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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산서당에 살아 숨쉬는 퇴계의 `건축학개론` 본문
도산서당에 살아 숨쉬는 퇴계의 '건축학개론'
'완벽한' 터 찾고, 설계도 직접 그리고, 방·마루·부엌… 3칸 최소 공간 지어
10년을 지내며 제자를 기르고 학문을 꽃피웠다
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
김동욱 지음|돌베개|320쪽|2만3000원
"계상서당에 비바람 부니 침상조차 가려주지 못하여/ 거처 옮기려고 빼어난 곳 찾아 숲과 언덕을 누볐네/ 어찌 알았으리 백년토록 마음 두고 학문 닦을 땅이/ 바로 평소 나무하고 고기 낚던 곳 곁에 있을 줄이야."
1557년 2월, 퇴계 이황(李滉·1501~ 1570)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그는 지산와사에서 시작해 양진암, 죽동을 거쳐 계상에 한서암과 계상서당을 짓기까지 다섯 차례 옮겨 다닌 끝에 드디어 경북 안동 도산 남쪽(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완벽한' 터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집짓기 구상을 시작해 1561년에 완공한 건물이 도산서당이다. 지산와사(안동 도산면 온혜리)에 집을 지은 것은 퇴계 나이 서른 살 때. 도산서당은 지산와사에서 약 6㎞ 거리다. 15리 밖 '진짜 살고 싶은 땅'을 찾고 완성하는 데 30년이 걸린 셈이다.
여기서 잠깐. 도산서원이 아니고 도산서당이다. 퇴계가 생전 지어서 살림도 살고, 후학도 가르친 곳이 도산서당이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후학들이 도산서당을 확장해 지은 건축물이다. 도산서당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서당건축이자 이후 '선비 건축'의 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퇴계, 도산서당을 짓다
퇴계는 사실 건축가였다. 저자는 "건축가는 서양의 '아키텍트(architect)'를 번역해서 만든 근대의 조어일 뿐 원래 동양에는 이런 개념의 어휘가 없었다"며 "도산서당을 짓는 과정에서 이황이 한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의 건축가 역할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건물 터를 살피고 집의 쓰임새를 궁리하고, 경제적 여건을 염두해 가장 적절한 크기와 형태의 집을 계획하는 일이 건축가의 역할인데, 이황이 한 일이 바로 건축가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165쪽)
퇴계가 61세 때 완성한 도산서당. 30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그는 평생 소망하던‘이상적인 집’을 마련했다. /돌베개 제공
퇴계는 1557년 도산에 처음 터를 확인한 후 설계도를 직접 그렸다. 그 기록만 두 차례 이상 확인된다. "당(堂)은 반드시 정남향, 재(齋)는 서쪽 정원을 마주 보도록 하며(중략) 남쪽 변의 3칸에 들보와 문미의 길이를 8자로 하고…" 퇴계는 이대성에게 보낸 이 편지에 썼듯, 건물의 좌향, 실의 구성은 물론 기둥 사이의 치수까지도 명시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승려 정일에게 목수 일을 맡기고, 아들 준에게는 세세한 일들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이끌었다. 기와를 굽는 작업, 사람을 동원하는 일에도 직접 간여했다.
16세기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이상을 실제로 구현할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성리학에 정통한 선비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퇴계가 건축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작은 공간, 큰 구도
도산서당은 3칸의 최소 규모로 지어진 집이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 사람이 거주하며 책을 보고 잠자고 손님을 맞는 데 필요한 최소의 공간이다. 중심 공간은 암서헌과 완락재. 암서헌은 개방적이고 벽체는 목재를 그대로 드러낸 마루방이며, 완락재는 사방에 벽을 친 폐쇄적 공간에 온돌이 깔렸다. 암서헌은 심신을 풀고 쉬는 유식(遊息) 공간, 완락재는 공부하고 잠자는 공간이었다.
도산서당은 3칸 가옥뿐 아니라, 서당을 둘러싼 인문·자연적 환경으로 영역이 확장된다. 마당 동쪽 끝에 만든 작은 연못 '정우당', 정우당 동쪽 산기슭에서 솟아나는 샘물 '몽천', 꽃나무를 심은 화단 '절우사', 앞마당을 둘러싼 울타리에 낸 사립문 '유정문'…. 건축물과 조경을 아우르는 통합 건축이다. "산수간(山水間)과 경계를 나누지 않고 자연을 여유롭게 품에 안아 그곳 공간 전체를 인문화하고, 이는 퇴계의 높은 인문 경지로 나타났다."
◇10년을 머물며 유학을 완성
퇴계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한 것은 '학문을 완성할 수 있는 서당'이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61세 때 완성한 도산서당에서 퇴계는 10년을 지내며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퇴계 학문이 이곳에서 꽃피웠고 보석 같은 시가 탄생했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을 세웠다. 1574년 서원 공사가 완료됐고 1575년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을 받으며 국가가 지원하는 사액서원으로 지정됐다. 조선 유학의 성지가 됐다는 뜻이다.
도산서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학사인 농운정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라는 역사적 질곡에서도 훼철을 면한 덕분에 400년 지난 오늘날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저자는 "최소 규모로 지어진 공간 안에서 퇴계는 치열하게 자신을 연마·수양했고 비로소 조선 성리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며 "후학들이 공감한 것은 선비정신의 숭고한 기상이었다"고 강조한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기자 201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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