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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

[스크랩] 신장상이 새겨져 있는 경주의 탑(1)-금강역사상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7. 8. 21:35

신장상이 새겨져 있는 경주의 탑(1)-금강역사상

 

 

나라연금강(아상)           <석굴암의 금강역사상>            밀적금강(훔상)

 

 

 

경주지역에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전하고 있는 탑이 현재 40여기가 된다. 조성된 시기가 7세기후반부터 9세기 후반에 이르는 다양한 탑들이 서로 다른 각각의 양식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석탑과 모전석탑, 3층석탑과 5층, 13층석탑과 같이 층수가 다른 탑, 신장상등 장식이 있는 탑과 장식이 없는 탑, 장식이 있는 탑 중에서도 사방불,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탑과 문비 장식이 있는 탑, 안상 무늬가 나타나는 탑 등 다양하다.

 

탑의 표면에 조각된 사천왕, 팔부중, 금강역사 등의 신장상들은 수미산 세계로 대표되는 불교의 우주관을 체계적으로 구현하면서 이들이 표현된 구조물의 내부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러면 신장상이 새겨져 있는 경주의 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는 탑들을 먼저 알아보자

 

 

완주 송광사 금강문의 밀적금강과 문수동자상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을 흔히 인왕상(仁王像)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인왕이라는 말은 '인왕경'에 나오는 말로서 인왕경은 어진 임금이 취해야 할 덕목을 설한것으로 볼때 인왕이 곧 금강역사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금강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금강역사상은 사찰의 문이나 입구를 지키며 한 쌍으로 있다.

 

처음에는 갑옷을 입고 금강저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신장형으로 표현 되었지만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처럼 차츰 반나(半裸)의 몸에 천의(天衣)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역사(力士)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들도 있다

보통 두 상(像)을 마주보게 하여 절의 문, 또는 입구 좌우에 세운 것으로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사찰에 따라서는 금강문이라는 별도의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워두기도 한다

 

 

 

경주 남산 망월사의 금강억사 그림

특이하게 밀적금강은 힘자랑을 하는 듯 바위를 번쩍 쳐들고 있다

 

 

보통 사찰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나라연금강은 천상계(天上界)의 역사로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된다고 하며 입을 크게 열어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아'는 시작음으로서 처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이 나라연금강을 쉽게 '아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를 쥐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의 우두머리로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밀적금강상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훔'은 마지막음으로 끝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훔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는 범어의 첫글자이고 '훔'은 끝글자이다.두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며 따라서 '아상'과 '훔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불법을 수호 하겠다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이들 두 역사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을 표헌하기도 하는데 이 두광은 이들이 단순하게 힘만 센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황사모전석탑의 1층 감실의 금강역사상

머리에 두광을 표현하였다

 

 

경주 지역의 탑 중에서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는 탑으로는 분황사모전석탑, 장항리사지오층석탑, 서악리삼층석탑 등이 있고 폐탑으로는 구황동모전석탑지(전 도림사지)에 4기의 금강역사상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실에는 불국사 주변 하동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석탑의 부재 중에서 금강역사상이 부조로 된 석물이 있고 미술관 옆에는 구황동모전석탑지에서 옮겨온 2구의 금강역사상이 있다.

 

그리고 탑골 제2사지(현재 옥룡암)의 마애불상군에는 금강저를 든 금강역사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인근 울산 언양의 간월사삼층석탑에도 금강역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금강역사상이 있는 탑의 위치

 

 

 

1) 분황사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찹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634년(신라 선덕여왕 3년)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 : 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이다. 현재는 3층이지만  원래는 7층 내지 9층이었다고 하는데 분황사 경내에는 복원 뒤 남은 모전(돌벽돌)이 수북히 쌓여 있다.

 

분황사모존석탑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모전을 전탑형식으로 쌓아올렸다,

탑은 1층 옥신 내부에 공간을 마련하여 목탑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1층 옥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 : 문짝)를 설치하였고, 문비의 양 옆에는 사실적인 고부조의 금강역사상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1층 몸돌 네 귀퉁이에 한 마리씩 네 마리의 동물을 올려놓았다. 내륙 쪽에는 용맹스러운 두 마리의 사자를, 동해 쪽에는 미끈한 두 마리의 물개를 각각 배치하였다.

