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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세계 8대 불가사의'-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 본문
▲ '원형극장'이라 불리는 바타드의 라이스테라스.
'세계 8대 불가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
하지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푸가오의 산들은 이방인을 그리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기가 되면 산사태로 인해 도로가 막히고, 때때로 만나는 비포장 도로는 힘 좋다는 지프니(Jeepney)까지 지치게 하는 곳이다.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에서 버스 직항로가 열려있는 바나우에(Banaue)조차도 장장 12시간여의 대장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낭을 둘러맨 이방인들은 저녁을 먹고 메트로마닐라에서 버스를 탄 뒤, 아침 나절에 바나우에에 도착했다.
그리고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바타드(Batad)가 위치한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나우에 주변 다른 여행지를 가고 싶은 욕심 하나와 라이스 테라스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욕 둘,
거기에 외딴 곳의 숙소에서 아침부터 늘어지기 싫다는 오기 셋이 더해져서 그들은 '즐거운 무리'를 감행한다.
▲ 라이스 테라스. 깍아지른 듯한 산을 맨 손으로 일군 이 곳을 사람들은 '불가사의'라 칭한다.
언제나 분주한 바나우에의 아침
오전 9시, 바나우에 바랑가이 홀(Barangay Hall : 우리나라의 동사무소) 근처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우기인 탓에 한시라도 빨리 산에 올라 경치를 보려는 이들도 있고,
다른 지역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여행 안내소(Tourist Information)를 서성거리는 이들도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8시쯤 출발하기로 한 사가다(Sagada) 행 지프니가 손님이 꽉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1시간 째 제자리 걸음이라는 사실,
그래도 여행객들은 상황에 따라 각기각색으로 변하는 필리피노 문화에 적응한 듯 서로의 여행담을 나누에게 여념이 없었다.
그런 풍경을 뒤로 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바타드(Batad)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지난해에 못본 탑피아(Tappia) 폭포를 보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어둑해지는 하늘은 영 심상치 않았다.
바타드로 가는 길, 길을 인도해주는 지프니 기사는 공교롭게도 지난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냥 자연스럽게 딸 안부를 물어보게 됐다.
그의 딸은 꼭 한 살을 더 먹었다.
바나우에 시내 근처에도 뷰 포인트(View Point)라 불리는 전망 좋은 곳이 많다.
이푸가오족 전통 의상을 입고 앉아 있는 아낙 옆에 장관처럼 펼쳐진 라이스 테라스가 있기도 하고,
수많은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은 바타드로 발길을 옮긴다.
대부분 엽서나 사진에서 나오는 수려한 풍경이 바타드의 그것인 이유도 있고,
이푸가오 고유의 홈스테이 양식을 체험하려는 뜻도 있고, 이곳이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인 탓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곳곳에 보이는 라이스 테라스를 벗삼아 등산로를 밟아보는 그 맛이 색다르기 때문에 오늘도 이방인들은 바타드를 찾는다.
그렇게 바타드로 향하면서 나는 바나우에의 분주한 아침에 서 있었다.
▲ 바나우에 시내에서 바타드로 가는 길. 관광객들을 위한 쾌적한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공사가 한창이다.
이 공사현장에는 대부분 마을의 젊은 청년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한 해가 다르게 문명의 이기가 뻗치는 바타드
지난해 두 시간 가량 걸리던 바타드의 초입 새들(Saddle), 가는 길 곳곳에는 큰 트럭과 포크레인들이 길을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 시간 가량 길을 달리자 난 그 곳에 닿을 수 있었다.
길이 너무 질거나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곤 하면 이방인들은 딱 그곳부터 걸어서 바타드로 가야했는데,
이제는 울퉁불퉁한 길에서 춤추듯 지프니를 탈 일도, 새들에 닿기도 전에 걸을 일도 곧 사라질 것이다.
바타드로 가는 등산로의 초입은 가파른 절벽으로 시작된다.
무거운 짐을 들고도 올곧게 직립보행을 하는 이푸가오 족의 모습을 보고 용기있는 이방인이 어설프게 따라하려 하면 넘어지기 일쑤인 길,
하지만 그도 잠시 조금 걸어가다보면 이방인을 배려하는 등산로가 펼쳐지면서 곧곧에 음료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 바타드에서 산골짜기로 한 참 내려가다 보면 이런 건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통가옥 발루이에서 현지 체험을 할 수도 있을텐데,
외국인의 편의를 위해 생기는 이런 건물은 발루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 시간쯤 걸어내려갔을까. 여러 콘크리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당이나 홈스테이라고 써있는 간판들의 모습, 지구 반바퀴를 감아돌 수 있는 2만 2400㎞의 기적,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라이스 테라스의 그 광경과는 사뭇다른 풍경이다.
