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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瀟湘八景)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8. 25. 20:56

소상팔경(瀟湘八景)

 

長沙 공항 앞에 서있는 지역신문광고

 

중국은 너무 크고 중국인 또한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중국 전문가가 없다고도 합니다.

누구도 중국을 또는 중국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과 중국인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좀더 많은 곳을 가보고 좀더 여러 사람을 사귀어봐야 합니다.  현 중화인민공화국을 이해하려면 후난셩(湖南省)과 후난런(湖南人)을 이해하는 것이 쓸모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주요 인물의 다수가 후난런(湖南人)이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 류사오치(劉少奇), 펑더화이(彭德懷), 후야오방(胡耀邦), 쥬롱지(朱鎔基) 등등.

일반적으로 후난런(湖南人)은 보수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갖았다고 합니다. 보수적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도 강하고, 이상주의적이기에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속으로는 과격한 태도를 숨겼다고 합니다. 복합적인 성향 때문에 예측하기 힘들고 때로는 과격한 태도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하는 후난런을 이해하기 위해 후난의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한 고장의 지리와 역사를 알면 그 고장의 인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2001년 9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일본에 유출돼 있다가 재일동포에 의해 수집된 그림이 귀국을 합니다. 

 

 작품을 감정한 전문가들은 "먹의 농담(濃淡)에 계절의 변화가 잘 표현됐고 구도 역시 뛰어난 국내 최고 수준의 '소상팔경도'"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족자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병풍이었다. 시가 50억원을 호가하는 이 그림은 국공립박물관 기증 단일 문화재 중 가격면에서 최고 수준이다. 현재 국내엔 안견(安堅)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소상팔경도'가 있지만 이 그림이 작품성이나 크기면에서 훨씬 더 뛰어난 대작이다. (2001년 9월 10일, 동아일보)

현 시가 50억원의 ‘소상팔경도’, 김용두 옹이 국내에 반환한 그림 중 일부인 제2경 '평사낙안'과 제5경 '강천모설'입니다.

 

평사낙안 강천모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무엇인가?  

 

 ‘소상팔경도’는 말 그대로 소상팔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상팔경이란 소상(瀟湘)의 8가지 경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소상(瀟湘)은 어디인가? 소상은 결국 8개 각 그림이 그려진 장소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1경 瀟湘夜雨 (永州城東) 영주 강변의 밤비 내리는 풍경

2경 平沙落雁 (衡陽市回雁峰) 강변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3경 煙寺晩鐘 (衡山縣城北淸凉寺) 안개 속 산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4경 山市晴嵐 (昭山) 아지랑이 속의 산마을
5경 江天暮雪 (長沙橘子洲) 저녁 눈 내리는 강의 풍경
6경 遠浦歸帆 (湘陰縣城江邊) 멀리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들의 모습
7경 洞庭秋月 (洞庭湖) 동정호의 가을 달
8경 漁村夕照 (西洞庭武陵溪) 어촌의 지는 해 

 

위의 주소로 지도를 찾아보면 소상은 현 행정명칭 상 영주(永州)에서 시작해 상강(湘江)을 따라 북으로 내려가면서 나오는 형양(衡陽), 형산(衡山), 소산(昭山), 장사(長沙), 상음(湘陰), 악양(岳陽) 그리고 무릉계(武陵溪) 지역의 집합입니다. 즉 간단히 말해 영주(永州)에서 동정호(洞庭湖)까지의 지역입니다. 바로 이곳이 소상이고 호남성의 절경 지역입니다.

 

 우리 선조에게 소상팔경은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며 꿈 속에서나 가볼 수 있고 현실로는 갈 수 없는 유토피아'처럼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던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잠시 고단한 현실을 잊고 상상이라도 가서 행복감을 느껴보는 곳, 허구로 만든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그래서 더욱 믿고 싶은 이상향이 되었습니다.

