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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 Xian) - 중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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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 Xian) - 중국
시안(西安, Xian)은 중국의 샨시 성(Shaanxi, 陝西省, 섬서성)의 주요 도시이자 샨시 성의 성도이다.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로, 역대 중국 역사 중 가장 많은 황조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 문화 도시로 지정되어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온다.
시안(西安, Xian) / By chensiyuan (chensiyuan) [GFDL or CC BY-SA 4.0-3.0-2.5-2.0-1.0], via Wikimedia Commons
시안, 회족거리(muslim quarter) / By chensiyuan (chensiyuan) [GFDL or CC BY-SA 4.0-3.0-2.5-2.0-1.0], via Wikimedia Commons
명칭
시안(西安, 西京)은 '서쪽의 수도' 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 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베이징(北京, 북경)은 북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북경'(베이징)과 '남경'(난징), '장안-서경'(시안)은 중국 내륙에 있는 낙양(뤄양)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다. 시안(Xian)은 고대에 장안(長安)으로도 불렸고, 견융, 돌궐 등의 숱한 침략을 받았다.
도시의 역사
옛 주(周)나라의 수도 서기(西岐)가 이 부근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어 장안(長安)이라 하였으며 후한(後漢) 말기에 18제후 연합군에게 쫓긴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고 한때 이 곳에 들어왔다. 오랜 열국 시대가 끝나고 581년에 수(隋)나라의 수도, 618년에 당(唐)나라의 수도가 되어 300년간 국제 도시로서 융성하였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으로 일대 타격을 입고 침체되었다.
1936년 장쉐량이 일치 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억류하는 시안사건이 일어나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시안 시는 옛 이름은 장안(長安, Chángan), 경조라 하며 샨시 성의 성도에 속한다. 중국 지리의 중심으로서,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시안은 중국 6대 중심도시 중의 하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름난 도시이다.
시안은 중국 중서부지역의 중요한 과학연구, 고등교육, 국방 과학기술 공업과 고급 신기술 산업기지, 중국의 중요 우주비행, 항공공업센터, 기계제작센터와 방직공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시안은 비교적 튼튼한 공업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 중서부지역에서 과학기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공업부분에서 가장 완전함을 갖춘 대도시중의 하나이다.
북원문(北院門, Bei Yuan Men) 회족거리 / By Acstar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당(唐) 성벽 유적공원 / By FivosW at Chinese Wikipedia (Own work)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대명궁(Daming Palace) / By Cong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지리
시안은 황하 유역의 관중평원(關中平原) 중부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진령(Qínling, 친링)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위하(渭河)에 임한다. 지리좌표계 상 동경 107°40' ~ 109°49', 북위 33°39' ~ 34°45' 사이에 있다. 관중평원은 "팔백리진천"으로 유명한데, 넓고 평탄하며, 토지가 비옥하며, 자연조건이 매우 좋다. 시안이 바로 관중평원의 중부에 위치해 있다. 동서 최장 204km, 남북으로 약 116km에 달하며, 도시의 면적은 약 9,983㎢에 이른다.
시안의 지세는 동남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다. 평균 해발 고도는 약 410m이다. 시안은 자고로 팔수요장안(八水繞長安, 여덟 개의 물줄기가 감싼다는 뜻)이라고 불리었다. 시내 지역 주위로 파하, 로하, 풍하, 산하, 경하, 위하 등의 강이 흐른다. 그 중 다수가 황하 유역인 위하 수계에 속한다.
기후
시안의 기후는 온난대반습윤 기후에 속한다. 강우량이 적당하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서리가 내리지 않는 일수는 연평균 219~233일이다. 12월이 가장 추운데, 12월 평균기온은 약 -0.5℃~1.3℃이고, 7월이 가장 더운데, 7월 평균기온은 26.4℃~26.9℃이며, 연평균 기온은 13.3℃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07.7~71.8mm이고. 연평균 습도는 69.6%이며, 연평균 강설일수는 13.8일이다.
