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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수의 맥적산 석굴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11. 19. 22:20

 

 

▲ 맥적산 석굴의 <제13호굴>삼존대불입상. 돌산을 조각하여 기초를 만들고, 찰흙과 지푸라기 섞은 것을 그 위에 붙여 불상의 모양을 만들었다. 하얀 피부는 석회가루를 칠한 것이다.
ⓒ 조수영
여행 3일(8월 5일). 서안에서 열차로 4시간 거리인 천수에 도착했다. 천수로 가는 길에는 점점 사막이 가까워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반대 방향으로는 황토협곡 언저리에 간간이 보이는 숲을 통해서 내륙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BRI@감숙성의 남부, 위수강 상류에 위치한 천수는 춘추시대 진(秦)의 발상지였고, 위수 유역과 황하 유역을 잇는 통로에 해당하여 일찍부터 개발되었다. 중국정권 성립 후에는 화력발전소와 기계 공장이 건설되고 부근의 석탄, 철 등의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 공업도시로 변모하였다.

이곳이 천수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한나라 무제 때의 전설이 있다.

어느 날, 시내 남쪽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천둥번개가 울리며 땅이 갈라졌다. 이 갈라진 틈으로 하늘에서 물이 흘러들어 호수가 되었는데 이 호수는 언제나 일정한 수위가 유지되었고 물맛 또한 좋았다. 사람들은 이 호수를 천수정(天水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무제는 이곳에 성을 쌓고 천수군(天水郡)이라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천수에는 맥적산 석굴이 있다. 맥적산은 위·당시대 불교 중심지이며 190여 개의 석굴에는 불상 등 많은 불교 미술품이 있다. 중국 3대 석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돈황석굴과 용문석굴, 그리고 운강석굴이 꼽힌다. 여기에 천수의 맥적산 석굴을 더해 중국 4대 석굴이라 불리고 있다.

붉은 사암절벽에 190여개의 석굴이?

▲ 붉은 얼굴에 정수리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의 맥적산. 멀리 서쪽 절벽의 마애대불입상이 보인다.
ⓒ 조수영
맥적산 석굴은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있다. 넓은 들판을 달리다보니 드문드문 창고 같은 집들이 보인다.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라기엔 좀 크고, 사람이 생활하기엔 좀 허술해 보인다. 그 용도를 물어보았더니 수확철에 작물을 지키는 일종의 원두막이라고 한다. 가끔씩 도로로 나와 수확물을 내다팔기도 한단다.

많은 농가는 맥적산으로 가는 산릉선까지 끊이지 않는다. 집집마다 밀단을 봉우리모양으로 쌓아두었다. 시내에서 한 시간쯤 달렸을까. 주변은 온통 초록 숲인데 혼자 우뚝 솟아있는 붉은 맥적산이 나타났다. 마치 빨간 얼굴에 정수리에만 초록색 소나무를 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맥적산이란 이름은 이처럼 산의 모양이 밀을 쌓아 놓은 형상이라 붙여진 것이다.

주차장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맥적산을 끼고 돌면 서쪽절벽의 마애대불입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두들 낙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가이드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20년 전 이곳을 탐방했던 동국대학팀들의 사진에서 같은 배경에 낙타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낙타의 수명이 30~40년이라 하니 설마 그때 그 낙타인가?

16국 시대 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모아진 불심

▲ 붉은 사암 직벽에 190여개의 동굴이 조성된 맥적산 석굴. 관람은 동쪽 절벽부터 시작해서 천불상이 있는 3호굴을 지나 가장 크고 위쪽에 있는 4호굴과 5호굴을 보고 서쪽 절벽으로 내려오는 코스다.(직접 그림)
ⓒ 조수영
붉은 사암 절벽에는 4세기, 16국 시대에 불교석굴이 조성되기 시작해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 만들어지고 또 개조되었다. 서위시대에는 한때 300여 명의 스님들이 기거했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당나라 때 대지진으로 절벽이 갈라지면서 서쪽 절벽과 동쪽 절벽으로 나뉘게 되는데, 초기 석굴의 대부분이 서쪽 절벽 중앙부에 있고 역대에 걸쳐 점점 동쪽으로 발전해 갔다.

