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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가르침

[스크랩] 퇴계 이황(李滉) 略史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6. 30. 20:51
퇴계 이황(李滉) 略史

이황(李滉)은 1501년(연산군) 11월 25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이식(李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매우 불운한 생활을 하였는데, 진사 벼슬에 있던 아버지를 일곱달만에 여의었고,
그 때 그의 아버지의 나이는 40세였다. 홀로된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7남 1녀 중 막내둥이로 자라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교육시키는데 매우 조심하였다.

당시만 해도 공부를 해서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많은 시대여서 항상 신경을 써오던 어머니인지라
공부와 예절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이황은 어려서부터 의가 바르고 마음씨가 어질었다.
더욱이 홀어머니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한 번도 어머니의 뜻에 거슬리는 말씨와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열두 살이 되자 안동부사와 강원감사를 지낸 작은아버지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가 되자 주역에 심취하여 밤잠도 설치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23세에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깊이 빠졌다. 그러나 당시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라서
선비들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보다 현실정치를 비웃고 아부하는 등 비뚤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성품이 어질고 착한 이황은 이러한 선비들의 비웃음을 샀다.

“학문만 숭상하면 언제 벼슬을 할 것이냐?”
“당신의 그러한 품행은 시골 훈장 감 밖에 안 된다.”

등의 조소를 받으면서도 오직 학문을 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남의 비웃음 같은 것은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선비로 태어나 가문을 빛내려면 아무래도 벼슬길에 나아가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속에 때로는 번민하기도 했다.

진사인 아버지, 8남매를 홀어머니가 길러 주실 때는 벼슬길에 올라 어머니를 잘 모시고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하려는 생각에서
잠도 못 주무시고 뒷바라지를 해 주신 것이라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고,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1528년(중종 22년)에 진사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다. 그러나 진사는 별것이 아닌 말단 명예직이었다.
1534년 그의 나이 34세 되던 해 式年文科에 乙科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신념과 학문이 무르익어 원숙한 인간이 된 이황은 그 뒤 벼슬길이 순풍에 돛 단 듯하였다.
副正字, 博士, 典籍, 戶曹佐郞이 되었고, 1539년 檢討官, 知製敎라는 벼슬을 겸직했다.
이어 正言을 거쳐 刑曹佐郞이 되었으며, 承文院 校理를 겸직하여 1542년에는 檢詳이 되고,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때가 42세였다. 그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탐관오리를 미워하고 부정을 싫어했기 때문에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의 민심과 方伯의 정치를 돌아보고 나서 그는 임금께 아뢰었다.

“대개 수령 방백들은 정치를 옳게 하고 있사오나 공주의 판관으로 있는 印貴孫은 성미가 난폭하여
牧使 李蓂(이명)의 영을 어기고 못된 짓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 욕심은 한이 없어 흉년에 백성은 굶주리고 있건만,
매일같이 관청의 물건을 빼돌려 자기 집에 숨기고 백성들을 잡아다 매를 때려 원성이 많사옵니다.
이런 탐관오리를 하루 빨리 징계하셔야만 되겠사옵니다.”

이황의 말을 다 듣고 난 임금은 즉석에서 인귀손을 잡아 엄하게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 뒤 舍人으로서 문학 校勘(교감)을 겸직하고, 뒤이어 掌令이 된 후 1544년에 大司成이 되었다.

이황의 나이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즉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李芑(이기)의 모함을 받고 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가 천하의 바른 행실을 행하는 군자임을 알고 있던 터이라 곧 그에게 司僕寺正의 벼슬을 내렸고,
1457년에는 應敎라는 벼슬에 있다가 물러났다.

벼슬은 계속되었으나 이황은 가정적으로 매우 불운했다.

27세가 되던 해에 21세에 장가든 부인 許씨가 두 아들을 낳고 죽었으며,
30세 때 두 번째로 맞아들였던 權씨 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이황은 인생의 허무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본래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집안의 불행이 닥치자 조용히 산간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학문 연구에 힘을 쏟다.

그는 토계(온계리의 시내 이름)의 동쪽 바위 옆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집 이름을 養眞庵이라 불렀다.
그리고 土溪라는 이름을 退溪라 고치고, 이를 호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조용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1548년 풍기 군수로 가게 되었다.
이때 둘째 아들을 잃고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풍기 군수를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을 짓고,
독서와 사색으로 생활을 보냈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아늑한 오막살이에 일이 없다. 책만 방 네 벽에 가득하구나.
죽은 사람은 이미 이곳에 없는데 그 말의 향기는 아직도 그윽하구나.

