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스크랩] 조선 성리학자 이황 본문

퇴계선생의 가르침

[스크랩] 조선 성리학자 이황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4. 2. 21. 15:02

 

 

 

 

조선 성리학자 이황(李滉.1501.1.13.연산군 7∼1570.12.8.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ㆍ성리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ㆍ퇴도(退陶)ㆍ도수(陶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ㆍ전적ㆍ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ㆍ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ㆍ서적(書籍)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ㆍ수양ㆍ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ㆍ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 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ㆍ사상】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태극도설><주역> 등 주자학에서 중요시되는 글뿐만 아니라 <주자어류(朱子語類)><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주자의 글을 평생 금과옥조로 여겨 깊이 연구했고, 이를 알기 쉽게 편집했다. 주자의 서한문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로 대부분의 저술이 이때 이루어졌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를 완성했다.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自省錄)>을 거의 완결하고 서(序)를 썼다. 59세에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하여 토론했는데 이 논변(論辨)은 66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를 썼다. 이것은 명나라 황종희(黃宗羲)의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앞서는 것으로 주자학파를 중심으로 송대 이후 중국 유학사를 정통론적 입장에서 정리한 문헌이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李彦迪)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으며 <심경후론(心經後論)><양명전습록변(陽明傳習錄辨)>을 지었다. 68세에 성리학의 주요문헌에 나오는 개념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핵심적 교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성학십도>, 70세에 마지막 작업으로 <사서석의(四書釋疑)>를 편찬했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주자의 이해와는 달리 기와 마찬가지로 이가 동정(動靜)하고 작위(作爲)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가 동정하지 않고 작위성이 없다고 한 종래의 이론은 이의 체(體)의 측면이고 그 용(用)의 면으로 말하면 이 또한 동정하고 작위하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와 기의 관계는 이주기종(理主氣從)ㆍ이존기천(理尊氣賤)의 구조를 가지며, 이는 기보다 절대적·우월적인 것이 된다. 이황의 이러한 이기론의 구조와 특성은 심성론(心性論)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는 주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과 정의 근원을 이와 기를 분별(分別)하는 방법을 통해 구했다.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도 역시 4단과 7정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에 대해서는 이와 기로써 근원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에 대한 이해는 기대승과 8년 동안이나 토론을 벌이며 이기호발설로 정밀히 체계화했다. 곧 "4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 하여 4단은 이에 근원하고 7정은 기에 근원하여 각각 발한다고 했다. 기대승은 이것이 이와 기를 독립된 물(物)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는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선한 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맹자의 본래 뜻을 살리기 위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기만 있고 이의 탐[乘]이 없으면 인간은 이욕(利欲)에 빠져 금수(禽獸)로 된다고 보았던 그는 본성의 단서로 간주되는 사단을 이가 발한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인간 본래의 선한 본성이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理) 우위론적 철학은 이성에 의한 적극적 실천을 보다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주자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켰던 이황은 불교와 도교는 물론, 유교의 양명학(陽明學),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 나흠순(羅欽順)의 주기설(主氣說), 오징(吳澄)의 주륙(朱陸) 절충적 견해 등은 모두 이단·사설로 비판·배척했다. 특히 16세기초에 이미 소개되어 확산되던 양명학과 서경덕ㆍ나흠순의 견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여 조선의 주자학이 성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역사적 위치】

 이황의 학문ㆍ사상은 이후 영남·근기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ㆍ조목(趙穆)ㆍ김성일(金誠一)ㆍ황준량(黃俊良)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ㆍ정경세(鄭經世)ㆍ이현일(李玄逸)ㆍ정시한(丁時翰)을 이어 이재(李栽)ㆍ이상정(李象靖)ㆍ이진상(李震相)ㆍ곽종석(郭鍾錫)ㆍ허훈(許薰)ㆍ이항로(李恒老)ㆍ유중교(柳重敎)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ㆍ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ㆍ정약용(丁若鏞) 등 남인 실학자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ㆍ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ㆍ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황의 학문은 일본 주자학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반출된 이황의 저술은 도쿠가와[德川]가 집정(執政)한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11종 46권 45책의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소개되었다.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주류인 기몬 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 학파[熊本學派]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존숭을 받아왔다.

 이황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오늘날에도 '퇴계학'(退溪學)이라는 용어를 낳을 만큼 국내외적으로 매우 활발하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3년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다. 이황의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논문집으로 현재 <퇴계학보>가 있다. 외국에는 일본·타이완·미국·독일 등지에 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 등 전국 4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 退溪全書〉 등이 있다.


【저서】*<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四端七情分理氣往復書)>*<사서석의(四書釋義)>

【시조】*<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수필문】*<남시보(南時甫)에 답함>

【글씨】<퇴계필적(退溪筆迹)>

【전서】<퇴계전서> : ‘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 성학십도(‘聖學十圖)’, ‘자성록(自省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출처 : B l u e & B l u e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