높이 150m의 붉은 사암 절벽에는 동쪽 벽에 54개, 서쪽 벽에 140개로 총 194개의 크고 작은 석굴이 있으며 1600여개의 벽화가 있다. 석굴에는 총 7200구의 불상이 남아있는데 일명 '동방조소진열관(東方雕塑陳列館)'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형태와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본생도나 변상도와 같은 벽화도 대량으로 조성되었다.

맥적산 석굴은 직각 90도의 절벽에 만들어진 석굴들이라 산 전체를 회랑식으로 이어놓은 통로와 계단이 없이는 오를 수 없다. 암벽등반에는 최적의 절벽일 것 같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통로가 좁아 단체 관광객이라도 만나면 제자리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된다.

석굴은 절반 정도만 공개되고 있고 나머지는 문을 만들어 잠가 놓았다. 또한 많은 석굴들을 철망으로 보호하고 있어 철망에 얼굴을 대고 보지 않으면 밖에서는 검은 동굴 형태만이 겨우 보일 뿐이다. 안내는 동쪽 절벽부터 시작해서 가장 크고 위쪽에 있는 4호굴과 5호굴을 보고 서쪽 절벽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자물쇠로 잠겨진 중요한 몇몇의 굴들은 가이드가 직접 열쇠로 열어 보여준다.

▲ 매표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큰 입상이 동쪽 절벽의 <제13호굴> 삼존대불입상이다.
ⓒ 조수영
매표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큰 입상이 <제13호굴> 동쪽 절벽의 삼존대불입상(三尊大佛立像)이다. 가까이서 보려 올라갔으나 워낙 거대한 바위산 석굴이라 오히려 바로 아래에서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거대한 석가모니의 입상들은 원래 있던 돌산을 조각하여 기초를 만들고, 찰흙과 지푸라기 섞은 것을 그 위에 붙여 불상의 모양을 만들었다. 작업을 위해 곳곳에 나무 기둥을 박아놓은 흔적이 보인다. 하얀 피부는 석회가루를 반죽하여 입상 전체에 칠하고,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다시 색상을 입혔다.

동쪽에서 오르는 계단은 당시의 것 그대로라고 한다. 계단을 다 올라가니 가이드가 이곳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한다. 뒤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단다. 그러나 아름다운 불상과 벽화는 앞만 보고 가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빨리빨리 나가라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계단을 오르니 <제3호굴>의 천불상이 있는 회랑이 이어진다. 우리가 지나가는 회랑의 벽면으로 2단, 회랑의 아래쪽으로 4단이 있는데 모두 합하면 총 6단, 297구에 이른다. 천개가 되지는 않지만 여하튼 많다는 의미로 천불상이라 이름 붙였나 보다.

▲ 계단을 오르니 <제3호굴>의 천불상이 있는 회랑이 이어진다.
ⓒ 조수영

▲ <제4호굴>은 북위시대의 것으로 맥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큰 석굴이다.
ⓒ 조수영
<제4호굴>은 북위시대의 것으로 맥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큰 석굴이다. 정면의 벽에는 장식된 7개의 감실이 있는데 모두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감과 감 사이에는 부리부리한 역사의 부조가 서 있는데 울퉁불퉁한 얼굴이 도깨비 같다. 굴의 양쪽에는 불상을 지키는 높이 4.5미터의 역사상(力士像)이 있으며, 그 위에는 작은 감실 안에 또 다른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4호굴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이곳에서 산 아래를 조망하는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에 서니 붉은 직벽과 겹겹이 보이는 회랑과 계단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4호굴과 좁은 통로로 이어진 <제5호굴>은 수당대인 7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곳이다. 3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중앙 감실의 입구에는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천왕상이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고 있다. 소의 등을 밟고 있다하여 우왕이라고 불린다. 붕괴의 위험이 있는지 묶어놓았다. 또한 중앙의 감에 있는 수나라시대 삼존불의 풍만하고 중후한 모습이 아름답다.