또한 이때 선생의 서재에 하나의 표어를 붙여 놓았는데

번거로움을 바로 잡는 데는 고요함이 제일이고
졸렬한 것을 바로 잡는 데는 부지런함이 제일이다.

이와 같이 이황은 오직 조용히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여기에서 4년 남짓 있다가 다시 임금의 명을 받아
1552년 大司成이 되었고, 1554년 刑曹,兵曹 參議가 되었으며, 이어 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56년에는 부제학 工曹參判이 되었고, 이어 禮曹判書, 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선조 1년(1568년)에는 우찬성을 거쳐 兩館 大提學을 지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퇴계는 관직에 40여 년간 몸담아 있으면서 온갖 부정을 근절시키기에 힘썼고,
벼슬에 있는 동안 네 분의 임금을 섬겼으며, 일곱 번이나 관직에서 물러났다.
절개와 양심만 가지고 벼슬을 살았던 퇴계는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스스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벼슬에서 물러나 시를 지어 자기의 심정을 달랬다.

옛날의 서재로 다시 돌아와 고요히 향을 피우고 앉으니
산 속의 늙은이는 되었을망정 속된 세상의 걱정 없음이 요행이로다.
산 속의 취미를 그대는 아는가 세상일 따위는 비교도 안 된다오
슬프다 세상의 사람들이여 삼가 높은 벼슬일랑 사랑치 마오.
영화와 욕심은 구름같아 본래 없는 것이오
부귀는 사람을 못살게 구니 두렵지 않을소냐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날아다니는 파리 같더라.

이 시에서와 같이 퇴계는 한결같이 속된 인간세계가 부질없음을 보고 산 속에 숨어
조용히 사색하고 독서하며 사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알았다.

퇴계는 朱子學을 集大成한 대유학자로, 율곡 李珥와 함께 儒學界의 쌍벽이라 일컬어져 왔다.
그의 학문은 誠을 기본으로 일생 동안 敬을 실천하고,
면밀하고 침착하게 조목을 따져 깊이 연구함을 기본자세로 삼았다.
주자의 理氣二元論을 발전시키고 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가 68세 되던 해에 聖學十圖를 임금께 올렸다.
성학십도는 열 폭에다 유학의 근본원리와 실천 방법이 샅샅이 담겨진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퇴계가 남긴 마지막 저서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지금은 나라의 정치가 잘 되어 나라가 평안한 것 같사오나 남쪽, 북쪽에 오랑캐의 침범이 있을까 항상 근심이 되옵니다.
백성은 외적의 침범으로 지쳐 있고, 나라의 창고는 비어 있사오니 나라의 앞길이 걱정이옵니다.
이런 때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오니 덕으로 정치를 하셔야 하옵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바른말을 잘하는 신하를 두었사옵니다.
임금께 비위나 맞추려고 거짓말을 하는 간사한 무리들을 멀리 하시옵소서.
이 일을 마음에 새기시고 나라를 다스리시면 나라는 언제고 태평할 것이옵니다.”
당시 선조는 이황의 충성스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꼭 이것을 실천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뒤에 이황의 학설을 반대한 이이는 畿湖學派를 만들었고, 이황의 제자들은 그들대로
嶺南學派를 이루어 뒤에 동․서당쟁의 큰 세력이 되었다.

풍기 군수로 있을 때 교육사업에 관심을 두어 朱世鵬이 세운 白雲洞書院에 紹修書院이라는
임금의 사액을 내리게 하여 최초의 賜額書院을 만들게 했다.

또한 陶山書院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는 붕당의 병폐를 임금께 직간하는 등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명종은 수차에 걸쳐 높은 벼슬을 내리면서 불렀으나 사양했다.
그러자 명종은 ‘어진 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한탄한다.’라는 詩題를 주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퇴계 선생의 ‘朱子書 節要’가 일본에 전해지자, 야마사키(山崎)라는 유명한 학자는 이 책을 읽고 감복한 나머지
‘학식이 높고 넓음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선비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모든 교육, 정치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天命圖說, 自省錄, 朱子書 節要 등이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는 등 퇴계 연구에 열을 올렸다.

1570년 12월 8일, 그의 나이 70세가 되던 해에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 앉아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퇴계의 죽음이 알려지자 나라 안은 온통 슬픔에 잠겼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문상을 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생을 領議政으로 追贈하고 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이황의 문하에서는 정구(鄭逑), 金誠一, 柳成龍, 奇大升 등 수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http://cafe.daum.net/yedung
출처 :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글쓴이 : 松河22翰邦5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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