소상팔경이 어떻게 우리 선조들에게 그런 현실 속의 이상향이 되었는지 살펴보려면 이야기는 소상팔경도의 탄생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합니다. 안견은 조선 초기의 화가로 조선 시대의 화풍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대가였습니다. 그런데 안견의 소상팔경도 뒤에는 안평대군이라는 거물이 있습니다. 안평대군은 그 스스로도 유명한 서예가였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명화(名畵) 콜렉터로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가 소장했던 명화들의 목록을 보면 宋시대 곽희(郭熙)의 '평사낙안도'와 '강천모설도'가 있습니다. 바로 소상팔경도의 여덟 개 그림 중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元시대 이필(李弼)의 소상팔경도는 여덟 개 그림 모두를 다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은 안견이 이 그림들을 참고로 하여 소상팔경도를 구상했으리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과 같은 어머어마한 후원자가 있는 안견은 동료 화가들과 후배 화가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겠지요. 왕족의 고급스러운 기호에 맞는 그림을 잘 그려야 최고의 출세를 할 수 있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안견의 그림들이 두고두고 후배 화가들에게 모방과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래 두 그림 중 왼쪽은 김용두 옹이 소장하던 산시청랑이고 오른쪽은 정선이 그린 산시청람입니다. 전체적인 구도와 배치가 같은 걸 보면 소상팔경도는 모방과 재해석의 예술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산시청람 (山市晴擥)

겸재 정선의 산시청람

 

 

소상팔경도는 왕족만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귀족 계급인 사대부도 좋아했습니다. 사랑방의 8첩 병풍 문화가 있던 때 소상팔경 병풍은 집 주인의 높은 교양을 말해주는 좋은 도구였습니다. 그렇게 소상팔경도는 차츰 대중화되어 조선 말기에는 일반 서민들의 집에의 벽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흔해졌습니다. 소위 이발소 그림의 대열에 끼일 정도로 정말로 대중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공급과 소비가 함께 팽창해 대규모 시장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그 수 많은 소상팔경도를 그렸던 수 많은 화가와 화공들 중에 소상팔경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당시의 교통 수단과 정보 시스템을 생각해보면 아마 전혀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눈으로 보지 못한 소상팔경을 수 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던 그 시대의 그 현상을 간단히 유행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습니다. 소상팔경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점입니다. 생산자도 소비자도 누구도 실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상상 속의 소상팔경을 그려내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소상팔경도가 사대부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렸던 왕을 꼽으라면 고려 시대의 명종(明宗 1170-1197)일 것입니다. 고려 명종은 신하들에게 소상팔경에 대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하고 그 글의 내용에 따라 소상팔경도를 그리라고 이광필(李光弼)이라는 화가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소상팔경도는 이렇게 왕의 명령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보면 소상팔경도의 특수성을 알 수 있습니다. 소상팔경도는 실물을 얼마나 똑같이 멋있게 그리느냐 하는 종류의 작업이 아닌 상상 속의 명승을 얼마나 품격있게 그리느냐 하는 종류의 작업이다 보니 화가들에게는 이미 한계가 주어진 그림입니다. 문기(文氣)가 넘치는 문인 화가들에게 소상팔경도는 기교적으로 너무 어려운 그림이고, 숙달된 기교를 갖고 있는 화가들에게는 자칫 문향(文香)을 느낄 수 없는 천박한 그림으로 전락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라고 할까요? 화가들이 끊임없이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염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그려야 하는 그림, 그린 후에도 사대부의 품평에 등급이 매겨지는 그런 그림. 그래서 사대부들이 이 그림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사대부들의 학식은 왕족의 학식을 뛰어넘겠지요. 그러니 왕족 소비자도 사대부 감정가에게 품평을 요청할 것이고 이 기회에 자신의 교양을 뽐낼 수 있는 사대부에게 소상팔경도의 테마는 참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성리학을 국가 사상으로 운영했던 당시 소상팔경은 성리학도들에게 고전적인 배경이 풍부한 절승으로 높게 평가 받은 점도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 시절 단양팔경을 만들기 위해 단양군의 경계까지 확장시켰던 걸 보면 사대부에게 소상팔경이란 정말로 유교적 최고의 절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 소상팔경도가 인기가 있던 것은 왜 일까요? 그 이유는 그림만으로 추측해 내기에는 너무 무리이고 아무래도 일반 민중들의 다른 장르 예술에서 추론을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소상팔경 (瀟湘八景)

 

조선 시대 대표적 민중 예술은 판소리와 탈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판소리의 수궁가와 심청가에서 소상팔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판소리의 대본을 보면 소상팔경을 묘사하는 대목의 내용이 많이 축약이 되어 부정확하지만 판소리계 소설본을 살펴보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된 내용이 있습니다.

