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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새에 대하여---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8. 25. 20:21

 

조선의 국새 옥새는 몇 종류가 있었고 어떻게 달랐을까.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보인소의궤’의 영인본(학연문화사)이 최근 출간됐다. 보인소(寶印所)는 임금의 인장인 보(寶)와 왕세자나 왕비 및 정부기관의 인장인 인(印)의 제작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 보인소의궤는 이 보인소에서 제작한 보와 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 의궤는 당시 경복궁 교태전에 불이 나서 보인이 훼손되자 ‘조선국왕지인’과 ‘대조선국왕상상지보’ 등 보 6과와 ‘왕세자인’ 등 인 5과를 49일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영인본의 해제를 쓴 손환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보는 크게 사용처에 따라 어새(御璽) 어보(御寶)와 국새(國璽) 옥새(玉璽)로 나뉜다.

 

어새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宗廟)에 모셔져 제의용으로만 사용된다. 국새 옥새는 실무적 국사에 사용됐고 임금의 행차에 이를 실은 보여(寶輿)를 앞세웠고 왕위 계승식 같은 공식 의전에도 쓰였다. 국새 옥새는 다시 인사와 공무 처리 등에 쓰이는 신보(信寶)와 책봉과 외교문서에 쓰이는 행보(行寶)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3, 4과에 불과했지만 후대로 가면서 수십 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시명지보(施命之寶)’는 종3품 이상에게, ‘유서지보(諭書之寶)’는 그 미만의 관료에게 지시를 내릴 때 쓰였다.
 
국새 옥새는 6·25전쟁 때까지 80여과가 남아 있었으나 부산 피란 시기 화재로 모두 없어져 현재는 진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미디어 다음 검색)
 

   

 

 

"조선왕조 국새 모두 사라졌다…13과 분실 확인"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등 조선왕조 역대 국새(일명 대보) 13과(도장을 세는 단위)가 모두 분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지난해 11, 12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 등 문화재 관련 10개 기관에 대한 관리실태 감사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4일 밝혔다. 임금의 도장인 옥새에는 왕권 승계 및 외교문서에 사용한 ‘국새’와 대내 공문서에 사용한 일반 행정용 2가지가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조선왕조에서는 모두 13과의 국새가 제작됐으며 이 중 조선 최초의 국새인 ‘조선국왕지인’ 등 3과가 1971∼1985년에 분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10과는 분실 시기와 사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모두 26과가 제작된 일반 행정용 옥새는 21과가 분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어보(국가 행사 때 주조한 왕과 왕비의 의식용 인장) 316과는 대부분 인면(印面·도장의 찍히는 면)이 녹슬고, 인뉴(印(뉴,유)·손잡이)가 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옥새와 어보 등을 궁궐 안 행각 등 보존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곳에 보관하면서 이상 유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하고 있는 ‘대조선국 대군주보’가 국새의 견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대 조선 임금들이 외교 문서 등에 사용하던 국새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실물은 물론 제작 단계에 만들어진 모형도 국보급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조선시대 국새 13개 중 하나인 '대조선국 대군주보'의 목제 모형은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유물 창고에서 뒹굴고 있다가 지난해 감사관들의 눈에 띄었다. 발견 당시 이 모형은 '목재 조각품'으로 분류돼 있었다.
 
감사원은 이 밖에 정조 개인의 인장인 '극(極)' 등 모두 63종의 주요 인장이 각 고궁의 보관창고 등에 허술하게 보관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인장들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는커녕 보관 상태가 너무 불량해 인면(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인뉴(손잡이)가 거의 뭉개지고 깨져 있었다고 감사원은 설명했다. (미디어 다음)

 

 

 

 

 

  

대한민국 국새 제작의 음모론?!
 
행정자치부는 26일 '국새제작자문위원회' 제4차 회의를 열고 한글 훈민정음체, 봉황 손잡이로 만들어질 새 국새를 모든 일반국민이 참가할 수 있는 공모방식으로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작년부터 지리하게 진행되어진 대한민국 국새에 대한 여론수렴이 이젠 종지부를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지만 결정은 미리 내려졌다. 새로운 합의점을 찾기위해 국민 여론수렴이라는 이름하에 작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도 난리법석이더니, 결론은 결국 원점이다.
 
