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Tags
- 태화강국가정원의 억새숲
- 태화강 억새숲 국가정원 코스모스꽃
- 오블완
- 태화강의 여름 풍경.
- 태화강국가정원의 가을.
- 태화강의 백로떼
- 태화강 국가정원 국화원
- 태화강 국가정원 봄꽃축제
- 태화강
- 태화강국가정원
- 태화강국가정원의가을
- 태화강 국가정원의 백로떼
- 태화강 해오라기
- 태화강의 해오라기떼
- 태화강 국가정원
- 태화강 국가정원의 여름풍경
- 태화강 해오라기.
- 태화강의 여름풍경
- 태화강의 겨울 동물
- 태화강 잉어산란
- 태화강 누치떼
- 문주란 꽃
- 흰날개 해오라기.
- 태화강국가정원 봄꽃축제
- 티스토리챌린지
- 태화강 국가정원의 겨울풍경
- 태화강의 여름조류.
- 태화강 수달
- 태화강의 봄풍경. 태화강 국가정원의 봄
- 왜가리떼
Archives
- Today
- Total
바람따라 구름따라
[스크랩] 퇴계 이황의 생애[년대표] 본문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이황의 생애
1501년(1세) |
11월 25일 예안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
1506년(6세) |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다. |
1512년(12세) |
숙부 이우(호는 송재)에게 『논어』를 수학. 사서삼경을 순차적으로 익히다. |
1514년(14세) |
도연명의 시를 애독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다. |
1517년(17세) |
모재 김안국을 뵙다. → 당시 관찰사 였던 모재는 순행 중에 온혜를 들렀다가 이해·이황 형제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학자금을 주고서 격려하였다. ○ 학업에 열중하다가 병을 얻었다. |
1518년(18세) |
「野塘」시를 짓다. ○ 안동 향교에서 학업을 닦았다. 농암 이현보가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고을의 선비를 모아 교육하였다. |
1519년(19세) |
『성리대전』을 읽다. → 뒷날 "이 책의 「태극도설」은 내가 계발된 출발점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
1520년(20세) |
『주역』을 읽다. →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열중하여 평생의 지병을 얻었다. |
1523년(23세) |
성균관에 입학하다. ○ 『심경』을 처음으로 읽다. → "내가 심경을 보고나서야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초학자가 공부할 것으로 이 책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1527년(27세) |
생원시에 합격하다. |
1528년(28세) |
진사시에 합격하다. |
1533년(33세) |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 가을, 고향 가는 길에 여주를 지나면서 모재 김안국을 방문하다.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서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회고하였다. ○ 봉계를 지나면서 야은 길재의 옛터를 찾았다. 「길선생의 사당을 지나며(過吉先生閭)」를 지었다. |
1534년(34세) |
3월, 과거에 급제하다. ○ 4월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10월, 문신들의 정시(廷試)에서 수석하여, 승문원 저작에 올랐고, 12월에는 박사로 승진하였다. |
1535년(35세) |
6월, 여주목사 이순과 「황극경내편」과「참동계」의 수련법을 토론하다. |
1541년(41세) |
3월,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다. →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부르는데,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다. 문신관료를 엄선하여 글을 읽혔다. 선발된 사람은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
1542년(42세) |
2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옥당에 숙직하면서 지은 매화시가 있는데,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매화를 좋아하여 평생 200수가 넘는 매화시를 지었다. ○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 이언적을 전송하였다. ○ 8월, 예안으로 귀향하는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였다. |
1543년(43세) |
『주자전서』를 읽다. → 이 책을 교정할 것을 계청하고, 교감을 담당하였다. |
1545년(45세) |
4월, 하서 김인후가 내방하였다. ○ 10월, 홍문관 전한으로 있던 중 권신 이기의 요청으로 삭탈 당하였다가 12월에 직첩을 도로 받았다. |
1546년(46세) |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 왔다. ○ 11월 양진암을 퇴계 동쪽 바위 위에 지었다. ○ 시내의 이름은 본래 토계였으나, 퇴계로 고치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
1547년(47세) |
4월, 월란암에 머물면서 『심경』을 읽다. |
1548년(48세) |
정월,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 10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
1549년(49세) |
정월, 백운동서원에서 선비들과 강학하였다. ○ 농암 이현보의 「어부사」에 발문을 썼다. ○ 12월,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다. → 나라에서 서적과 노비를 내려 주고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보내주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
1552년(52세) |
4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다.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
1553년(53세) |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다. → 정지운의 호는 추만,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제자이다. |
1554년(54세) |
3월, 「역범제도병」의 발문을 지었다. ○ 포은 정몽주의 제문을 지었다. ○ 『연평문답』의 발문을 썼다. →『연평문답』은 주자가 그 스승 이동(호는 연평)에게 배운 것을 정리한 책이다. ○ 「계몽도서절요」의 발문을 썼다. |
1556년(56세) |
6월,『주자서절요』를 완성하다. → 주자의 방대한 글에서 학문에 관계된 것, 실용에 절실한 것을 골랐다. |
1557년(57세) |
7월,『계몽전의』를 완성하다. → 주자의 『역학계몽』에서 난해처와 의문처를 풀이한 것이다. |
1558년(58세) |
5월, 『자성록』을 완성하다. → 벗들과 주고 받은 편지 중에 골라 모아 반성의 자료로 삼은 것이다. ○ 6월, 제자들에게 인심도심설과 선기옥형을 강의하였다. |
1559년(59세) |