소상강 들어가니 … 소상팔경이 눈앞에 벌여 있어 찬찬히 둘러보니 물결이 아득한데, '주루룩 주루룩' 내리는 비 …'소상강 밤비'가 이 아니냐. [제1경 瀟湘夜雨] 칠백 평 호수 맑은 물에 가을달이 돋아오니 하늘의 푸른 빛이 물 위에 어리었다. 어부는 잠을 자고 소쩍새만 날아드니 '동정호 가을 달'이 이 아니며 [제7경 洞庭秋月], 오나라 초나라 너른 물에 오고가는 장삿배는 순풍에 돛을 달아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야, 어기야, 어야. 소리하니 '먼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가 이 아니냐. [제6경 遠浦歸帆] 강 언덕 두서 너 집에 밥짓는 연기 나고, 강 건너 절벽 위에 저녁노을 비쳐오니 '무산의 저녁노을'이 이 아니냐. [제8경 漁村夕照] ……푸른 물 하얀 모래 이끼 낀 양쪽 언덕에 시름을 못 이기어 날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하나 입에 물고 점점이 날아들며 '끼룩끼룩' 소리하니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가 이 아니냐. [제2경 平沙落雁] ……새벽 종 큰 소리에 경쇠 소리 뎅뎅 섞여 나니 배 타고 온 먼 길손의 깊이 든 잠 놀래 깨우고, 탁자 앞의 늙은 중은 아미타불 염 불하니 '한산사 저녁 종'이 이 아닌가. [제3경 煙寺晩鍾]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워밍업으로5분-10분 내외 짧게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허두가라고 부르는 이 연습곡은 주로 판소리 내용 중 주요 대목을 부릅니다. 이 허두가는 나중에 단가라는 형식으로 정착되어 독립적인 노래로 불리웁니다. 서양 오페라의 아리아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 단가 중에 소상팔경이라는 단가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소상팔경은 어려운 한자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평민들에게 친숙해져 갑니다. 탈춤에서도 소상팔경이니 소상반죽(瀟湘斑竹)이니 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흥을 돋구는 대목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소상팔경 구경가자'고 합니다. 탈춤의 신명에 빠져드는 평민들에게 소상팔경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즐거운 곳, 현실의 고통을 모두 잊을 수 있는 유토피아로 인식이 되어집니다. 판소리 수궁가와 심청가에서 묘사되는 소상팔경을 상상하며 고단한 현실을 떠나 잠시 행복한 꿈을 꾸어볼 수 있었던 평민들. 장터에서 몇 푼 주고 사다 벽에 붙여 놓은 싸구려 소상팔경도 한 두 장도 그들에게는 정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고 사대부 사랑방의 고아한 병풍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값진 보물이었을 것 같습니다.

 

中國의 샤오샹빠징(瀟湘八景)

 

