( 遮) 하단에는 S자형 중복 곡면이 생긴다. 기둥은 배흘림(Entasis)양식이며, 천정은 연목과 보가 모두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정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 대부분이다.
② 다포양식
공포가 주두(柱頭)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고, 창방(昌枋) 위에 평방(平枋)이 또 놓여지고 있다. 주두와 소로의 끝은 사면(斜面)이고 굽받침은 없어지며 첨차하단의 끝은 둥글게 되거나 운공형(雲工形)으로 변화되었다. 천정은 서까래가 보이지 않게 바자를 설치한 우물 천장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올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궁궐건축에 성행하였다.
③ 익공식
16세기 후반에 일어난 양식으로 공포가 간략화된 주심포의 변형으로 주두 위에 날개 모양의 공포가 있어 얼마간의 장식효과와 주심도리를 조금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양식이다. 익공이 하나인 것을 초익공, 상·하 둘로 된 것을 이익공, 셋이 달린 것을 삼익공이라 하며 이들은 주로 중요도가 적은 사당·도성·관아 등의 소규모 건물에 사용되고 있다.
④ 도리식
주두 위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기둥이 직접 도리를 받는 양식으로 도리가 원형인 굴도리식, 각이 진 납도리식 등이 있고, 주로 향교나 서원, 또는 일반주택에 사용하고 있다.

Ⅲ. 건물의 지붕 모양

팔작지붕·우진각지붕·맞배지붕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제외하고 모두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사찰·관아나 상류주택 등의 중요 건물에만 팔작지붕을 하였고, 성문·궁궐대문·상류주택 대문 등에는 우진각 지붕을, 사찰의 부속전각·상류주택의 행랑채와 서민주택의 몸체 등에는 맞배지붕, 정자·종루 같은 집은 사모·팔모지붕, 경복궁의 향원정은 6모지붕, 왕릉의 정자각은 T자형 지붕, 통도사 대웅전처럼 정(丁)자형 지붕도 있다.

Ⅳ. '창(窓)'과 '문(門)'

창과 문은 항상 사람이 직접 접촉하는 기능을 가졌고, 미관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통풍과 온도의 조절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조명의 구실도 훌륭히 하여 방안 전체를 은은하게 밝혀준다. 따라서 문창살의 모양은 다양하며 주건물이나 부속건물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곧 일반적인 정자살문(井字)·띠살문·아자문(亞字)·소슬빗살문·용자문(用字) 외에 상류주택의 구조물에 사용된 귀자문(貴字)·귀갑문(龜甲) 또는 복잡하게 변형된 아자문, 숫대살문 등이 있으며, 특히 궁궐의 중심건물이나 사찰의 주법당에는 모란문(牧丹)이나 연화문(蓮花) 또는 온갖 화려한 화문을 투각한 빗꽃살문이나 소슬꽃살문 등으로 장식하게 된다.

Ⅴ.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

우리나라 건축은 중국의 경우처럼 웅장한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대하고도 권위적인 규모도 아니며, 일본의 경우처럼 세부적인 면에 흐른 구성과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환경에 잘 조화된 규모와 기능에 맞는 실질적인 건축미가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한국적 특징이라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조학적인 면에서 기둥에 배흘림이 있어 기둥이 빈약하게 보이지 않는 시각적인 효과와 서까래가 추녀면에 직각으로 되지 않고 부채살처럼 벌어져 있다는 점.
② 귀솟음이라 하여 양쪽 갓 기둥을 약간 높이고 추녀를 반전시켜 멀리서 보면 지붕의 양끝이 처져 보이지 않게 한 점.
③ 안쏠림이라 하여 역시 가의 양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게 하여 지붕의 전체가중이 밖으로 퍼지는 안전한 역학적 기능.
④ 지붕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직각 사각형이 아니고 사변이 내변된 모양 등 역학적이면서도 시각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 팔작기와 지붕 각부의 세부 명칭

☞ 법당 내부의 세부 명칭
▣ 城廓(성곽) 관련 문화재 용어 해설

·각루(角樓) : 전망대와 감시초소의 기능을 겸한다.
·공심돈(空心墩) : 원거리 상황을 볼 수 있는 초소. 공심돈은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다.
·노대(弩臺) : 성보다 한 단 높게 쌓아 총이나 포로 공격하는 곳이다.
·봉돈(烽墩) : 봉화를 올려 멀리 신호를 보내는 곳이다.
·수문(水門) : 가까운 하천의 입·출구로 감시초소를 두는 곳.
·암문(暗門) : 문루가 없이 석축 부분에 있는 사잇문. 적에 노출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닫으면 성벽처럼 보인다.
·옹성(甕城) : 성문에 접근한 적을 포위·공격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겹 더 성벽을 쌓아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물이다. 항아리를 반으로 자른 것 같다 해서 옹성이라 부른다.
·용도(甬道) : 성벽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좁게 성밖으로 길게 내뻗게 하여 외성 또는 치성과 연결하는 통로이다.
·장대(將臺) : 성안의 사령본부.
·치성(雉城) : 성곽 중 일부가 돌출한 구조로 성곽 아래의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
·포루(砲樓) : 중화기(中火器) 공격을 위해 성곽에 구멍을 낸 것.
·포루(鋪樓) : 성곽 요소요소에 두어 소화기(小火器) 공격을 한다.
·해자(垓子) : 성벽의 주변을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물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이다.
·행궁(行宮) : 유사시 또는 지방 휴양을 위한 왕의 거처.
·현안(懸眼) : 적대의 위쪽 바닥에 안구(眼口)를 두고 외벽면을 수직으로 뚫어 성벽에 접근해 기어오르는 적을 물리칠 수 있게 한 구조물이다.

