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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박물관 여는 김경씨 본문
↑ [조선일보]사진 위쪽부터 종이 삿갓, 종이 함, 종이 신발.
↑ [조선일보]“선생 인생에서‘종이’란 뭔가”묻자 김경씨는 정교한 종이 손가방을 펼쳐 보이며“종이가 종이지 뭐냐. 별걸 다 묻는다”며 무심하게 답했다. 오른쪽 사진은 김경씨의 인생을 바꾼 종이 요강. 1965년 경북 안동에서 구한 것으로, 300년 넘은 것이다. /제주=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65년 경북 안동의 어느 대갓집 사랑방. 서울서 여행 온 41세 여성이 방구석에 놓인 뚜껑 달린 항아리 하나를 발견하곤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검게 옻칠한 그 항아리는 얼핏 보아 등나무 줄기를 엮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종이로 만든 요강이오." 이내 주인 할머니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멀리 시집가는 새색시가 가마 안에서 소변을 볼 때, 가마꾼들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말라고 종이 끈을 엮어 조심스레 요강을 만들었다는 설명. 옻나무 진액을 안팎으로 꼼꼼히 발라 소변이 샐 염려가 없다고 했다. 300여년은 족히 된 그 앙증맞은 물건에 혹한 여자는 이후 안동을 세 번 넘게 오가며 주인을 설득, 자개경대 하나와 맞바꿔 요강을 손에 넣는다. 그에게 '종이 수집가' '종이 연구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종이에 미친 여자
"왜 종이에 미쳤느냐고? 글쎄,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결혼을 해 보니까 시시해. 그래서 애를 낳았잖아. 그래도 아, 안 되겠어. 뭔가 해야겠어. 그러던 참에 종이 요강이 탁, 걸리더라고."
12일 오후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 종이연구가 김경(88)씨가 사연 깊은 종이 요강을 쓰다듬었다. 삿갓, 신발, 필낭(筆囊), 손가방, 옷장, 표주박…. 약 3305㎡(1000여평) 푸른 풀밭 위 흰색 단층 주택 안에 수백년 된 종이 공예품 180여점이 가지런히 놓였다. 요강과의 만남 이후 김씨가 40여년간 서울·진주·안동·제주 할 것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물건들이다. "인사동에 나갈 때마다 항상 손가방 안에 빳빳한 지폐 20만원을 넣어뒀지. 언제든 종이 작품을 발견하면 살 수 있도록. 집에 쌀이 떨어져도 그 20만원은 풀지 않았어." 값나가는 골동품도 아닌 종이 공예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그는 인사동 일대에서 '종이에 미친 괴상한 여자'로 소문이 났다.
김씨의 고향은 황해도 안악. 수천석지기 논을 가진 갑부의 외손녀로 고이 자란 그는 고녀(高女·일제 강점기 때의 고등 여학교) 3학년 때 퇴학당했다. "일본 학교 다니면서 겁 없이 교실에서 '동해 물과 백두산이~'를 불렀거든. 퇴학당하고 오니까 울 엄마가 기절했어." 그는 함경도 성진으로 전학 가 학교를 마저 마쳤다. 그리고 도쿄의 의대로 유학 갔다. "만날 뼈다귀 이름 아니면 괴상한 거 외우라니까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예과 다니다 말고 도망 나와 성진으로 돌아왔어. 거기 학숙(學塾) 문화인단체에 드나들며 문화 공부를 했지." 한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1960년대엔 김지미·박노식이 출연한 영화 '그대 옆에 가련다' 시나리오를 쓰는 등 활동했지만, '닥터 지바고'를 보고 도저히 저만큼은 못하겠다 싶어 걷어치웠다"고 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종이'로 옮겨간 김씨의 종이 사랑은 수집에만 그치지 않았다. 1977년 종이연구회 '한매재'를 설립해 본격적인 종이 연구에 나섰고,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연 '한국의 종이유물'전, 1995년 프랑스 파리 '종이 의상 초대전', 1996년 독일 베를린 '종이예술전' 등을 통해 우리 종이 유물의 아름다움을 온 세계에 알렸다. 그뿐 아니다. 독학(獨學)으로 우리 종이를 연구,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다'는 신라시대 잠견지(蠶繭紙), 질박하고 튼튼한 느낌의 '고려지' 등도 복원해 냈다. 이렇게 복원한 옛날 종이로 결 고운 종이옷을 지어 첼리스트 장한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소프라노 신영옥 등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10월 제주에 종이박물관 열어
"어때, 이 색깔 좀 봐. 곱지? 이 칸막이 좀 봐. 정교하지? 어떤 현대미술품도 이보단 못할 거야."
진열장 안에서 김씨가 연꽃·복숭아꽃, 박쥐 등이 당채(唐彩)로 그려진 화려한 종이 손가방을 꺼내 펼쳐보였다. 한지를 겹치고 접어 칸막이와 주머니를 만들고, 밥풀을 짓이겨 이음새를 붙이고, 겉에 기름을 먹인 이 손가방은 150여년 전의 것. 경기도 이천의 어느 뼈대 있는 가문에 가보(家寶)로 내려오던 물건이다. "일본서 전시할 때 이 물건을 가지고 나갔더니 어떤 일본 여자가 '이런 건 세상에 처음 본다'며 유리알 목걸이까지 선물하며 탐냈었지. 그러나 난 '우리나라에도 너무 귀한 물건'이라며 주지 않았어."
2008년 남편과 사별하고 지난해 제주로 이사한 그는 올 10월, 그동안 모은 종이 유물들로 제주에 종이 박물관 '종이의 집'을 연다. "'박물관', '미술관' 그런 말, 거창해서 싫어. 여긴 그냥 '종이의 집'이야. 관람객도 진심으로 오겠다는 사람 소규모로만 받을 거야. 입장료는 100원 한 닢도 받을 생각 없고." 김씨는 "국·공립 박물관에 기증할까도 생각했지만 세 딸이 '엄마가 평생 모은 거'라며 애틋해 해, 일단 내 힘으로 전시관을 열려고 한다"고 밝혔다.
가는귀가 먹고, 다리가 불편해 보행 보조기와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저녁 자리, "맛있는 거 먹을 때랑 지갑 속에 돈 두둑할 때 제일 근사해." 어린아이처럼 외치던 그가 문득 기자에게 물었다. "내가 죽으면, 와 줄 거야?" 40여년간 '종이때기'를 찾아 헤맨 그 눈빛이 순간 종잇장처럼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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