이제 시계를 다시 현재로 돌려 中國의 샤오샹빠징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1경 瀟湘夜雨 (永州 城東) 영주 강변의 밤비 내리는 풍경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의 제1경 瀟湘夜雨의 무대는 용저우(永州)입니다. 용저우(永州)에서는 두 큰 물줄기가 만납니다. 하나는 샹장(湘江)이고 다른 하나는 샤오슈이(瀟水)입니다. 샹장(湘江)은 후난셩(湖南省) 옆 광시셩(廣西省) 싱안셴(興安縣)에서 발원하여 꾸이린(桂林)을 거쳐 용저우(永州)를 통해 둥팅후(洞庭湖)로 흐릅니다. 샹장(湘江)으로 합수되는 많은 지류는 紫水, 白水, 應水. 石基河 등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샤오슈이(瀟水)입니다. 샤오슈이(瀟水)는 용저우(永州) 성 동쪽 핑저우(萍洲)에서 샹장(湘江)에 합수가 됩니다. 바로 이 핑저우(萍洲)가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의 제1경 瀟湘夜雨의 무대입니다. 밤비 내리는 핑저우(萍洲)의 풍경이 瀟湘夜雨의 畵材인 것입니다.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의 무대가 용저우(永州)에서 샹장(湘江)을 따라 둥팅후(洞庭湖)에서 끝난다면 샤오슈이(瀟水)의 존재는 그냥 생략해도 될 법한데 왜 굳이 샤오슈이(瀟水)의 존재를 포함시켜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이라고 했을까요? 샤오수이(瀟水)의 발원지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지우이샨(九嶷山)이 나옵니다. 지우이샨(九嶷山)은 후난셩 남쪽 광둥셩과의 경계에 있습니다. 지우이샨(九嶷山)에는 아홉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제일 높은 봉우리가 슌웬펑(舜源峰)입니다. 이 舜源峰에 설화시대 중국의 성군 순제의 능이 있습니다. “순제가 南巡 도중 사망해 九嶷에 묻혔다”라는 기록이 史記에 남아 있습니다. 지우이샨(九嶷山)이 순 임금의 설화가 묻힌 곳이라는 증거는 다른 봉우리 이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홉 봉우리 중 어황펑(娥皇峰)과 뉘잉펑(女英峰)이 있습니다. 바로 순제의 두 부인 이름입니다.

娥皇과 女英의 전설은 여럿이지만 屈原의 楚辭 <九江>의 기록에 의하면 두 여인은 순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샹장(湘江)과 샤오슈이(瀟水)를 거슬러 올라와 울다울다 피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또 이 피눈물이 대나무에 점점이 박혀 점박이 대나무인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점박이 대나무가 바로 소상반죽(瀟湘斑竹)인 것입니다. 장례가 끝난 후 어황(娥皇)과 뉘잉(女英)은 다시 샤오슈이(瀟水)와 샹장(湘江)을 따라 내려가다 함께 투신 자살해 샹장(湘江)을 지키는 여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瀟와 湘의 물길은 지우이샨(九嶷山)에서 시작해 둥팅후(洞庭湖)에서 끝납니다. 둥팅후(洞庭湖)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로 모든 물을 받아들였다 다시 창쟝(長江)으로 내보냅니다. 둥팅후(洞庭湖)의 물이 창쟝(長江)으로 나가는 출구에 쥔산(君山)이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대지의 모든 물이 둥팅후(洞庭湖)로 모이고 둥팅후(洞庭湖)의 물은 쥔산(君山)의 우물로 다시 솟아오르듯 많은 전설도 둥팅후(洞庭湖)로 모였다 쥔산(君山)에 다시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순제의 두 부인의 무덤인 얼훼이무(二妃墓)도 쥔산(君山)에 모셔졌습니다. 지금도 二妃墓 주위에는 키 큰 샤오샹반쥬(瀟湘斑竹)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君山의 二妃墓

 

옛날 옛적에 중국이 태평성대인 시절 순 임금의 설화가 바로 지우이샨(九嶷山)에서 둥팅후(東庭湖)까지의 무대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샹장(湘江)은 많은 지류 중 유독 샤오수이(瀟水)와 함께 묶여 샤오샹(瀟湘)이라 불리웁니다.

