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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고 배워라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10. 9. 21:35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장 김여환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까?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TV 뉴스나 신문을 통해 생전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을 접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죽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우리는 딱 한 가지 예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매일 숱한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사람,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장 김여환 의사다.

나는 ‘쥑이는’ 의사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심장의 멈춤을 알리는 심장박동기 소리와 함께 의사는 이제 막 세상을 떠난 환자 손을 꼭 붙잡고 사망선언을 했다. 그리고 환자의 감은 눈과 평화로움이 감도는 얼굴을 바라보며 차분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본인만의 방식대로 오늘도 환자와 영원한 이별을 한 그녀는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47)이다. 5년간 8백 번이 넘는 사망선언을 했고 그만큼의 이별을 했다. 수치로 보면 어마어마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아쉽다는 반응이다.

“의대에 다니는 아들이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나는 엄마처럼 죽이는 의사가 아니라 성격이 안 좋아도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대답했죠. ‘너 지금처럼 하면 죽이는 의사도 못 된다.’(웃음) 사실 아들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를 ‘죽이는 의사’라고 생각하세요. 심지어 같은 의사들한테도 그 말을 종종 들어요. 하지만 저도 ‘살리는 의사’예요. 마지막을 고통 속에서 보내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제가 하는 치료니까요.”
치료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병의 완치를 위한 ‘완치 치료’와 당뇨처럼 완치는 안 되지만 병의 증상을 조절하는 ‘통증 조절 치료’. 지금 호스피스 병동의 치료는 모두 통증 조절 치료다.

그런데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까지 거치며 배웠던 모든 것들은 호스피스 병동에선 부족하거나 아예 적용되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환자의 죽음을 공식화하는 사망선언. 일반적으로 환자의 심장이 멈췄을 때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사망했습니다.”라고 사망선언을 하는데, 죽음을 매일 코앞에 두고 있는 환자와 그들의 주치의는 달라야 했다. 어떤 목소리와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하는지, 죽음을 애도하는 자세는 어때야 하고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등 의과대학에서는 배우지 않았던 호스피스 의사의 마지막 역할을, 김여환 의사는 먼저 떠난 그녀의 환자들을 통해 차츰 배우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두 저를 ‘쥑이는’ 의사라고 하더라고요. ‘죽이는’을 대구식으로 발음한 건데요. 그 속엔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사망진단서를 많이 쓰는 의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쥑이게’ 재밌거든요.(웃음) 여기 오는 환자 대부분은 두세 달 안에 먼 곳으로 떠나세요. 그래서 함께하는 동안 저는 온몸 바쳐 웃겨드려요.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 진지해야 하고 엄숙해야 된다는 건 편견이에요. 죽음을 앞둔 삶도 삶이고, 일상이니까요. 하루를 웃으며 보내기에도 짧은 삶이라는 걸, 여기선 모두가 아는 거죠.”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저마다의 소설책을 갖고 있다고 한다. 출생부터 현재의 순간까지 빼곡하게 적어나가는 자신의 ‘인생소설책’ 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환자들은 지금 각자의 소설 마지막 장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통증이라는 방해물로 여태껏 적어온 인생을 파괴하지 않으며 각자의 삶에 맞는 엔딩을 쓰도록 하기 위해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호스피스 의사, ‘쥑이는’ 의사. 바로 그녀다.

내가 해야 할 일, 나만 할 수 있는 일

김 의사는 의과대학 재학 시절에 결혼한 후 13년간 가정주부로 살아왔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일상이라 의사로서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남편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나 의사로 돌아갈래.”

하지만 마흔 살에 하는 레지던트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열 살이나 어린 선배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할 때도 있었고, 같이 입학한 동기들은 왕성하게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부족한 의학 지식 때문에 과장으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멸시를 당하기도 한 고된 나날이었다.
“포기하고 싶었죠. 집에는 토끼 같은 자식과 나만 바라보는 남편이 제가 다시 가정주부로 돌아오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으니까요. 의사 일을 버려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자꾸 약해지는 이유가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마흔 살이나 먹은 내가 레지던트를 ‘빡세게’ 하고 있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 때문일 거라는 확신으로 버텼어요.”