(물개는 꼬리가 짧은데 물개형상의 동물에는 길게 꼬리가 있어 사자의 암컷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 논란이 있음)

각 층 옥신에는 전탑의 특징인 우주(隅柱 : 네 귀퉁이의 기둥)의 표시가 없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화주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삼층석탑의 사자상

 

 

탑(塔)은 불신골(佛身骨)을 봉안하는 묘(墓)의 건축물로,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眞身舍利)’ 이외에도 불상, 불경과 같은 ‘법신사리(法身舍利)’를 함께 봉안하였기 때문에 매우 숭고하게 여겨 이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마련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탑의 사면(四面) 또는 한 면에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부조형태로 새기는 것이었다

 

분황사모전석탑 서면 감실의 금강역사상

 

 

분황사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현존하는 금강역사상 가운데 조성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분황사 성립(634년)과 같은 시기에 이 금강역사상이 조성되었다고 본다면 이 상들은 7세기 중엽 신라의 통일 이전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탑의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龕室)을 만들고 문비(門扉)를 달아 그 좌우에 암좌 위에 금강역사상를 배치하였는데,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신형(裸身形)으로 상체의 울퉁불퉁한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험상궂은 모습이다.

 

8구의 상이 모두 무기를 들지 않고 권법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X자형의 천의를 입고 있다.

중국 용문의 북위시대 굴-빈양중동, 연화동 등에 X자형의 천의를 입은 금강역사의 모습이 있어 분황사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북위시대 양식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의 밑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표현과 볼륨있는 양감의 표현, 어린이 같은 신체의 비례(4~5등신)는 북제(北齊) 주(周)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중국에서 전래되는 과정에서 복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경주지역의 석탑에 나타나는 금강역사는 사전적인 정의와는 달리

실제로 금강저를 들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불교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째서 금강역사를 상징하는 지물(持物)인 금강저를 함께 표현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무기가 없어도 능히 부처님을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2) 장항리사지 동. 서 오층석탑-국보 제 236호

 

장항리사지 동서오층탑

 

 

토함산(吐含山)의 석굴암으로 오르다가 마주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감포로 가는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냇가 건너 왼편 높은 산자락에 높은 오층석탑이 우쭉 서 있다. 이곳이 장항리사지이다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절터가 있는 동리 이름이 장항리이기 때문에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통일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서, 거의 원형의 서탑과 파손이 심한 동탑, 그리고 금당지(金堂)에는 거대한 불상대좌가 남아 있고 이곳에 있던 불상은 현재 경주박물관 정원에 서 있다

 

금당지의 왼편에 5층석탑이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 9m로 경주 부근에서는 나원리오층석탑과 함께 유일한 5층 석탑이다.

 

서탑은 1925년 도굴꾼에 의해 도괴된 것을 1932년 복원·수리 하였고 동탑은 계곡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6년 계곡에서 다시 끌어올려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하였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석탑들의 각 부분이 여러개의 석재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이 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몸으로 되어 있어 8세기 중엽 이후의 석탑의 전형으로 이어 옮겨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탑은 크기도 같고 형식도 같게 조성되었으며 2중 기단의 상·하층에는 각각 탱주 2개로 구분되고, 탑신과 옥개석은 각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층의 옥개석 받침은 5단씩 되어있다.

추녀는 수평이고 낙수면도 평평하게 엷으며 상륜에는 노반이 많이 남아 있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석탑들의 각 부분이 여러개의 석재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이 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몸으로 되어 있어 8세기 중엽 이후의 석탑의 전형으로 이어 옮겨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탑의 금강역사상

 

 

1층 옥신의 네 면에는 문호형(門戶形)을 형체로 새겼고, 그 좌우에 있는 연화좌에는 금강역사상을 새겼다.

 

장항리 탑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을 기점으로 서악리 3층석탑에서 나타나던 금강역사상이 한 동안 경주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다가 통일 이후에 다시 조성된 것은 의미가 크다

 

이곳의 금강역사상은 서탑과 동탑의 금강역사상의 양식이 조금 다른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서탑의 금강역사상은 특이하게 대좌를 연화좌로 표현하였다

 

 

서탑의 금강역사상

동탑은 구름좌 위에 서 있으나 서탑은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서탑 몸돌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의 울퉁불퉁한 근육표현과 분노한 얼굴의 표현은 다른 불상의 금강역사상에서 보이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지만 팔이나 다리의 근육과 신체의 움직임은 전 시대 상들에 비해 세련되어 보인다. 돌의 질감과 잘 어울려 매우 육감적인 느낌을 주며, 이곳의 위치와 산세 지형을 고려해 볼 때 아주 잘 만들어 세운 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탑의 금강역사는 신체의 근육 표현이 서탑보다 단순하고, 몸에 비해 커다랗게 나타낸 손의 모습 등이 서탑의 금강역사와 비교된다

 

 

문고리 사자

 

종합적으로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에 새긴 것과 맥을 같이 하는데, 사실적이고도 박진감 넘치는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문비의 가운데에는 사자머리 장식의 문고리까지 표현하고 있다

문비가 있다는 것은 내부에 감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3)서악리삼층모전석탑-보물 65호

 

 

서악리삼층모전석탑

 

 

서악리삼층모전석탑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서 선도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이형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미루어보면 남산동 동삼층석탑을 모방한 듯 하면서도 조각수법이 섬세하지 못하고 조성시기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고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커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오히려 둔중한 감을 주게 한다.

