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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가르침

진성이씨의 유래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6. 9. 16. 17:18

  진성이씨의 유래

 

시조 석()은 경상도 진보현(현 청송군 진보면)에서 세거하였다

2세 자수(子脩)가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안사공신 송안군으로 봉군되었다.

송안군이 왜구를 피하여 풍산현 마애로 거처를 옮기고 아들 운구(云具)와 운후(云侯)를 얻었다. 

참의공 운구는 양공(養恭),양검(養儉),양호(養浩)를 낳았다. 

부정공 운후의 아들 정()은 선산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아들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이 현달하였다. 

노송정 계양의 첫째 아들 찬성공 식()의 아들 6형제 중 넷째 아들 온계 해()는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서로 필명을 떨쳤으며, 

여섯째 아들 퇴계 황()은 조선 성리학의 종장이 되었다. 

퇴계는 일생동안 경()의 자세로 진리를 밝히고 실천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종 때는 국장(國葬)을 사양하고 묘갈 앞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게 하였으며, 

그 후 본관을 진성으로도 쓰게 되었다. 

노송정의 둘째 아들 송재 우()는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청해군에 봉해진다. 

이후 안동과 예안은 유교문화의 본고장이 되었으며,후손 가운데 (),안도(安道),형남(亨南),영도(詠道),정회(庭檜),정백(庭栢),

명익(溟翼),동표(東標),종수(宗洙) 등의 학덕을 겸비한 학자가 배출되고, 국난 때는 애국지사가 줄을 이었다. 

일제침략기에는 만도(晩燾),중린(中麟),찬화(燦和),중언(中彦),인화(仁和),긍연(兢淵),명우(命羽),동하(東廈) 등이 충절과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육사 원록(源祿)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조국 광복의 의지와 신념을 불태웠다. 

진성이씨 가문은 많은 선비와 우국지사들을 배출하여 나라와 역사에 미친 영향이 아주 컸다.

 

                      21세 광호(光虎) 삼가 지음

 

                              진성이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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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이씨의 유래

 

시조 석은 경상도 1)진보현(현 청송군 진보면)에서 세거하였으며, 2세 자수가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안사공신 

송안군으로 2)봉군되었다. 

송안군이 왜구를 피하여 3)풍산현 마애로 거처를 옮기고 아들 운구와 운후를 얻었다. 

운구는4)양공,양검,양호을 낳았다. 

운후의 아들 정은 선산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아들 우양,흥양,계양이 현달하였다. 

노송정 계양의 첫째 아들 찬성공 식의 아들 6형제 중 넷째 아들 온계 해는 예조참판을 역임했고, 예서로 필명을 떨쳤으며,

여섯째 아들 퇴계 황은 조선 성리학의 종장이 되었다. 

퇴계는 일생동안 경의 자세로 진리를 밝히고 실천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종 때는 국장을 사양하고 묘갈 앞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새기게 한 이후, 5)본관을 진성으로도 쓰게 되었다. 

노송정의 둘째 아들 송재 우는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청해군에 봉해진다. 

이후 안동과 예안지역은 유교문화의 본고장이 되었으며, 후손 가운데도 6),안도,형남,영도,정회,정백,명익,동표,종수 등의

학덕을 겸비한 학자가 배출되고, 국난 때는 애국지사가 줄을 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a)만도,중린,찬화,중언,인화,긍연,명우,동하 등이 충절과 애국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육사 원록은 7)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조국 광복의 의지와 신념을 불태웠다.

진성이씨 가문은 많은 선비와 우국지사들을 배출하여 나라와 역사에 미친 영향이 아주 컸었다.


                      21세 광호 삼가 지음


                      진성이씨대종회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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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노송정할뱀이 진성군에 봉해져서 진성이씨가 된 것이 아닐까?

