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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사전

우리나라 희귀 자료들 모음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8. 22. 23:22

 

육혈단포 총구,

방아쇠,노리쇠가 두 개씩인 쌍혈 단총으로 개화기 이전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성기 해방 전후에 유행했던 SP축음기와 판이다.

손잡이로 태엽을 감고 바늘을 판 위에

올리면 바늘 위쪽에 있는 소리통이 울린다.

유성기판의 한면에는 대개 1곡 정도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유성기를 소유했던 사람의 집에는 축음기 소리를 듣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인기를 독차지했다.

 

오른쪽 유성기판은, 장일타홍(張一朶紅)의 "창부타령",

김옥엽(金玉葉)의 "아리랑", 성광현(成光顯).

신불출(申不出).나품심(羅品心)의 폭소극인 "엉터리",

임방울의 "쑥대머리". "고고천변(皐皐天邊)"

등이 수록되어있는 판이다.

 

 

잡화점 1920년대 잡화접의 모습으로

갓신,나막신, 짚신,가위,안경집 등 온갖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상투를 틀고 긴 담뱃대를 문 주인의 모습이 이채롭다.

 

1920년대 조선의 아이들

무명 저고리 치마에 쪽찐 머리를 하고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이 마냥 선하다.

 

<엽서>남대문 옆 길 경성 남대문

옆 길로 흰 옷 입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수레,전봇대,

건물 등에는 일제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엽서>1920년대의 서울

앞 쪽에는 신식 건물들이 즐비하고 뒤 쪽으로 낮은 건물들 사이로

넓은 도로 끝에 조선침략의 본거지인 총독부 건물만이 눈에 띈다.

 

<엽서>

평양 시장 평양의 어느 시장 안 풍경이다.

머리에 이고 지고 끌고 흰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엽서>

독립문 우뚝 선 독립문 옆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제염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다.

<엽서>수원 화성 팔달문 화성(華城)은 정조(正祖) 20년(1796)에 완성된 성으로

정조 임금의 효심과 개혁의 뜻이 담긴 성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축성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팔달문(八達門) 앞 상점의 모습과 2층 누각의 뜯겨진 벽이 보인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 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한국 정자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이 각루는

평면구조가 아닌 다각화된 형상으로

사계절 변화의 미가 지금도 독특하다.

 

화홍문(華弘門) 광교산에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는 곳에

북수문과 남수문을 설치하였다.

 

북수문은 풍광이 아름다운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아래에 일곱 개의

아치형 석조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누각을 세웠다.

 

이것이 화홍문으로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華城)내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성벽은 장안문(長安門)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딘 발길을 재촉하던 이 긴 고개가 지지대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는 정조의 효심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순조7년(1807)에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각 안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수원신사(水原神社)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 황실과 그 공로자들 추모하는 곳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천도교 월보 1910년 8월 15일부터 1937년 5월까지 발행했던

천도교의 월간 기관지이다.

 

창간호부터 한글로 글을 싣고 있는 이 월보는 민중을 계몽하고 교양을

보급하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천도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설치한 재판소이다.

 

화성 창룡문(華城蒼龍門) 현재는 다시 복원되었지만 이 엽서 사진은

6.25 동란 중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얕은 언덕에 옹성을 두르고

연무대(鍊武臺)와 마주하고 있는 동쪽 성문으로

장안문이나 팔달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화성 화서문(華城華西門) 사진처럼 예전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서쪽문이다.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은

직접 성문 안으로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도시화되어 그 면모를 잃었다.

그 규모는 창룡문과 비슷하다.

 

 

화성 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성내를 조망할 수 있는 등성이에 건물과 조련장을 마련하였다.

앞에는 창룡문 옆으로는 동북공신돈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역 1930년대 조선 풍물 안내첩에서 수원역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전통 관청 건축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수원역사 건축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과 더불어

이러한 면모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입공희보(立功喜報) 이 증서는 1951년 8월 31일 한국전쟁 중,

중국 조선 철로 군사 관리국에서, 중국 요서성 철도현 형국동(邢國棟)에게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6.25 사변 중에 북한을 도운 공로로 표창한 증서이다.

 

제국신문 1898년 8월10일 창간되어 1910년 8월2일 폐간된 신문이다.

사장은 이종일(李鍾一)이고, 이승만(李承晩)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기자로는 이인직(李人稙). 이해조(李海朝) 등이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한글 전용으로 민족 언어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B4 판형의 절반 크기 정도의 2단제에서 1907년 6단제로 확대되어

매일 4면씩 2000부 내외로 발행되었다.

 

당시 일본 세력이 우리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던 상황에서 이 신문은

무능한 정부와 관리의 부패 및 일본 세력의 국권 침탈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따라서 일본 당국이 실시한 사전 검열 기사가 삭제되거나 정간처분을

받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먼저 간행된 '황성신문'이 한자 해독계층을 위한 특수층의 신문이라면,

[뎨국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함으로써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민중 계몽과 국권 회복을 위한 신문이었다.

 

 

선교 기념 스테레오 뷰 사진

1900년초 언더우드가 찍은 선교 기념 사진으로 당시 개화에 앞장 선 흰 옷 입은

아이들과 갓을 쓴 어른들이 선교회 서양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특수한 기계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는 사진이다.

 

전우(田愚) 선생 초상

조선 시대의 마지막 정통 유학자이신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의 초상 사진이다.