98년도 제작당시부터 금이간 국새 또한 인뉴의 형태가 봉황이었고, 인문은 한글 훈민정음체였다. 이제는 모형공모에 모든 일반국민이 참가할 수 있는 공모방식을 추진한다고 한다. 모든 일반국민이 관심을 갖고 함께하는 축제로 국새를 제작하려는  행자부의 취지인듯하다. 그러나, 모든 일반국민까지 참여하는 이 축제에 단 한사람이 빠져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한 옥새 전각장 민홍규 선생님이시다.
 
행정자치부는 새 국새 제작자문을 담당할 사학·전각·조각·주조분야 전문가 12명을 국새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고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를 위원장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자문위원 명단

 

▲위원장=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위원=김락회(제일기획 부사장), 김현(디자인파크 대표), 소재구(국립고궁박물관장), 안귀숙(인천공항 문화재 감정관), 이오희(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전도진(한국서예대전 심사위원), 정형민(서울대 미술관장), 조창룡(한국기계연구원 책임연구원), 최병훈(한국인장업연합회 이사), 최은철(한국전각학회 이사), 김국현(행자부 의정관)
위의 전문가 명단중 국새와 관련해서 전문가라 할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이는 자문위원회 본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제일기획,디자인파크,인장업협회,한국기계연구원 등 이런 사람들이 평생 국새를 몇번이나 봤을까?국새에 대해 무엇을 자문할 수 있을까? 진정,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옥새전각장이신 민홍규 선생님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정말, 철저하게 옥새전각장신 민홍규 선생님을 배제하고 있다.
옥새전각장이신 민홍규 선생님은 국가기록원에서 우리나라 옥새전각장의 계보를 잇고 있는 분으로 인정되어지고 있다. 또한 대한국세를 복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고,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전주국립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옥새전을 진행하셨다. 옥새에 있어서는 절대로 일반국민의 범주에 들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배제되어지는 이 상황이 이해 할 수 없다.
 
아래에 보여지는 봉황국새는 2006년1월 롯데명품관 애비뉴엘 갤러리에서 전시 되어졌던 작품이다. 그때 각 언론사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보도되어진 기억이 생생하다. 전시장에 오셨던 여러 관람객의 감탄사도 아직 생생하다. 옥새전을 보기위해 일본에서 직접 건너온 일본인이 나에게 "한국이 정말 부럽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직도 뇌리를 스친다.
 

 

 

국새의 손잡니모양을 삼족오로 국민의 여론을 모았지만, 식자들이 퓨전 까마귀니 택도 아닌 소리를 하더니 봉황으로 하기로 굳힌 모앙입니다. 옥쇄 전각장은 한국에 한 분 뿐입니다. 바로 민홍규씨입니다. 대한민국 국새도 있습니다. 조선국새가 아닌...바로 대한민국 지새라 합니다.

 

  

이 국새도 제작시에 말이 많았답니다. 99년도 국새는 최주 박사가 제작하였는데 금이 가서 부실제작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라도, 전각은 한글로 제작하는게 잘못되었다는군요. 그것도 하청제작이랍니다. 한글은 뜻이 없고 옛부터 내려온 갑골문에서 진화한 한자에 배치된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도  1962년대에서 1999년대 까지 썼던게 조악합니다. 그리고 국새가 금이 가는 이유는 국새안을 채우기 때문인데, 하루에 몇만건 서류에 찍어대는데 견딜 수있습니까?
속을 비워야 금이 가지않고 몇백년간다는군요. 위의 조악하게 만든 것도 그냥 덩어리랍니다.
제작 기본도 모르는 자들이 만드니, 나라 주권행사 상징인 국쇄가 제 몫을 다할 수있겠습니까?
(오딧세이)

기타 국새의 자료사진

 

  

 

 

 

출처 : 달빛과 바위
글쓴이 : 월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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