6)불천위(영도,명익,동표,종수)이거나, 작산정사(,형남,정회), 마곡()동계(안도) 유암서원(정백)에 배향된 분과 파별 안배를 함

항렬 우선과 나이 순

8세 완/ 9세 안도41, 형남56, 영도59/10세 정회,정백/11세 명익, 12세 동표, 17세 종수


a)건국포장 이상을 포상받고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 항렬 순,나이순

18세 만도, 19세 중린1838, 찬화1843, 중언1850, 인화1858,21세 긍연1847, 명우, 22세 동하

*송재와 온계선생은 최종 관직만 표시


이창환(온혜 23, 전 대구 청년유도회장) 의견

1)청송군은 현재이고, 진보현은 예전이므로 차라리 진보현으로 하고

2)봉군이 무난

3)당시의 풍산현 마애로 함이 무난

4)양공,양검,양호로 이어지며 융성한다.를 양공,양검,양호를 얻었다로 하던지..하여튼 이어지는 것은 아님(형제 나열을 이어진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

5)이후 보성, 진보라고 하는 본관을 진성으로 정하게 되었다.라고 단정하는 것에 일가어른들의 합치된 의견이 아니기에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곤란하다 생각됨. 

따라서 소견에는 초기 문적에는 진보로 표기되었으나 퇴계께서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에 진성으로 표기한 것이 최초인데 아마도 

노송정께서 진성군 봉군 받은 후인 것 같음....문자로 적절하게 표현함이 좋을 듯

6)학덕을 겸비한 선조는 많음

7)독립운동가와 시인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함이 옳을 듯

8)세대는 오래지 않다 함은 옳지 못함. 대개의 성씨들은 우리와 같은시기 고려중.말엽이기에.....따라서 삭제함이 옳을 듯

다른 명문거족에 뒤지지 않는다고 표현한 부분은 남과 비교하는 의미로 불필요하니 우리만의 특장점을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

 

·진보:송간공(시조사록),경옥재(시조유적고증),반초당(시조 묘갈명),신용개(노송정묘갈명),퇴계(찬성공행장),

진성:오죽유(庚子舊譜序),하계(가순.기곡재사 중건 상량),퇴계본인이 쓴 묘비명

 

*영주 창경 형님께 문의하니 퇴계 자신이 진성으로 쓴 것이 최초 문자이고,노송정께서 진성군 봉군 받은 것에서 유래한 듯하다 함

 

작산정사:주향-송안군/祔享-기암(8,),송계(9,형남),송간(10,정회)

유암서원:낙금헌(10,정백)

龍巖社:학천(봉춘),개곡(이장),경옥재()

향현사:노송정(계양)/ 청계서원:찬성공(),송재(),온계()

마곡서원:기암()/ 동계서원: 금란수, 이안도 배향

 

불천위:(선산부사),노송정(계양),송재(),온계(),퇴계(),동암(영도),반초당(명익),난은(동표),후산(종수)

시호: 온계(정민공), 퇴계(문순공), 충간공(난은 동표)봉군; 송안군, 진성군(노송정), 청해군(송재)

 

독립운동; 항렬 순, 나이 순

18세 만도(晩燾) 하계 1842-1910 독립장, 1차 선성의병대장,

19세 중린(中麟) 계상 1838-1917 용계마을, 계상파,

2차 선성의병대장

찬화(燦和) 온혜 1843-1925 4대 선성의병 대장/ 노송정 종손

중언(中彦) 하계 1850-1910 전기 의병, 자정 순국

인화(仁和) 온계 1858-1929 ; 3대 선성의병 대장,

21;긍연(兢淵) 두루 1847-1925 을미 의병 일기, 두루종손

명우(命羽) 부포 강정산파 1872-1920 夫婦 자정 순국, 애족장/

22세 동하(東廈)1875-1959 부포거주 호동파 종손 규락 아들,

구국 애국운동,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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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山(찬화):1843-1925.8.17.)4차 선성의병장;온혜 노송정 종손

(1차 이만도, 2차 이중린, 3차 이인화, 4차 이찬화)

긍연(두루종손/을미의병 1895)

중언(선성 2차 의병 전방장 및 자정 순국)

명우(夫婦 자정 순국, 1921)

규락; 호동파 종손, 부포 거주, 3父子(東廈-본격 독립운동,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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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 李仁和 백당종파| 진성이씨를 빛낸 사람들

