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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가르침

퇴계 이황, 문순공의 연보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10. 13. 20:57

년 도 내 용
1501 (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1502 (연산군 8년) 생후 일곱 달 만에 부친(贊成公)상을 당하다.
1506 (중종 원년-6세) 글 읽기 시작하다.
1512 (중종 7년) 숙부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論語>를 배우다.
1515 (중종 10년)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독서.
1516 (중종 11년) 봉정사에서 독서.
1517 (중종 12년) 8월 경상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안동부를 순찰할 때 형과 함께 찾아가 강의를
듣다.
정신적 지주였던 숙부 별세.
1520 (중종 15년-20세) 침식을 잊고 열심히 주역을 탐독.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1521 (중종 16년) 부인 許氏(김해)를 맞아들이다.
1523 (중종 18년) 6월 장자 준(寯)이 출생. 상경하여 태학(성균관)에서 수학.
1527 (중종 22년) 경상도 향시 진사시(進士初試) 장원, 생원시(生員初試) 2등 합격,
10월 차남 채(寀) 출생.
11월 부인 허씨 별세.
1528 (중종 23년) 진사시(進士會試-사마시) 2등으로 급제.
1530 (중종 25년) 부인 權氏(안동)를 맞아들이다.
1532 (중종 27년) 문과 초시 2등 합격.
1534 (중종 29년-34세) 3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子)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
1535 (중종 30년)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
1536 (중종 31년)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9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
1537 (중종 32년) 모친(朴氏)상을 당하고 향리에서 3년간 복상.
1542 (중종 37년-42세)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어사가 되어 충청도 감찰
재상어사(災傷御史)로 강원도 감찰.
1543 (중종 38년)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
여러 관직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544 (중종 39년) 10월 상경 후 중종(中宗) 승하 후 고명을 지음.
1546 (명종 원년-46세) 7월 부인 권씨 별세.
1547 (명종 2년) 7월 안동부사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除授)되어 마지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548 (명종 3년-48세)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 선생이 이때 선정한 것이다.
1549 (명종 4년)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었음.
1549 (명종 4년) 9월 9월,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
1550 (명종 5년) 2월 계상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
1550 (명종 5년) 4월 광영당(光影塘-현재의 종택 자리) 조성.
1553 (명종 8년-53세) 4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퇴.
1553 (명종 8년-53세) 10월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
1554 (명종 9년)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림.
1555 (명종 10년-55세) 수많은 관직을 제수(除授) 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1556 (명종 11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려 뽑아 <朱子書節要>를 편차.
1556 (명종 11년) 12월 ‘향약(鄕約)’을 초.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짓다.
1557 (명종 12년-57세) 도산서당 터를 마련.
1557 (명종 12년-57세) 7월 <계몽전의(啓蒙傳疑)> 저술.
1558 (명종 13년-58세)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도학을 논함.
1559 (명종 14년) <송계원명리학통록(理學通錄)>을 편찬함.
1560 (명종 15년-60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하는 편지 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四端七情論)을 논변함.
1561 (명종 16년) 3월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경치를 돌아보고 도산기(陶山記) 등 명문을 남김.
도산서당, 농운정사 완공.
1564 (명종 19년) 4월 제자들과 청량산을 돌아봄.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6 (명종 21년)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음.
1566 (명종 21년) 10월 이언적(李彦迪) 선생 행장(行狀)을 지음.
1567 (명종 22년)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大行王)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8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除授)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제왕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자 왕은 정원(政院)에 병풍과 장첩을 만들 것을 명함.
1570 (선조 3년-70세)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하계몽>을 강의.
고봉 기대승과 심경정도(心經情圖)를 의논하고, 11월 그의 격물치지설(致知格物說)을 개정함.
12월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8일 한서암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책.
영의정으로 추증(追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領經筵弘文館藝文 館春秋館觀象監事 追贈.
1572 (선조 5년)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1573 (선조 6년) 11월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
1574 (선조 7년)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
1575 (선조 8년) 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1576 (선조 9년) 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여강서원(廬江書院) 위패 봉안.
1576 (선조 9년) 12월 시호 문순공(文純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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