문화
시안의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의 하나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중인(關中人) 문명은 시안의 문명의 선례로 추측된다. 이들의 특징은 관중십대괴(關中十大怪)라는 말로 표현된다. 시안은 또한 장안팔경(長安八景)의 중심지이다.
시안, 서원문 거리 / By Ronnie Macdonald from Chelmsford, United Kingdom (Xi'an Market 04)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건축
시안에는 일곱 가지의 건축 양식이 존재한다. 최초의 세 가지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양식과, 당나라 양식, 그리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양식이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전 중국의 전통양식이며, 지붕의 색상과 세부에서 차별화되고 있다.
진한양식에서 지붕은 검은 색이고, 지붕에 장식이 발견되지 않으며, 당나라 양식에서는 붉은 지붕이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검은색과 어두운 녹색 지붕을 사용하고 있다. 건축물은 크고 대형이 특징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지붕은 노란색을 널리 사용하게 되고, 세공과 그림이 지붕 아래에 도안되었다.
민국(民國)양식은 가장 인기있는 예제 중의 하나이며, 소련식 양식도 19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소련의 도움으로 지어진 시 서쪽의 공장에 널리 지어지게 되었다. 현대양식은 하이테크 지역과 경제 개발구에서 많이 발견된다. 신당(新唐) 양식 이라 불리는 새로운 중국의 양식도 추 강(曲江) 부근에서 많이 발견되며, 전통과 현대양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산시 역사박물관과 시안 박물관이 이 양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볼거리
춘절이나, 노동절(5월 1일~7일), 추석(10월 1일~7일) 등은 장기 휴일이기 때문에 이 기간은 피하는 것이 좋다. 5월부터 9월까지 여행객이 가장 많지만, 시안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가을 이다.
시안의 시내와 외곽에는 넘칠 정도의 역사 유적이 있기 때문에 관광이 시의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이며, 시안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여행 목적지 중의 하나이다.
시내
샨시 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샨시 역사박물관은 시안 시 남부의 샤오자이동루(小寨東路), 대안탑의 서북쪽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983년 시공하여, 1991년 6월 20일 개관한 중국 제일의 현대식 대형 국가급 박물관이다.
중국의 전총리였던, 저우언라이의 마지막 소망에 의해 지어진 박물관으로, 1983년부터 준공이 시작되었다. 이 박물관은 65,000㎡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건물 면적만 해도 55,600㎡가 되는 큰 박물관이다. 역사 유물보관실은 8,000㎡, 전시관은 11,000㎡이며 모두 37만점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이 박물관은 중앙의 홀과 측면에 계단을 가지고 있는 당나라식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섬세하며 전통과 현대를 잘 조화시킨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샨시는 옛날부터 수세기에 13대 이상에 걸쳐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까지 왕조의 수도로 넘치는 문화 유적을 가지고 있다. 샨시 역사박물관의 완성으로 발굴된 37만 점 이상의 유물을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기류, 도자기류, 당나라 고분의 벽화 등 수많은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의 개발로 수많은 유물들이 수집되고, 보존되고, 출판과 교육, 과학연구 등이 이루어졌으며, 일부의 유물은 일본이나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등지에 전시되기도 하였다.
박물관은 시대분포에 따라 전시를 하며, 제1전시관, 제2전시관, 제3전시관으로 나뉘어, 주나라에서,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네 개 왕조를 중점으로 섬서의 역사를 전시를 한다. 제4, 제5전시관과 동전시관은 주제를 정하지 않고, 부정기적으로 주제를 바꿔서 전시를 한다.
샨시 역사박물관 / By Dennis Jarvis from Halifax, Canada (China-7429)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비림(碑林)
비림은 시안시에 있는 박물관으로 아카 시안비림박물관 또는 시안비림박물관이라고 한다. 비림은 말 그대로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은 비와 석조로된 박물관이다. 비림이 조성된 것은 11세기 공자 사당이 자리를 잡으면서이다.