▶ 테뫼식 산성〔山頂式〕 : 성곽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둘러 쌓은 산성, 단시간의 전투에 활용하기 위한 산성이다.
▶ 포곡식(包谷式) :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을 말하는데, 장기간 전투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생활에 필수적인 물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 복합식 산성 : 테뫼식과 포곡식을 복합한 산성으로 규모가 큰 산성이나 도성에 해당된다.

Ⅲ. 추천 답사 코스


▣ 미리 읽어두기

1. 교사(부모, 안내자)의 역할

우리 인간은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느낀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면 새롭게 보이고 다르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야 감동이 생기고, 감동이 있어야 그 유물에 대한 합당한 가치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야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표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 시대의 문화이며, 그것이 바로 훗날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장학습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어떠한 관점을 가지게 되고 대상을 바라보는 목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유서깊은 역사의 도시 - 경주, 부여, 공주를 굳이 찾지 않더라도, 바로 우리 주변의 것들을 인식하고 새롭게 보는 방법부터 학습하게 되면, 어떠한 장소에서 문화재를 대하더라도 그 유물이 가진 정신적·미적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발견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자긍심으로 자라나 타인 앞에 의젓할 수 있고, 개성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부모, 안내자)는 학생들에게 자기 주변의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는 자세를 길러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극복해야 할 어려움

·문화재와 관련한 용어가 성인 중심의 기술이며, 한자어 중심의 특수 용어이며, 또한 전문 용어가 많아 참고할 만한 도서가 없다는 것.
·문화 행사에 대하여 교사(부모, 안내자) 자신이 접하는 정보의 부족.
·유관기관과의 연계 체제 형성에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
·안전 사고에 대한 부담.
·기존의 자료와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참여 교사(부모, 안내자)의 개인적 희생이 요구된다는 점


3. 답사 출발전 준비사항

·사전 조사(장소, 시간, 답사유물 등 기초적인 조사)
·답사 목적(개인별 관심 영역 파악)
·각 유물별 중요 용어 파악


4. 개인별 답사보고서 작성 요령



▣ 추천 답사 코스
·불교 유적 A코스 : 황상동 마애여래입상→구미척화비→해평 보천사 석조여래좌상→도리사→낙산리 삼층석탑→모례가정→(대둔사)→선산 죽장사지 오층석탑
·불교 유적 B코스 : 해평 보천사 석조여래좌상→도리사→낙산리 삼층석탑→모례가정→(군위 소보 위성동 마애삼존입상)→궁기리 석조보살좌상 2구→선산 비석거리 유물→선산 죽장사지 오층석탑→수다사
·유교 유적 A코스 : 금오서원→선산 비석거리→선산객사→단계 하위지선생유허비→선산향교→일선리 문화재 단지→낙봉서원→매학정→봉한 삼강정려
·유교 유적 B코스 : 금오산 채미정→경은 이맹전 유허비→지주중류비→동락서원·인동향교→황상동 마애여래입상→구미척화비→인동입석 2구
參 考 文 獻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一善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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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집 후 기

각 시대의 문화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본의든 타의에 의하든 조형물 건립에 따른 분명한 조형의식과 당연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죽어있는, 그냥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유물·유적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아들로서 유물·유적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 고적을 답사하는 진정한 목적은 그들을 나에게로 유인해서 석공의 내면 세계와 손 끝에서 표출되는 미의 향연을 느끼기 위함입니다. 나아가서는 유적·유물을 통하여 당 시대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사상적 배경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무릇 모든 조형활동은 어느 것 하나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이 없고, 다른 분야와 혹은 다른 양식과의 관련속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적·유물을 마주할 때 예술작품으로서 技巧(기교)만을 감상한다면, 치열한 시대정신을 간과하는 안타까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歷史(역사)'란 '과거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그렇기에 역사의 현장을 답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場(장)으로 나를 이끄는 행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자료집은 얼마되지 않은 교편생활 중에 느낀 향토 문화유적에 대한 아쉬움의 일환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미 구미시와 문화원 관계자 분들께서 많은 향토자료집을 편찬하여 지역 이해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사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조금은 난해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듯 합니다. "한국문화사"에 대한 이해는 이미 전술하였지만, 전문적인 용어와 고어체의 서술문이 초래하는 이해의 장벽, 그리고 다양한 지식적인 측면이 요구되는 분야이기에 그리 용이한 작업이 아닐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실제 답사 현장에서 휴대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자료집을 만들려 노력하였습니다. 사진이나 도판이 게재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역시 현장에서 참고한다는 기본 목적으로 인해 생략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이 자료집을 계기로 많은 학생들의 향토사 학습이 활성화 되기를 바라며, 더불어 주위 분들의 많은 질책과 조언을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서적을 참고하였으나, 지면 관계상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선학들께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구 미 현 일 고 등 학 교 전 정 중
출처 : 문화유적 답사회
글쓴이 : 김환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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