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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眞城李氏)의 본향 청송 본문

퇴계선생의 가르침

진성이씨(眞城李氏)의 본향 청송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8. 6. 6. 14:38


 진성李氏의 본향, 그리고 청송을 마음에 품었던 퇴계


#1. 진성이씨(眞城李氏)의 본향 청송


(사진설명 : 청송은 예부터 숲이 짙고 골이 깊으며 물이 맑아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일찍부터 퇴계는 그런 청송에 은거해 학문을 닦으며 평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2010년 영남일보가 주최한 ‘제2회 청송주산지 전국사진촬영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장영숙씨의 작품 ‘양수발전소의 운해’. 

구름과 산이 어우러진 절경이 마치 퇴계가 지향한 이상세계를 보는 듯하다. <영남일보 DB>)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배출한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청송이 본향이다. 
고려 말 안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진보현(眞寶縣, 청송군 진보면)에 기반을 두었던 토호세력이다. 
시조는 퇴계의 6대조인 이석(李碩)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관직에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석의 선대들은 향리(鄕吏), 즉 아전(衙前)이었다. 
고려의 아전은 조선과는 달라서 나름의 지역기반이 두터운 권력층이었다. 
지방 관아의 일선행정 실무를 맡은 하급관리이기는 했지만, 보수도 받았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 
특히 이석의 선대들은 향리직의 우두머리였던 호장(戶長)이었다. 
진성이씨세보(眞城李氏世譜)에 따르면 이석의 부친인 이영찬(李英贊)과 조부 이송주(李松株) 모두 호장을 지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관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나마 관직에 근접했던 이석을 진성이씨의 시조로 삼고 있다.


진성이씨가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이는 이석의 아들 이자수(李子修)였다. 

1330년(충숙왕 17)에 명서업(明書業, 문자와 글씨에 능한 이를 뽑던 잡과)에 급제한 이자수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져 판전의시사(判典儀侍事)에 올랐다. 
아버지 이석은 아들의 공으로 봉익대부밀직사에 증직됐다. 
이후 이자수는 왜구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옮겨 살았고, 퇴계 이황 대에 이르면서 진성이씨는 명문가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진성이씨 시조인 이석의 묘는 여전히 청송 파천면 신기리 기슭에 있다. 

특히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꼽힌다. 명당의 형세에 맞게 터를 얻게 된 사연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2.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터라


선대의 재치로 명당을 얻다.
진성李氏, 진보면 기반 명문가…시조는 이석
수령이 점찍은 자리 차지해 대학자 이황 배출
고려 말 때 왜구의 난 피해 안동으로 옮겨 살아


아주 먼 옛날, 진보현의 쾌청한 어느 날이었다. 

동헌(東軒) 마당이 조용히 번잡스러운 가운데 명이 하나 떨어졌다. 


“아전 아무개는 속히 들라.”명은 지체되지 않고 이행되었다. 

“소인 대령했나이다.”

“자네는 지금 달걀을 가지고 내 일러주는 봉우리에 가 그 위에 파묻으라. 

리고 한밤중까지 기다렸다가 닭의 울음소리가 나는지 확인해오라.”


아전에게는 적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으나 수령이 무엇을 명할 때는 언제나 깊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었다. 
하여 아전은 수령이 일러준 자리에 도착해 보물을 숨기듯 신중하게 달걀을 심었다. 
그러곤 어둠이 내려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지자 과연 달걀이 병아리로 변한 것이었다.

아전은 ‘여기가 명당이구나. 

수령이 안 그래도 풍수에 조예가 깊다더니 이곳의 지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게야. 

곧이곧대로 고해서는 아니 되겠다. 이 땅은 이제 나만 아는 것으로 해야겠다’ 
하고는 돌아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수령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의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리고 임기를 채우고 진보현을 떠났다. 달걀 일은 잊은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아전이 부친상을 당했다. 
아전은 혼자만 알고 있던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다. 
그런데 이것이 어인 일이런가. 관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아연한 속을 진정하며 다시 깊이 묻었지만 관은 자꾸만 튀어나왔다.

‘내가 거짓을 고한 벌을 받나 보다’ 싶은 마음에 황망해진 아전은 급히 예전의 그 수령을 찾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수령은 “그 터는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만이 묻힐 곳이다. 

그러니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장사 지내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러주고는 

헌 관복을 내주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이에 아전이 고향으로 돌아와 그 관복을 시신에 입혀서 안장하니, 과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명당은 온전히 아전의 몫이 되었고 가문에는 완전한 복이 되었다. 
이후 그의 가문에 ‘동방의 주자(朱子)’ 퇴계 이황이 나왔으니 말이다.


#3. 청송에 살고 지고…


“청송은 緣이 닿지를 않는구나!”
권력 아귀다툼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던 퇴계
임금에 청송부사 외직 자청했지만 꿈 못이뤄
청송유림들 뜻 모아 송학서원 건립 제향 올려


(사진설명:청송 유림들이 퇴계를 배향한 송학서원. 퇴계의 시 ‘청송백학’에서 이름을 따왔다.<영남일보 DB>)


1548년(명종 3), 정월(正月)의 밤바람이 창밖을 날카롭게 오고 갔다. 
자작자작 어둠이 졸아든 자리에 수증기처럼 피어오른 호롱불을 바라보며 퇴계는 탄식했다. 
“이번에도 청송에는 연이 닿지를 않는구나.”