2월, 「이산서원기」를 짓다. → 이 서원은 영주의 선비들이 세웠는데, 그가 서원의 기문과 원규를 지어 보냈다. 「이산서원원규」는 뒷날 영남지역 서원의 강령이 되었다. ○ 9월, 『고경중마방』을 완성하다. → 선현의 글 가운데 마음 수양에 긴요한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 12월, 『송계원명이학통록』을 편찬하다. → 주자서와 어류, 실기, 일통지 등을 참고로 하여 송말, 원, 명 시대 유학자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
1560년(60세) |
○ 11월, 고봉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을 변론하다. → 이에 앞서 고봉 기대승이 「천명도설」을 보고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1559년 기대승의 편지로부터 시작하여 8년 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 우리나라의 유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
1561년(61세) |
가을, 도산서당이 완공되다. → 이로부터 도옹이라는 호를 썼다. 이곳에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찾아오는 문인들과 강학하였다. |
1562년(62세) |
3월, 『이락연원록』의 발문을 짓다. |
1564년(64세) |
2월 「무이구곡도」의 발문을 짓다. ○ 9월,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 「심무체용변」을 짓다. → 이 글은 연방 이구의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는 글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
1565년(65세) |
2월, 「서원십영」시를 짓다. ○ 3월, 「도산십이곡」의 발문을 쓰다. → 12곡의 전6곡은 언지(言志)이고 후6곡은 언학(言學)이다. ○ 「인심도심도」를 개정하였다. |
1566년(66세) |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 현인를 초빙하고자 하는 명종 임금의 뜻이 간절하였으나, 그가 사양하고 나가지 않자, 도산서당을 그림 으로 그리고, 여성군 송인을 시켜 이황이 지은「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적어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 고 보았다고 한다. → 손님을 사절하고, 문인들에게 『심경』과 『참동계』 또는 주자서를 강의하였다. ○ 「심경후론」을 짓다. → 『심경』은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의 저작이다. 이황은 이 책을 존중하여 사자서,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 「전습록논변」을 짓다. → 왕수인의 학설이 식자들 간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양명설의 잘못을 반박하였다. ○ 10월, 회재 이언적의 행장을 짓다. |
1568년(68세) |
○ 3월, 「역동서원기」를 짓다. → 서원의 이름을 정하고 편액 글씨를 썼다. ○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리다. → 새 임금 선조에게 치자의 도리와 당면 시무를 건의한 것이다. ○ 9월 이후,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이천의 「사물잠」과『논어』『주역』, 장횡거의 「서명」과 『소학』을 강의하였다. ○ 11월,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다. → "나의 보국은 이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두라고 하였다. |
1569년(69세) |
정월, 이조판서에 임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 3월, 판중추부사를 제수받고서 물러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대학』의 8강령과 「심통성정도」의 요지를 설명하였다. ○ 도산으로 돌아와 지냈다. 도산 매화와 주고받은 시가 있다. |
1570년(70세) |
5월, 제자들과 역동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다. ○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역학계몽』을 강론하였다. ○ 7월, 역동서원에서 문인들과 『심경』을 강론하였다. ○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었다. 위패의 칭호와 제의, 서원규약 등을 정하였다. ○ 10월, 기대승에게 글을 보내, 「심통성정」을 논하였다. ○ 11월,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격물치지설을 고쳤다. ○ 12월 8일, 세상을 떠나다. → 12월 17일, 대궐에 부고가 올라가자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상장례에 대신의 예를 쓰도록 하였다. →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에 조문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1572년 |
11월, 영주의 선비들이 위패를 이산서원(영주, 이산면 소재)에 모셨다. |
1573년 |
3월, 임금이 예조에 전교하기를, "이황의 저서와 문자는 후세에 전할 만 하다"라 하고 교서관에서 인출하라고 명하였다. ○ 여름 도산서원이 낙성되다. →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보냈다. |
1574년 |
2월,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였다. → 여강서원(안동 월곡면 소재)에서도 위패를 봉안하였다. ○ 12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문의 뜻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순의 뜻은 '중정순수(中正純粹)'이다. |
1600년 |
5월, 퇴계선생문집 초간본 31책이 간행되었다. |
1610년 |
4월, 종묘의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9월,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하다. |
1792년 |
3월 24일, 정조가 각신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치제하였다. → 이 때, 서원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이 때 응시자가 만여명이 되고, 뒤에 시사단을 세워 이 사실을 기념하였다. |
출처 :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메모 :
'퇴계선생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도산서원 (0) | 2012.07.27 |
---|---|
퇴계종택 退溪宗宅 (0) | 2012.07.25 |
퇴계 이황의 수신십훈(修身十訓) (0) | 2012.06.30 |
퇴계 이황과 <도산십이곡> (0) | 2012.06.30 |
[스크랩] 퇴계 이황(李滉) 略史 (0) | 2012.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