정말 하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는 곧 ‘마흔 살 레지던트의 운명’과 만나게 됐다. 일반외과를 돌 때였다. 어디선가 마치 동물이 포효하는 것 같은 울부짖음이 병동을 쩌렁쩌렁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칠 법했지만 소리에 이끌린 건지, 운명에 이끌린 건지 그 병실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최악의 통증으로 유명한 담낭암 말기 환자였다. 치료를 위한 호스로 온몸은 결박된 상태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 울부짖고 있었다. 거기까진 의사로서 익숙한 광경이었다. 문제는 그 환자가 희생을 감내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감싸야 하는 목사였다는 것. 마침 병문안을 왔던 신도들은 목사의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곁눈질을 하기 시작했다.

“목사님이 어떻게 통증 하나 못 참고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느냐며, 신도들은 발병 전 환자가 착실히 살아온 그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의심했어요. ‘발병 전에도 저런 사람이었다’, ‘원래 목사로서 인성이 부족했다’는 등 신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제 억장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았는데도 목사님의 고통을 조금도 덜어드리지 못했어요. ‘내가 할 일이 바로 이거구나.’ 싶었어요.”

레지던트 수련을 다 마친 후 호스피스 의사로 살아가겠다고 했을 때 식구들은 물론 친척,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말렸다. 기껏 힘든 의사가 되고선 왜 사람 죽이는 일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걱정과 염려를 뒤로하고 당당히 호스피스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통증만 조절할 수 있다면 인격의 황폐화 없이 평화롭고 인간답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명이라도 더 빨리 통증을 조절해주고 싶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죽음을 응시해라

따뜻한 온기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갖고 밝게 웃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빛나던 사람일지라도 죽음이 지나가면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되고 타인에겐 공포가 된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의사는 다를까. 심장이 멈춘 어떤 이의 사체 앞에서 의사는 태연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레지던트 시절 하루에 세 번이나 사망선언을 한 적이 있어요. 일주일 동안 가위에 눌리고 밥도 못 먹었어요. 간혹 제 담당이 아닌 환자의 사망선언을 할 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제 담당 환자가 죽으면 정말로 슬프지만, 아닐 경우는 아무리 환자라고 해도 제겐 완벽한 타인이거든요. 타인의 죽음 앞에서는 저도 의사가 아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죠.”

호스피스 병동은 완치를 포기한 환자들이 통증을 조절하며 삶을 정리하는 곳이다. 결국 2~3개월 안에 죽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시시때때 찾아오는 곳에서 ‘살아 있는 인간 김여환’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처음 왔을 때 얼마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본능을 혹시 유족들에게 들킬까 봐 사망선언을 하자마자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고, 또 얼마간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기능적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그날도 사망선언을 하고 막 빠져나오던 순간이었어요. 유족으로 앉아 있는 아이들이 제 아이들과 또래였는데 갑자기 제 아이들과 겹쳐 보이면서 싸늘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인생 최초로 제 마지막과 만난 순간이었어요. 근데 웃기게도 영혼이 떠난 제 육신을 누군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니깐 화가 났어요. ‘나도 불과 몇 분 전까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던 사람이었거든!’ 이러면서요.”

다른 사람의 죽음을 항상 지켜보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죽음에서 배제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그녀. 죽음을 제대로 응시하면 삶이 달라지고 훨씬 여유로워진다며,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마지막과의 소통’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과 소통한 이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훨씬 현명해졌고 삶에 일관성이 생겼으며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삶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다고 했다. 또 하나 바뀐 점이 있다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미래를 포기하고 ‘뜨거운 오늘’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감사하며 현재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임종 체험’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입실 체험, 유언 남기기 등이 얼핏 자신의 마지막과 소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죽음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지난 삶을 되짚어보는 일의 본질을 흐리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신 임종실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생의 마지막 여관 호스피스, 오해와 진실

‘마지막 여관’이라는 뜻의 호스피스는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만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먼저 몇 가지 기준으로 호스피스 병동 입원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 심사보다 더 까다로운 심사가 있는데, 바로 환자와 보호자의 입원 결정이다. 통증을 없애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해도 열에 여섯은 호스피스만큼은 싫다고 한다. 그것도 화까지 내면서.