이후림(우포22) | 조회 6 |추천 0 | 2012.09.20. 14:12

<독립기념관 자료> 栢堂宗派 19

이인화李仁和 1858. 12. 4~1929. 3. 14 號 元汝

출 신 지 : 경북 안동

훈 격 : 애국장 (1990)

운 동 계 열 : 의병

이인화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1895 12월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발생으로 인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에 항거코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96 10월에 영양英陽 출신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 의진에 참가하여 유격장, 선봉장 등으로 태봉전투를 비롯한 

여러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또한 격문檄文 및 포고문을 관청에 발송하는등의 구국 항일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관동의 평해平海, 강릉江陵,삼척三陟 등 지역에서 거의한 의병진과 긴밀하게 협조를 유지하면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1896 10월에 선봉장으로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되어 일시 퇴진하였다.

이후 전열을 재차 정비한 뒤 전방장前方將 이중언李中彦, 참모 이빈호李彬鎬 등과30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접전하는 등 

전기의병前期義兵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간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일군의 신식무기를 당하지 못하고 당시 국내 정세를 감안하여 1909년에 이르러 예안禮安에 선명학교

宣明學校를 설립하고 인재를 육성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후일에 대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1,國家報勳處,1986, p.851.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 284

· 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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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화 李燦和| 진성이씨를 빛낸 사람들 이후림(우포22) 2013.04.17.

         http://cafe.daum.net/lhl0775/FvcW/535

 

이찬화李燦和 : 선성의진 4 의병장 (온혜 노송정 종손)

국운이 기운 조선조 말엽(1895)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국권을 침탈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분노한 백성들은 

안동을 시발점으로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의 도산지역인 선성현에도 초대 의병장에는 하계마을의 향산 이만도,2 상계의 이중린, 3대 온계종손 이의화의 동생인 이인화,

 4대 노송정 종택의 종손인 이찬화 등이 의병을 규합하여 외세에 항거하였으며 특히 온계종택의 종손 형제(의화, 인화) 1896 6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의병장들과 연합하여 제2차로 상주 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일본군 경찰의 

반격으로 안동시내 1천여 호가 불타는 엄청난 피해를 당하였다

나아가 도산면 온혜까지 일본 경찰이 추격하여 예안 의병진이 태봉전투의 선봉에 섰다는 점과 당시 의병장이 온계종손 형제라는 이유로 온계종택에 불을 놓아 1896 7 29일 전소되었다

또한 퇴계선생의 후예이며 초대 선성의병장인 향산 이만도의 기를 꺾겠다고 퇴계종택에도 불을 질러 소실되는 참사가 있었다

 후에도 일본 경찰은 청량산 오산당이 의병의 소굴이라는 판단으로 또 다시 불을 질러 소실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 후 계속된 

의병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진성이씨 대종택인 주촌종택의 종손인 이긍연의 을미의병일기가 최근 안동대 김희곤 교수에 의하여 번역,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悅話 21, 2006(丙戌). 진성이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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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화 李燦和 - 溫惠宗派 19| 진성이씨를 빛낸 사람들

이후림(우포22) | 조회 13 | 2011.12.25. 17:28

      http://cafe.daum.net/lhl0775/FvcW/448


派名 溫惠宗派 19 姓名 이찬화李燦和

生卒年 1843 헌종9~1925 임시정부

 제백 齊伯 號 가산可山 

 

[이력사항]  

생년; 계묘癸卯 1843 

본관本貫 ; 진보眞寶 /거주지居住地 도산면 온혜리

전력前歷 ; 유학幼學

 

의병항쟁 ;이찬화는 4차 선성의진의 의병장이다.

그는 3차 선성의진의 의병소로 사용되던 삼백당이 화공火攻을 당하던 다음 날 9 7일 바로 의진을 수습하여 안동수비대의 뒤를 

추격했고안동수비대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했다. 

이후 9월 중순 이찬화는 선성의진을 이끌고 안동부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출처 :을미의병일기(이긍연) , 독립신문1896.9.26


증조부(曾祖父) 이학정 李學靖 증좌승지贈左承旨

조부(祖父) 이현우 李鉉禹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생부(生父) 이효영 李孝永

() 이만임 李晩恁 동추同樞

() 기화夔和

() 병준炳俊, 병걸炳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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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의진 宣城義陣 - 이빈호李斌鎬, 李善求, 李燦和, 李中麟, 李兢淵|

이후림(우포22)2011.09.24.http://cafe.daum.net/lhl0775/GTtB/10

 

선성의진 宣城義陣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예안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 의병 부대.