▲ 제5호굴을 지키고 있는 천왕상. 소를 밟고 있다하여 우왕이라 불린다.
ⓒ 조수영

▲ <5호굴>의 삼존불. 3개의 감 중 중앙에 있다. 수나라 때의 것으로 풍만하고 중후하다.
ⓒ 조수영
서쪽 절벽 끝에 위치한 <제147굴>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가이드가 문을 열자 높이 약1미터의 불좌상이 있다. 북위시대의 것으로 약간 긴 얼굴과 물결무늬의 옷 주름이 아름답다.

▲ <147호굴>. 약간 긴 얼굴과 물결무늬의 옷주름이 아름답다.
ⓒ 조수영
<제98호굴>는 오는 길에 보았던 서쪽 절벽의 마애대불입상(磨崖大佛立像)이다. 3개의 입상 중 하나는 표면의 흙이 무너져 내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북위시대의 것으로 본존의 높이는 13.8m로 이마가 넓고 표정이 근엄하다. 이 불상은 후대에 중수를 거칠 때 멀리서 보아도 얼굴형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눈꺼풀과 입술에 깊은 음각을 새겨 그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이라 한다.

왼쪽의 협시불을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는 그 표정이 요염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내려와서 보니 전혀 아닌 것 같다. 보는 관점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천수의 맥적산 석굴
ⓒ 조수영
석굴에서 내려오는 길에 전족을 한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할머니가 사진 찍기를 꺼려하시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그 끔찍하고 놀라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제로 보니 저 발로 어찌 걸을수 있을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건

장건(?~B.C.114)은 한나라 무제 때의 사람이다. 한무제는 늘 북방 흉노의 강성한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원래 몽골 고원의 지배자는 월지(月氏)라는 나라였다. 기원전 3세기까지도 몽골 고원은 월지의 세력 하에 있었지만, 기원전 210년 무렵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흉노가 월지를 몰아내고 몽골 고원을 차지했다.

한 무제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쫓겨난 월지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할 계책을 세운다. 그러나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 하고, 그 사막 곳곳에 있는 흉노의 세력권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뽑힌 사람이 장건이었다.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첫 번째 외교사절인 셈이었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서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장안을 떠난 장건 일행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농서라는 곳에서 흉노에 체포되고 만다. 그 후 10년 동안 흉노의 포로로 흉노 여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완전히 흉노 사람이 된 것처럼 살았다.

기원전 130년, 그는 흉노의 정세가 불안해진 틈을 타 탈출하여 다시 월지로 향한다. 드디어 대월지(大月氏: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근)에 도착하였으나 대월지는 이미 흉노에 대한 반감을 지우고 반농반목축의 안정된 생활에 젖어있어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한다.

장건 일행은 더 서쪽으로 대하국(大夏國:아프가니스탄 북부)까지 갔다가 한나라로 귀국하게 되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또다시 흉노에 잡혀 1년 더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기원전 126년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13년에 걸친 서역 원정길이었다.

장건의 서역 원정은 비록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대 성공이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비단을 통해 새로운 교역로와 시장을 개척하였다.

한무제는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여러 오아시스 왕국들과 우호관계를 형성하여 상인들을 보호함으로써 경제적 효용성을 증진시키고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 결과 북서쪽의 통행로와 감숙성의 회랑지대를 장악하여 안전한 상업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 조수영

덧붙이는 글 | 1) 본생도-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인 본생경을 제재로 한 그림
2) 변상도-부처님의 일대기 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

3) 석회가루-탄산칼슘. 석회석을 태워 이산화탄소를 제거하여 얻음. 물에 녹지 않는다. 하얀 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석회가루와 백토, 가는 모래를 섞어서 사용한다. 횟가루(산화칼슘)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