높이 5.07m, 기단폭은 2.34m이며 이형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웠는데,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4장의 장대석으로 된 지대석과 8개의 석괴로 이형기단을 구성하였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는데, 네 개의 못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쇠장식을 달았던 자리로 추측된다.

 

 

금강역사상과 문비

오른쪽의 상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금강저의 끝을 잡고 있으며  대좌가 연화좌이다

문비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문의 그 양쪽 좌우에는 금강역사상이 1구씩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구황동 금강역사상의 뒤를 잇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몸이 길어졌고 천의는 아직 분황사탑과 흡사하다.

 

왼쪽의 상은 허리를 문쪽으로 내밀면서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위를 쳐다 보고 있으며, 오른손은 허리에 걸치고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주먹으로 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상은 왼쪽의 문을 향한 얼굴의 측면인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금강저의 끝을 잡았으며, 왼손은 왼족 허리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간 금강저의 끝 부분을 잡아 아래쪽으로 내려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구황동 금강역사상의 뒤를 잇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몸이 길어졌고 천의는 아직 분황사탑과 흡사하다.

장항리사지 서탑의 경우처럼 대좌를 연화좌로 표현한 것도 특징이다

 

아마도 구황동 금강역사상과 서악리 금강역사상은 거의 동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4) 구황동 모전석탑지(추정 도림사지)

 

구황동모전석탑지

 

황룡사지 동쪽의 울산포항산업도로 건너편 길 옆 논바닥에 구황동모전삭팁지라고 부르는 폐사지가 있다

현재 절터에는 금강역사상과 옥개석, 초석, 문비의 기둥돌, 모전석탑에 사용된 안산암 석재 등이 흩어져 있다.

1927년 가을에 현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동 북쪽의 논 가운데서 도림(道林)이라고 양각된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으므로 이 절터가 경문왕의 설화인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로 유명한 도림사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모전석탑지의 금강역사상

 

이곳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재료인 안산암으로 만들어진 벽돌 편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모전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남아있는 4기의 금강역사상은 모전석탑의 감실 좌우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에 새긴 것과 맥을 같이 하는데, 사실적이고도 박진감 넘치는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곡선등은 유연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있다

또한 분황사의 것처럼 독립된 돌에 높은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독립된 돌에 금강역사상이 새겨진 예는 분황사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과 여기 두 곳뿐이고 나머지는 탑신의 면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구황동모전석탑지의 금강역사상

미술관의 입구 오른쪽 정원에 있다

 

이곳에는 원래 8구가 있었을 것이나 현지에는 4구가 남아있고 2구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으며 나머지 2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5) 하동리 금강역사상

 

  하동리 출토 금강역사상(미술관 1층 로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 로비에서 만날 수 있는 금강역사상이다.

4개의 돌기둥에 2구씩 조각된 8명의 이 금강역사상은 불끈 쥔 두 손 가운데 한손은 치켜세우고, 다른 한손은 허리쪽에 둔 모습이 마치 태권도의 자세를 형상화 한 것 같다.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금강역사상은 1930년 불국사 아래에 있는 경주시 하동의 이름 모르는 절터(폐사지)에서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 84㎝, 너비 45㎝ 크기의 돌기둥은 분황사 3층석탑이나 구황동 절터에 있는 금강역사상과 같이 탑의 1층 탑신부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용도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한 개의 돌기둥에 2구씩 모두 8구의 금강역사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한쪽 발에 힘을 준 채 엉덩이 부분을 밖으로 내밀어 S자형으로 몸을 비튼 자세이다

눈은 크게 부릅뜨고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으며, 목 근육의 표현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의 가슴근육에서 힘이 넘치는 조형미를 보여준다

 

 

금강역사의 태권도 자세

 

 

한 손은 주먹을 불끈 쥐어 위로 치켜 세우고 다른 한 손은 허리쪽에 둔 모습이 태권의 자세와 흡사하다.

이 금강역사상은 신체의 양감과 천의 표현, 몸의 움직임, 얼굴의 표정등이 장항리사지 동탑의 금강역사상과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여 이 상들도 8세기 중엽내지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태권도인들은 “8가지 각기 다른 공격과 방어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특히 발사용 흔적도 보인다”며 “태권도를 형상화 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울산 언양 간월사 삼층석탑의 금강역사상

 

또한 울주 간월사지 삼층석탑의 금강역사상과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전후 관계도 이 금강역상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된다.

 

 

 

석굴암 중수시에 출토된 금강역사의 머리(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남산 탑곡 제2마애조상군(옥룡암) 남면의 금강역사상과 탁본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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