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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가르침

[스크랩] 퇴계 이황의 생애[년대표]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6. 3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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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이황의 생애

1501년(1세)
11월 25일 예안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506년(6세)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다.
1512년(12세)
숙부 이우(호는 송재)에게 『논어』를 수학. 사서삼경을 순차적으로 익히다.
1514년(14세)
도연명의 시를 애독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다.
1517년(17세)
모재 김안국을 뵙다.
→ 당시 관찰사 였던 모재는 순행 중에 온혜를 들렀다가 이해·이황 형제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학자금을 주고서 격려하였다.
○ 학업에 열중하다가 병을 얻었다.
1518년(18세)
「野塘」시를 짓다.
○ 안동 향교에서 학업을 닦았다.
농암 이현보가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고을의 선비를 모아 교육하였다.
1519년(19세)
『성리대전』을 읽다.
→ 뒷날 "이 책의 「태극도설」은 내가 계발된 출발점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1520년(20세)
『주역』을 읽다.
→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열중하여 평생의 지병을 얻었다.
1523년(23세)
성균관에 입학하다.
○ 『심경』을 처음으로 읽다.
→ "내가 심경을 보고나서야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초학자가 공부할 것으로 이 책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1527년(27세)
생원시에 합격하다.
1528년(28세)
진사시에 합격하다.
1533년(33세)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 가을, 고향 가는 길에 여주를 지나면서 모재 김안국을 방문하다.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서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회고하였다.
○ 봉계를 지나면서 야은 길재의 옛터를 찾았다.
「길선생의 사당을 지나며(過吉先生閭)」를 지었다.
1534년(34세)
3월, 과거에 급제하다.
○ 4월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10월, 문신들의 정시(廷試)에서 수석하여, 승문원 저작에 올랐고,
12월에는 박사로 승진하였다.
1535년(35세)
6월, 여주목사 이순과 「황극경내편」과「참동계」의 수련법을 토론하다.
1541년(41세)
3월,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다.
→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부르는데,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다.
문신관료를 엄선하여 글을 읽혔다. 선발된 사람은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1542년(42세)
2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옥당에 숙직하면서 지은 매화시가 있는데,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매화를 좋아하여 평생 200수가 넘는 매화시를 지었다.
○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 이언적을 전송하였다.
○ 8월, 예안으로 귀향하는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였다.
1543년(43세)
『주자전서』를 읽다.
→ 이 책을 교정할 것을 계청하고, 교감을 담당하였다.
1545년(45세)
4월, 하서 김인후가 내방하였다.
○ 10월, 홍문관 전한으로 있던 중 권신 이기의 요청으로 삭탈 당하였다가
12월에 직첩을 도로 받았다.
1546년(46세)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 왔다.
○ 11월 양진암을 퇴계 동쪽 바위 위에 지었다.
○ 시내의 이름은 본래 토계였으나, 퇴계로 고치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7년(47세)
4월, 월란암에 머물면서 『심경』을 읽다.
1548년(48세)
정월,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 10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1549년(49세)
정월, 백운동서원에서 선비들과 강학하였다.
○ 농암 이현보의 「어부사」에 발문을 썼다.
○ 12월,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다.
→ 나라에서 서적과 노비를 내려 주고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보내주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1552년(52세)
4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다.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53년(53세)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다.
→ 정지운의 호는 추만,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제자이다.
1554년(54세)
3월, 「역범제도병」의 발문을 지었다.
○ 포은 정몽주의 제문을 지었다.
○ 『연평문답』의 발문을 썼다.
→『연평문답』은 주자가 그 스승 이동(호는 연평)에게 배운 것을 정리한 책이다.
○ 「계몽도서절요」의 발문을 썼다.
1556년(56세)
6월,『주자서절요』를 완성하다.
→ 주자의 방대한 글에서 학문에 관계된 것, 실용에 절실한 것을 골랐다.
1557년(57세)
7월,『계몽전의』를 완성하다.
→ 주자의 『역학계몽』에서 난해처와 의문처를 풀이한 것이다.
1558년(58세)
5월, 『자성록』을 완성하다.
→ 벗들과 주고 받은 편지 중에 골라 모아 반성의 자료로 삼은 것이다.
○ 6월, 제자들에게 인심도심설과 선기옥형을 강의하였다.
1559년(59세)
2월, 「이산서원기」를 짓다.