[역사적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5(고종 32) 말부터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안동 예안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선성의진 1895 12월 초에 시작되었다. 예안의병은 1895 12 30

( 11 15)에 내려진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촉발되었으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발단] 단발령이 예안 지역에 문서로 도착한 때는 1896 1 11( 1895 11 27)이었다.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 지역에서는 의병 봉기를 위한 통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안통문을 시작으로 삼계통문 청경(청성,경광서원)통문,호계통문 등 의병 소통문이 발의되었다.

 이 가운데 선성의진이 결성되는 발단이 된 예안통문 1896 1 13( 1894 11 29)에 발의되었으며 모두 223명이 

서명하였다.

 

[경과] 선성의진은 1, 2, 3, 4차에 걸쳐 결성되었다.

1차 의진은 1896 1 23( 1865 12 9)에 결성되었으며,결성과 해산을 거듭하면서 모두 네 명의 대장이 취임하였다.

하계마을의 이만도가 대장으로 추대되고, 이중린이 부장을 맡았다.

선성의진은 결성되자마자 안동의진이 관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동요한 병사들이 흩어지면서 결성된 지 9일 만인 

2 1일 해산하였다.

이에 이중린이 의진을 다시 추슬러 2차 의진을 결성하였다.

온혜마을 출신으로 1차 의진의 부장이었던 이중린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 의병 자금을 마련한 뒤 청량산을 근거지로 삼아 항전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2차 의진의 대장에 취임하였다. 2차 의진은 화좌, 풍기, 순흥, 영주, 봉화, 예천,예안 7읍의 연합 의진에 

참가하여 태봉전투를 벌였다. 

상주 함창의 태봉은 대구에서 충주로 연결되는 일본군 병참선상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3 20( 1 27) 선성의진 중군 김석교金奭敎가 이끈 선발대가 예천으로 향했고, 3 26( 2 13) 백마의 피로 맹세하는 

회맹會盟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때 김석교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중군을 김도현으로 바꾸었다.

한편 중군 김도현, 선봉장 이인화, 전방장 이중언이 이끄는 선성의진 본대는 3 28일 산양에 도착했다.

바로 이날 밤 호좌의진과 일본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3 29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선성의진은 태봉 공격에 앞장섰다.

그러나 연합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였고,선성의진 학가산을 거쳐 회군하여 3 31( 2 18) 예안으로 

돌아왔다.

태봉전투를 치르고 예안에 머물던 2차 선성의진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갖추었으나, 청량산 본거지마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때 청량산의 청량사淸凉寺와 오산당吾山堂도 화공으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또한 이보다 하루 앞서 퇴계 종택도 일본군이 불을 질러 건물 일부와  1,400여 권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9월에 들어서면서 3차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다.

3차 의진의 대장에는 2차 의진의 본거지가 무너진 뒤에도 다섯 달 동안 조직을 이끌어 온 이인화가 추대되었다. 

이인화는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종가인 삼백당 三栢堂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9 5( 7 28) 마침 예안 부포에 머물던

김도현과 앞으로 활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9 6일 관군 40여 명이 기습 공격을 하여 선성의진은 흩어지고 삼백당도 소실되었다.

3차 의진이 괴멸된 뒤 다시 온혜 노송정 종손인 이찬화가 의진을 결집하였다.

이찬화는 9 7( 8 1) 의진을 수습하고 안동 수비대를 추격하였다.

그 후 9월 중순경에 예안 지역에서 한 차례의 전투를 펼쳤는데, 이것이 선성의진의 마지막 전투였다.

 

[결과] 선성의진은 9 20일 이찬화가 이끄는 4차 의진이 해산하면서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선성의진은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고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리고 선성의진의 대장들과 참여자들의 항전은 국권피탈 이후에 독립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향산 이만도와 이중언은 자결 순국을 통해 항일 의지를 높였고,일부는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