 

선생은 아산에서 임헌회(任憲晦)로 부터 학문을 사사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며,[안자편(顔子篇)], [오현수언(五賢粹言)], [연원정종(淵源正宗)]

등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강원도도사.사헌부장령.순흥부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자 군산도,계화도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여도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학군자로 자처하는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선생의 초상을 대하면 꼿꼿한 대학자의 맑은 면모가 느껴져 어지러운 이

시대에 위안이 된다.

 

 

남궁억 선생의 탑골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답사 사진

 

1904년 남궁억 선생이 잡초에 덮인 탑골 원각사터에서 우산을 들고

대원각사비를 바라보고 있는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구한말에 잠시 제작된 이 스테레오뷰 사진은

특수한 장치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도록 만든 사진이다.

 

뒤쪽에 당시 군악대 건물인 듯한 건축물과 한옥들이 보인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

조선 세조 때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석으로 현재 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다.

 

높이 4.9m, 너비 1.3m로 1471년(성종 2)에 건립되었다.

비의 앞면은 김수온(金守溫)·성임(成任),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徐居正)·

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대리석제의 비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 있다.

반구형의 이수는 비신과 한 돌로 보주를 받든 형상의 쌍룡이 조각되었다.

 

이수 아래쪽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전액을

강희맹(姜希孟)의 글씨로 새겼다.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기하무늬를 새겼으며

연잎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와 다리가 특이하다.

 

전체적인 조형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따라 복고적이나

조각이 번잡하고 사실적 표현이 미숙하다.

 

 

 

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 1955년 학예사에서 펴낸 안두희(安斗熙)의 수기이다.

l949년6월26일 12시45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흉탄은 아직도 이 나라

민족정기의 암울한 그늘로 우리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누가 이 수기를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려 한다지만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솟구치는 분노는, 오히려 오늘을 사는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연민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아니, 오늘의 우리는 지금도 김구선생님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의 진정한 통일과 자주독립을 이끄는 자가 지금 이 땅에 있는가?

안두희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응징 처단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모두 안두희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밭가는 농부 스트레오뷰 사진

1901년 '흰 옷 입은 한국의 농부'라는 제목으로 미국 Keystone 사에서 제작한 사진이다.

 

흰 바지 저고리에 상투를 틀고 쟁기로 밭을 가는 우리의 친구 황소,

이렇게 천년을 살아왔던 것인데 근대화의 한 순간, 과거로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 오던 그 삶의 모습 모든 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갔다.

 

의병장의 칼

두꺼운 가죽띠에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는 무명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창의병(倡義兵)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투혼으로 이렇게 흔적만 전해질 뿐이다.

 

한국 전쟁 중 포격 사진

기와집이 보이는 뒷밭에서 7명의 UN병사들이 방금 포를 발사하고

귀를 막고 있는 6.25 전쟁의 생생한 장면이다.

 

당시 20대의 젊은이들, 지금 살아있다면 70대의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43×35㎝의 대형 원판 사진으로 미국 ebay사로부터 구입한 사진이다.

 

황성신문 1899년 4월 5일자

1898년(광무 2) 9월 5일에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남궁 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국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맞아 사장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으로 장지연이 구금되고, 신문도 정간당하였다가 수개월 만에 복간되었다.

 

이 신문은 고종황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독자도 중류층 이상에 두었는데, 일본의 국권침탈로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다가 동년 9월 14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부인의 외출-

스테레오 뷰 사진 1904년 가마를 타고 외출을 하는 양반 댁 마님을 외국인이

촬영한 스테레오 뷰 사진이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흰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하인의

모습과 부인의 표정이 이채롭다.

 


이왕전하(李王殿下)와 전하비(殿下妃)


이왕세자(李王世子) 은(垠)과 왕세자비(王世子妃)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영흥선원전(永興璿源殿)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동경조거판어전(東京鳥居坂御殿)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이왕전하(李王殿下)와 전하비(殿下妃)

 

이왕세자(李王世子) 은(垠)과 왕세자비(王世子妃)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영흥선원전(永興璿源殿)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동경조거판어전 (東京鳥居坂御殿)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이왕가 기념 사진첩(李王家記念寫眞帖)

1919년 일본 동경 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 발행한 조선 이왕가

기념 사진첩이다.

 

서언(敍言)에서 태조와 세종의 큰 덕을 칭송하고, 고종황제가 동양대세에 의해

일한합병한 후 훙거하여 유감이라 하고,

약력과 장례 광경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다.

 

위 자료는 목차에 나오는 사진으로 태조대왕 단(旦=이성계)과 고종황제 희(熙),

이왕전하 척과 이왕세자전하 은(垠)의 약력을 기록한 뒤 사진을 싣고 있다.

 

 

근정전 근위병의 스테레오뷰 사진

1903년 미국 그레이브가 찍은 근정전의 청동 향로와 근위병의 모습이다.

외세의 눈에 비친 망국의 현장으로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화면에는

시름이 가득하다.

 

 

구한말 훈련대 구한말 대한제국 훈련대 병사들의 집총 훈련 광경 사진으로 미국

언더우드사에서 제작한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궁궐안에 자리한 시위대(侍衛隊) 병사들로 보인다. 1897년에 성립된 대한제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자체적인 국방강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새롭게 군복식을

제정하고, 외국에서 신식 화기와 장비를 도입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러한 시도도 열강들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한제국의 시위대는 1897년 1월 1개 대대로 창설되어 각개훈련, 소총조작법,

제식훈련, 총기 분해결합, 사격술 등 시아식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898년 5월 시위연대로, 1902년 10월에는 2개 연대로 증편되었으나

1905년 4월 다시 시위보병 1개 연대로 감축되었고,

1907년에는 1개 대대만을 남기고 모두 해산되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 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