비림 / By Jiang yì jiong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대자은사(大慈恩寺)
대자은사는 시안 시 남동쪽 교외에 있는 불교사원이며, 삼장법사 현장, 신라의 승려 원측과의 연고가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 옛 땅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 왼쪽 거리의 진창방에 해당되는 장소이다.
당 태종의 태자 이치(李治)가모후인 문덕황후(文德皇后) 장손씨의 명복을 위해 처음 절을 세웠다. 자은(慈恩)이라는 이름부터가 「자애로우신 어머님의 은혜」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각지에서 인재가 모여들며 그 규모는 더욱 커져, 자원(子院) 즉 탑두 10개 소를 포함해 건축물은 총수 1,897칸, 승려만 300명이 넘게 있었던 큰 절이었다. 영휘(永徽) 3년(652년)에는 대안탑(大雁塔)이 건립되었는데, 현장 법사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이나 경전을 수장하기 위한 탑이었다.
명(明) 가정(嘉靖) 29년(1550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자은사가 건립되었다. 절 안의 종루에는 철제 범종 한 구가 걸려 있는데 가정 27년(1548년)에 주조한 것으로 무게 3만 근에 위에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관중팔경(關中八景)의 하나이다. 절 안의 모란정(牡丹亭)에는 70여 종에 달하는 모란이 심어져 있으며, 현장 법사의 기념관이 있다.
대자은사 / By Emcc (Own work) [GFDL o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대안탑(大雁塔)
대안탑이란 652년에 당나라의 고승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경전이나 불상 등을 보존하기 위해서 고종에게 요청하여 건립한 탑이다.
높이는 7층 64m로 현재는 서안 시의 동남 교외에 있는 대자은사의 경내에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5층이었지만, 중간에 10층까지 증축된 후, 현재의 7층만남았다. 지금도 최상층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하며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
대안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보살의 화신으로 기러기의 무리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죽은 기러기 한 마리를 탑을 지어 매장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대안탑 / By Fyw321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젠푸사(薦福寺, 천복사)
젠푸사는 시안 시 남쪽 교외에 있는 불교사원이다. 그 옛 땅은 당나라 때의 수도 장안성 왼쪽 거리 주작대가에 접하는 개화방과 안인방의 두 방에 해당한다.
천복사는 원래 중종 이광이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저택으로, 684년(문명 원년) 고종이 병으로 승하하자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무측천(측천무후)이 건립한 헌복사가 그 시작이다. 헌복사는 수나라 때 양제 진왕의 저택이 있던 옛 땅이기도 하였다. 690년(천수 원년)에 현재의 천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706년소안탑이 건립되었고, 대천복사는 화엄종과의 관계가 깊어, 운화사와 함께 장안에서 화엄 교육과 학문의 성지로 여겨져 소안탑은 화엄탑이라고도 불렸다.
청나라 때 천복사는 여러 번 중건되었고, 강희제 31년 가장 큰 중건이 이루어졌다. 청나라 말기에는 남산문 등의 많은 건축물들이 추가로 세워졌다.
젠푸사 / By yíyuán xinju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소안탑(小雁塔)
소안탑(小雁塔)이란 중국 당나라 때 장안성 내의 젠푸사(천복사) 경내에 경용(707년 - 710년) 년간에 건립된 벽돌탑이다.
높이는 현상으로 13층 43 m이지만, 당초는 15층 88 m 있었다고 여겨진다. 지진 등에 의해서 붕괴해 현재의 모습이 되어 있다. 젠푸사의 가람은 변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소안탑은 안인방에 있지만, 젠푸사는 북린의 개화방에 있었다. 일명 화엄탑이라고도 한다.