→ 이 서원은 영주의 선비들이 세웠는데, 그가 서원의 기문과 원규를 지어 보냈다.
「이산서원원규」는 뒷날 영남지역 서원의 강령이 되었다.
○ 9월, 『고경중마방』을 완성하다.
→ 선현의 글 가운데 마음 수양에 긴요한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 12월, 『송계원명이학통록』을 편찬하다.
→ 주자서와 어류, 실기, 일통지 등을 참고로 하여 송말, 원, 명 시대 유학자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1560년(60세)
○ 11월, 고봉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을 변론하다.
→ 이에 앞서 고봉 기대승이 「천명도설」을 보고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1559년 기대승의 편지로부터 시작하여 8년 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 우리나라의 유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1561년(61세)
가을, 도산서당이 완공되다.
→ 이로부터 도옹이라는 호를 썼다. 이곳에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찾아오는 문인들과 강학하였다.
1562년(62세)
3월, 『이락연원록』의 발문을 짓다.
1564년(64세)
2월 「무이구곡도」의 발문을 짓다.
○ 9월,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 「심무체용변」을 짓다.
→ 이 글은 연방 이구의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는 글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1565년(65세)
2월, 「서원십영」시를 짓다.
○ 3월, 「도산십이곡」의 발문을 쓰다.
→ 12곡의 전6곡은 언지(言志)이고 후6곡은 언학(言學)이다.
○ 「인심도심도」를 개정하였다.
1566년(66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 현인를 초빙하고자 하는 명종 임금의 뜻이 간절하였으나, 그가 사양하고 나가지 않자, 도산서당을 그림 으로 그리고, 여성군 송인을 시켜 이황이 지은「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적어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 고 보았다고 한다.
→ 손님을 사절하고, 문인들에게 『심경』과 『참동계』 또는 주자서를 강의하였다.
○ 「심경후론」을 짓다.
→ 『심경』은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의 저작이다. 이황은 이 책을 존중하여 사자서,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 「전습록논변」을 짓다.
→ 왕수인의 학설이 식자들 간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양명설의 잘못을 반박하였다.
○ 10월, 회재 이언적의 행장을 짓다.
1568년(68세)
○ 3월, 「역동서원기」를 짓다.
→ 서원의 이름을 정하고 편액 글씨를 썼다.
○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리다.
→ 새 임금 선조에게 치자의 도리와 당면 시무를 건의한 것이다.
○ 9월 이후,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이천의 「사물잠」과『논어』『주역』,
장횡거의 「서명」과 『소학』을 강의하였다.
○ 11월,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다.
→ "나의 보국은 이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두라고 하였다.
1569년(69세)
정월, 이조판서에 임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 3월, 판중추부사를 제수받고서 물러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대학』의 8강령과 「심통성정도」의 요지를 설명하였다.
○ 도산으로 돌아와 지냈다. 도산 매화와 주고받은 시가 있다.
1570년(70세)
5월, 제자들과 역동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다.
○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역학계몽』을 강론하였다.
○ 7월, 역동서원에서 문인들과 『심경』을 강론하였다.
○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었다. 위패의 칭호와 제의, 서원규약 등을 정하였다.
○ 10월, 기대승에게 글을 보내, 「심통성정」을 논하였다.
○ 11월,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격물치지설을 고쳤다.
○ 12월 8일, 세상을 떠나다.
→ 12월 17일, 대궐에 부고가 올라가자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상장례에 대신의 예를 쓰도록 하였다.
→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에 조문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
11월, 영주의 선비들이 위패를 이산서원(영주, 이산면 소재)에 모셨다.
1573년
3월, 임금이 예조에 전교하기를, "이황의 저서와 문자는 후세에 전할 만 하다"라 하고
교서관에서 인출하라고 명하였다.
○ 여름 도산서원이 낙성되다.
→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보냈다.
1574년
2월,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였다.
→ 여강서원(안동 월곡면 소재)에서도 위패를 봉안하였다.
○ 12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문의 뜻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순의 뜻은 '중정순수(中正純粹)'이다.
1600년
5월, 퇴계선생문집 초간본 31책이 간행되었다.
1610년
4월, 종묘의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9월,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하다.
1792년
3월 24일, 정조가 각신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치제하였다.
→ 이 때, 서원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이 때 응시자가 만여명이 되고,
뒤에 시사단을 세워 이 사실을 기념하였다.

출처 :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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