가서 살며, 몸과 맘을 부비고 싶은 청송이었다. 자신의 뿌리가 있는 본향 아니던가. 
“선대의 묘소 또한 청송에 있거늘 아무것도 아닌 이 몸 하나 움직이기가 어찌 이리도 어려울꼬.”

퇴계의 나이 벌써 마흔 여덟이었다. 게다가 병이 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아귀다툼에 다르지 않은 권력쟁탈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고 싶었다. 
심지어 재앙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선비들이 고난을 당한 사화(士禍)의 충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하여 퇴계는 외직을 자청했다. 더욱이 청송으로 떠나고 싶었다. 
자신의 본향에 은거하며 학문의 도를 닦고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데 평생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임금은 청송부사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단양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내려 보냈다. 
어디를 가든 최선을 다할 테지만, 아쉽고 섭섭한 마음까지 접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식어버린 찻잔을 물려놓고 퇴계는 마음속에 아내를 짚어보았다. 
스물한 살 때 부부의 연을 맺고 6년을 더불어 살다가 사별한 허씨, 재혼 16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버린 권씨, 

그렇게 두 아내를 말이다. 특히나 권씨는 마음에 병이 깊은 여인이었다. 
퍽 어려운 시간들을 건너온 고단함에 퇴계는 늘 청송이 그리웠다. 
하여 가만히 시 한 수를 읊어가기 시작했다. 

낮에 벗들이 마련해준 전별연에서 지은 시였다.


靑松白鶴(청송백학)


十載沈愧素餐   (십재침아괴소찬) 
洪恩猶得郡符懸 (홍은유득군부현) 
靑松白鶴雖無分 (청송백학수무분) 
碧水丹山信有緣 (벽수단산신유연)
北闕戀懷分燭夜 (북궐연회분촉야) 
東湖離思賞梅天 (동호이사상매천)
撫摩凋疲心力   (무마조채피심력) 
鈴閣飜應憶故田(영각번응억고전).


십년 동안 아픈 몸으로 일없이 국록만 받아 부끄러운데/ 
도리어 넓은 은혜 입어 고을 원이 되게 하시네/ 
청송백학과는 비록 연분이 없어 가지 못해도/ 
푸른 물 붉은 산과는 인연이 있었나 보구나/ 
이제 궁궐에서 촛불 나누어주던 밤이 그리울 테고/ 
독서당을 떠나려니 매화 감상하던 날들 잊을 수 없다네/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 돌보는 일에 심신이 지칠 때는/ 
동헌에서 문득 그대들의 옛정이 생각날 것일세


‘청송백학’은 1548년, 청송으로 가고 싶어 했던 퇴계가 단양군수로 발령 나면서 그 아쉬움을 읊은 시다. 
임지로 떠나기 전 동호독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박중초, 민경열, 남경림, 윤사초가 마련한 전별연에서 지었다고 한다.

시에 등장하는 ‘청송백학(靑松白鶴)’은 백학이 어우러진 청송을 말하며 이는 신선세계를 뜻한다. 
‘벽수단산(碧水丹山)’에서 ‘벽수’는 벽계수(碧溪水)를 뜻하며 은하수의 이칭이다. 
‘단산’은 단구(丹丘, 신선이 산다는 곳)로 이 역시 신선의 세계를 말한다. 
즉, 청송백학은 청송을, 벽수단산은 단양을 뜻하며, 퇴계가 지향한 관념상의 이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일찍부터 청송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살고 싶었던 퇴계의 마음이 담긴 시다.

퇴계가 청송을 놓지 못한 것만큼 청송의 사람들도 퇴계를 그리워했다. 
하여 유림들은 뜻을 모아 1726년(영조 2) 사우를 건립하고 제향을 올렸고, 
서원의 이름을 송학서원(松鶴書院)이라 했다. 
바로 퇴계의 시 청송백학(靑松白鶴)에서 비롯됨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청송군


-이야기 따라 그 곳

‘금계포란형’ 진성李氏 시조묘…만인을 이끄는 인물 나는 형국


진성이씨 시조묘는 감람묘(甘藍墓), 호장공묘(戶長公墓)라고도 불린다. 
모두 4기(基)로 이루어져 있다. 몇 대를 거치면서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지석이 발견되면서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특이하게 묘갈명을 새긴 비석 외 어느 봉분 앞에도 묘비가 없다.

묘소는 전형적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묘 자리가 알에 해당된다. 
금계는 천상의 닭을 의미한다. 모든 닭의 우두머리인 셈이다. 또 닭은 새벽을 여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런 형국에선 ‘만인을 이끄는 인물’이 난다고 한다. 
퇴계를 배출한 연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시조묘 아래에는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된 기곡재사(崎谷齋舍)가 있다. 
제례를 올리는 곳으로, 문중모임이 있을 때는 집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묘제 때는 숙소로도 활용된다. 

조선 후기 경상도 북부 지방의 사대부가가 관리한 재사의 유형과 기능을 잘 간직하고 있다.

퇴계 이황을 배향한 송학서원은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수차례 복원 공사를 거쳐 2013년에 완료했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여헌 장현광도 배향하고 있다.


청송=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