송대 이후, 지진 등의 재해가 자주 있어,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명나라 가정 34년(1555년)에 기록된 탑 아래층에 남는 제기로 보이는 지진의 피해와 복구에 관련된 일화이다. 이 글에 따르면 지진에 의해서 탑이 두 개로 찢어졌는데, 다시 지진이 일어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성화 말년(148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탑에 반대쪽이 보일만큼 균열되었지만, 정덕 말년(1521년) 지진에 의해 하룻밤만에 탑이 복구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소안탑 / By Zossolino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종루(鐘樓)
종루는 명나라 초기에 세워진 시안 시의 상징물로 1384년에 세워졌다. 중국에 있는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종루에는 당나라 시대 만들어진 대형 청동 주조로 된 종이 여러 개 있다. 종루의 누각은 정사각형이며, 1,377㎡의 면적으로 벽돌과 원목을 사용하여 40m 높이로 지어졌다.
남문에서 위쪽(북)으로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교통의 중심이자, 여행의 중심지가 된다. 종루에서 고루는 한눈에 보이며 직선거리로 260m 떨어져 있고, 오른편으로 종고루 광장을 끼고 기역자 형태로 위치한다.
종루 / By Maros M r a z (Maros) (Own work) [GFDL, CC-BY-SA-3.0 or CC BY-SA 2.5-2.0-1.0], via Wikimedia Commons
고루(鼓樓)
시안 고루는 명나라 초기 1380 년에 지어졌다. 높이 33 미터. 청나라 시대인 1699년과 1740년에 복구가 행해졌다. 고루의 북서쪽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시안대청진사(西安大淸眞寺)가 있고, 고루의 북쪽에 무슬림이 많이 살고 있어, 청진요리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 등이 많이 보인다.
고루 / By Wang Zhongyin (Own work) [GFDL or CC BY-SA 4.0-3.0-2.5-2.0-1.0], via Wikimedia Commons
시안성벽(西安城壁)
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건조한 것이다. 이후 또 수차례 중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악문(長安門), 안정문(安定門),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뉘어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다.
시안성벽 / By Maros M r a z (Maros) (Own work) [GFDL, CC-BY-SA-3.0 or CC BY-SA 2.5-2.0-1.0], via Wikimedia Commons
시외
병마용(兵馬俑)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린퉁 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 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병마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병사들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도 발굴이 되지 않은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테라코타(terracotta)이다.
테라코타 병사 / By Dennis Jarvis from Halifax, Canada (China-7244)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테라코타 병사 / By Dennis Jarvis from Halifax, Canada (China-7252)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테라코타 병사 / By Zossolino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테라코타 병사 / By Jmhullot (Own work)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진시황릉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이 34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6 세기가 지난 때에 저술된 사서이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이며, 수은이 흐르는 5,000여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 안에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진시황릉은 지상 궁전을 재현한다는 개념으로 지어졌으며, 완공이 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던 인부들을 모두 사살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그리고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테라코타 병사 / By David Castor
테라코타 병사 / By Kevin Poh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테라코타 병사 / By palindrome6996 (Army of Terracotta)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강력했던 권력을 상징한다.
병마용갱은 1974년 1호 갱이 발굴된 이후 현재까지 발굴이 진행 중이다.
채색 복원한 테라코타 병사 / By Charlie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1호 갱 : 1974년에 발굴되었다.총 14260제곱미터이며, 진용 약 6000구에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1호 갱 / By chensiyuan (chensiyuan) [GFDL or CC BY-SA 4.0-3.0-2.5-2.0-1.0], via Wikimedia Commons
1호 갱 / By Hans A. Rosbach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호 갱 / By Hans A. Rosbach (Own work)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호 갱 / By Zossolino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2호 갱 :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있다.
2호 갱 / By Maros M r a z (Maros) (Own work) [GFDL, CC-BY-SA-3.0 or CC BY-SA 2.5-2.0-1.0],via Wikimedia Commons
2호 갱 / By Zossolino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3호 갱 : 1976년에 발굴되었으며,완전 발굴된 520제곱미터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진용 78건, 전차 1대가 출토되었다.