“호스피스 병동은 치료를 포기하고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강해요. 심지어 저희 어머니조차도 호스피스만은 절대로 안 간다며 완강히 거부하셨어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두 번 입원하셨는데, 곧바로 퇴원하셔서 통증 조절에는 실패했어요. 호스피스는 마지막에 오는 곳은 맞아요. 하지만 ‘왜’ 와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요.”

통증만 조절할 수 있어도 인간적인 죽음, 고통 없는 죽음이 가능하다.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입원 환자들에게 1부터 10까지 적힌 통증단계표를 주고 자신의 통증을 표시하도록 한다. 통증 4는 치통, 통증 7은 산통 수준인데, 대부분의 암환자는 7 이상이라고 표시한다. 한마디로 매일같이 아이를 낳는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통증 조절을 거부한 채 고통스럽게 죽음을 선택한다. 거부 이유는 통증을 조절하는 모르핀 때문. 대다수가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중독된다고 굳게 믿으며 마지막까지 처방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일반 사람이 모르핀을 쓰면 마약이지만 암환자에게 모르핀은 결코 중독되지 않는 ‘약’일 뿐이다. 모르핀을 두고 김 의사는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호스피스 의사의 입장에서는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모르핀으로 통증을 조절하는 일이 먼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인구 한 명당 모르핀 사용량은 호주의 152분의 1, 일본의 11분의 1 정도다. 우리가 그들보다 통증을 더 잘 참기 때문이 아니라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통증만 조절돼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아세요? 가족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갈 수도 있고, 통증 때문에 3개월 동안 씻지도 못한 환자는 목욕을 할 수도 있어요. 죽음을 앞둔 2~3개월이 짧다고요? 아직도 살 날이 2~3개월이나 남은걸요. 그동안 인생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혼자 가야 할 여정을 준비하는 거죠.”
“죽음의 맨 얼굴은 평화롭다”고 그녀는 거듭 강조했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라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며, 인간적인 죽음과 평화로운 죽음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했다.

당신의 컬러풀한 죽음을 위하여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은 잠을 자다 죽는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유언을 쓰고 유산을 정리하고 장기기증 서약까지 한 다음 죽는 것이라고 한다. 김여환 의사는 “발병 전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했다.
“너무 고통스러우면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어요. 암을 알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성격이 온화하던 환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갑자기 돌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암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온화한 성격으로 다시 돌아와요. 물론 고통이 없어야 가능하죠.”

그동안 우리는 죽음을 좋은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으로 나눠 생각했다. 이것을 흑과 백으로 구분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하며 ‘흑’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 의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죽음이 존재하니,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색을 유지해 ‘컬러풀한 죽음’이 가능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에도 문화가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문화는커녕 ‘좋은 죽음’에 대한 개념부터 새로 잡아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웰다잉 트라이앵글’이라고, 제가 만든 개념이에요. 영혼을 치료하는 성직자, 고통을 줄여주는 호스피스 의사, 옆에서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자원봉사자가 완벽한 삼각 구도를 이루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좋은 죽음, 즉 웰다잉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선 웰다잉 트라이앵글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 죽음의 질이 얼마만큼 올라갔는지 ‘수치’로 듣기 전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의 표정에서 그 답을 먼저 알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와 말기 암 환자가 한자리에 있었는데 누가 환자이고 누가 자원봉사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환자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호스피스는 병원이지만 환자의 병을 완치시킬 수는 없다. 환자의 삶을 돌봐주고 그가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통증을 조절해줄 뿐이다. 김여환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나 한 번은 오고, 한 번만 올 수 있는 곳’이다. 중세 수도사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인사로 건넸다고 한다. 죽음을 초월했지만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김여환 의사의 눈에서 중세 수도사들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메멘토 모리!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기획 임언영 기자 | 취재 이선희 | 사진 문채원 | 참고도서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청림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