이푸가오 족 전통가옥인 발루이(Baluy)가 자연스레 곳곳에 위치하면 좋으련만
문명의 이기는 그렇게 볼썽사나운 콘크리트 마을을 조성하고 있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원형극장. 파노라마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는
라이스 테라스의 광경은 그 콘크리트를 지나자마자 펼쳐진다.
그곳에서 1년 전 원두막에 앉아 기념품을 팔던 아버지와 이방인들을 맞던 귀여운 꼬마는
올해 선글라스 하나를 손에 든 채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이푸가오 족은 1년 전 내가 왔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의 알듯 모를 듯한 그 미소는 여전했다,
그 많은 젊은이들은 논두렁에 없다?
필리핀에서 쌀이 갖는 입지는 대단하다.
미국식 문화가 점령하다시히판 필리핀 사회이건만, 패스트 푸드점에서 밥을 파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랬다. 필리핀 사회에서 쌀은 다양한 형태로의 접목을 통해 아성을 지키고 있다.
그렇기에 라이스 테라스가 갖는 의미는 필리피노에게 그리 가볍지 않다.
그들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세계인에게 인정받았으며,
기원전부터 필리피노 만의 독자적 지혜와 기술로 그것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존재한다.
거기에 말레이계의 후손으로 사냥감을 쫒아 코딜레라 산맥 깊숙히 들어온 이푸가오 족,
정착이냐 이주냐의 갈림길에 산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아온 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라이스 테라스는 철기 시대가 도래하기 전 사람들의 맨 손, 단단한 나무와 동물의 뼈 등을 가지고 산을 개간하여 만든 계단식 논이다.
논 둑은 돌로 쌓고 진흙으로 막은 층층의 논은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을 가두어 놓는다.
거기에 산 꼭대기부터 돌과 대나무로 이어놓은 관개시설은 넓게 퍼져있는 논에 효과적으로 물을 대준다.
고산지대기에 연평균 고르게 내리는 강수량 역시 언제나 성공적인 논농사를 가능하게 한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는 이 과정은 오랜기간 자연과 함께하며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푸가오 족이 아니면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문제는 이 기술을 받을 젊은 세대가 지금 라이스 테라스 중심에 없다는 데 있다.
바타드의 뷰 포인트(View Point)를 감상하는 것은 지난해에 충분했기에 이번엔 논둑 길을 따라 한 시간 가량을 걸어봤다.
이따금씩 논둑을 보수하거나 잡초를 뽑는 이푸가오 족들이 몇 마디씩 말을 건네곤 했다.
논 가운데 서 있는 발루이에 걸터 앉았을 때 탑피아 폭포를 가기 위해 길을 물었던 일도 기억난다.
문제는 이 때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에게 친숙해진 젊은이들보다는 영어 사용이 서툰 것도 사실이었다.
▲ 바타드에 위치한 라이스 테라스의 일부, 요즘은 농사가 목적이 아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소문이 심심찮게 이 동네에 돌만큼 관리가 안되는 밭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젊은이들을 다 어디로 갔을까. 바나우에 시내 넘쳐나는 젊은이들의 모습,
등산로를 타고 오는 길에는 휴게소에 물자를 공급하러 지게질을 하거나 정식 가이드 교육을 받은 뒤,
이방인들을 안내하는 역할들을 하고 있었다.
관광에 따라 움직이는 서비스업은 그들에게 당장 큰 돈을 만들어준다.
관개시설에 시멘트가 발라지고, 라이스 테라스가 조망용으로만 변하는 건 아닌지, 때 마침 하늘에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오묘한 표정의 '쌀의 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밤을 꼬박 새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바나우에를 찾는 이방인들은 바타드를 찾는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일정탓에 왕복 6시간 이상 걸리는 탑피아 폭포 행은 웬만해서 당일치기로 하려하지 않는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 지난해엔 결국 탑피아 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곳에 가면 당신 영혼이 씻길 거예요."
▲ 탑피아 폭포. 누구든 그 곳에 가면 그 수량에 한 번 놀라고 그 깨끗함에 두 번 놀란다.
방대한 양의 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에 몸을 담고 달아오른 발을 식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풀리는 폭포에서 사람은 그런가보다.
그 순간을 즐기면 될 것을 어떻게 돌아가야하나 한탄을 하고 있으니.
돌아오는 길, 곳곳에 '쌀의 신(Rice God)'의 오묘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절구를 들고 있는 모습, 창을 들고 있는 모습,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모습.
그 옆에 있는 웃고 있는 태양의 모습과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문양의 모습들까지.
그들의 섬기는 그 신들과 문양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놀라운 장관 덕에 다시 한 번 찾겠지만 이방인들 탓에 인류의 유산이 소실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함에 입맛다시며 나의 두 번째 바나우에 행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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