3호 갱 / By Zossolino (Own work)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3호 갱 / By Maros M r a z (Maros) (Own work) [GFDL, CC-BY-SA-3.0 or CC BY-SA 2.5-2.0-1.0],via Wikimedia Commons
4호 갱 : 다른 갱도와 달리 병마용이 없이 비어있는 갱도였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이다. 여산, 또는 역산은 산시 성 시안에서 30 km 떨어진 동현의 원산원(驪山園)에 있는 야산이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의 무덤은 76m로 무덤이 있는 야산은 옛 진나라의 수도 함양의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에 무덤을 착공하여 통일 후에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진시황릉은 병마용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한 위치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금의 진시황릉은 다분히 황릉의 위치와 역사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전시용이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가는 200m 정도의 계단을 설치하고 규모만 파악할 정도의 의미 밖에 주지 못한다. 지금도 넓은 산에 발굴이 계속 중이며, 언젠가는 발굴이 끝나 실체를 밝힐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진시황의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하여,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내와 강을 이뤄 바다가 형성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하여,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수은으로 인해 지하궁전은 완전한 도굴이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1974년 3월 29일에 한 농부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1987년에 병마용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진시황릉 / By wit (http://www.flickr.com/photos/-wit-/239198883/)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화청지(華淸池)
화청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시의 동쪽 35km 떨어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이 있어서, 43도의 온천수가 샘 솟는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니 3,0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때는 '여궁', 진나라 때는 '여산탕', 한나라 때는 '이궁'으로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다.
화청지 / By The original uploader was Yyk at Chinese Wikipedia [GFDL or CC-BY-SA-3.0], via Wikimedia Commons
아방궁(阿房宮)
아방궁은 진시황제가 세운 궁전이다. 함양과 위수 근처에 있었다. 시안 시 서측 13km의 아방촌(阿房村)에 남아 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 진이 멸망한 탓에 미완성으로 끝났다. 없었던 명칭을 세인이 지명을 따서 아방궁으로 지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아방궁 유적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사기》에 의거하면, 궁전 건축물 규모는 동서로 5백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600m~800m, 남북으로 113m~150m에 이른다. 그 건축에 동원된 인력 수는 70여 만에 달했다.
각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배치하였고 진 궁전을 만들어 진의 미인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거기서, 조(趙)의 비(肥), 연의 수(瘦), 오의 희(姬), 월의 여(女)를 위시해 각각 미를 겨루어 조가야현(朝歌夜絃), ‘삼십육궁혼의 봄’이라는 광경을 이곳에서 출현하게 했다. 두목의 ‘아방궁부’(阿房宮賦)에 한 노래가 반드시 과장은 아니다.
《사기》에 기술된 진 멸망 부분에 기록된 “아방궁은 초 항우에 의거해 불태워졌다”(3개월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 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항우에 의거해서 불탄 것은 함양궁이고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라는 설이 2003년에 제기되었다.
현재 유적 부근에 아방궁을 재현한 테마파크가 만들어져 관광 명소화 했다.
화산(華山)
화산은 중국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다. 시안 시 동쪽으로 약 120 km, 시안(西安)과 정저우(鄭州)의 중간인 '화인(Huayin) 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서안에서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높이 2,437m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조양봉(동봉, 2,090m), 낙안봉(남봉, 2160m), 연화봉(서봉, 2,080m), 운대봉(북봉, 1,614m), 옥녀봉의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며, 험준한 산길과 가파른 계단길, 철난간이 걸려 있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곳을 지나 산정에 이르면 위하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화산 / By harryalverson on Flickr (Flick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화산 / By chensiyuan (chensiyuan) [GFDL or CC BY-SA 4.0-3.0-2.5-2.0-1.0], via Wikimedia Commons
시안 / By McKay Savage from London, UK (China - Xian 1)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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