샤오샹(瀟湘)은 설화가 흐르는 길이기도 하지만 권력이 오르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용저우(永州)에는 唐시대 대문호 류종웬(柳宗元 773-819)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柳宗元은 정치적 패배로 중앙에서 좌천되어 영주 사마로 10년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柳宗元은 永州에서의 10년 동안 많은 작품들을 쏟아냅니다. 柳宗元 뿐 아니라 수많은 정치인들이 샤오샹(瀟湘)을 오르내립니다. 광시(廣西), 광둥(廣東), 윈난(雲南), 하이난(海南)으로 발령 받은 고급관리들이 이 길로 오르내렸습니다. 때로는 좌천되고 때로는 귀양을 가는 거물들도 이 길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다시 중앙권력으로 올라가는 샤오샹(瀟湘)의 길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2경 平沙落雁 (衡陽市回雁峰) 강변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샤오샹(瀟湘)은 또한 경제의 통로입니다. 육로와 육상운송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수로와 수운은 가장 경쟁력 있는 교통 인프라였습니다. 이 수로를 통해 세금 뿐 아니라 많은 물자가 이동을 했습니다. 둥팅후(洞庭湖)에서 지우이샨(九嶷山)에 이르는 샤오샹(瀟湘)의 수로는 唐과 宋 시대에 주요 교통로로 이용 되었습니다. 이 샤오샹(瀟湘)의 수로는 짧은 육로를 거쳐 광둥셩 북쪽의 롄장(連江)의 물길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쥬장(珠江)의 물길을 따라 광저우(廣州)에 이르고 또 마카우까지 수운이 가능해집니다.

샤오샹(瀟湘)의 물길을 따라 하류로 배를 띄우면 샤오샹(瀟湘)의 八景을 차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용저우(永州)를 떠나 북으로 내려가면 곧 헝양(衡陽)이 나옵니다. 헝양(衡陽)은 南岳 헝샨(衡山)의 남쪽에 자리잡은 도시입니다. 衡山에는 모두 72봉이 있는데 제일 먼저 보이는 봉우리가 호이옌펑(回雁峰)입니다.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날아온 기러기떼가 回雁峰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가지 않고 겨울을 난 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봉우리 이름이 回雁峰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回雁峰 아래 강변 모래톱에서 노니는 기러기의 모습이 제2경 平沙落雁입니다.

 

 

운해에 쌓인 衡山

 

3경 煙寺晩鐘 (衡山縣城北淸凉寺) 안개 속 산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헝샨(衡山)은 중원의 五岳 중 南岳입니다. 오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中岳 슝산嵩山, 東岳 타이샨(泰山), 北岳 항샨(恒山), 西岳 화샨(華山), 南岳 헝샨(衡山). 漢시대의 南岳은 안휘성 톈쥬샨(天柱山)이었었습니다. 天柱山은 李白, 蘇軾, 王安石 같은 문인들이 은퇴 후 은거하고 싶어했던 명산입니다. 하지만 衡山이 南岳의 명예를 天柱山으로부터 뺏어옵니다. 衡山은 산기운이 범상치 않아 많은 불교, 도교 사원이 있는 불교, 도교의 성지이며 주봉인 祝融峰은 해발 1290미터 높이입니다.

衡山의 많은 사원 중에 淸凉寺가 있습니다. 이 사원은 샹장(湘江)에서 멀지 않아 지나가는 배들이 이 절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안개에 쌓인 淸凉寺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가 제3경 煙寺晩鐘입니다.

 

 

 

안견의 煙寺晩鐘

 

4경 山市晴嵐 (昭山) 아지랑이 속의 산마을

 

헝샨(衡山)을 지나 150킬로 정도 지나면 쟈오샨(昭山)이 나옵니다. 昭山은 현재 행정 지명으로 湘潭市 岳塘區에 속해 있습니다. 그림 속의 昭山은 조용한 산마을의 모습입니다. 湘潭市에는 昭山과 비슷한 명칭의 지명이 있습니다. 바로 샤오샨(韶山)입니다. 韶山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일년 내내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좀더 가면 류사오치(劉少奇)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花明樓라는 곳입니다. 마오쩌둥이 중국인민에게 존경 받는 인물이면 류사오치는 중국인민에게 사랑 받는 인물입니다. 花明樓는 창샤(長沙)에 속하는 곳입니다.

 

5경 江天暮雪 (長沙橘子洲) 저녁 눈 내리는 강의 풍경

 

창샤(長沙)는 샹장(湘江)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샹장(湘江) 가운데는 여의도와 같은 모래섬이 있습니다. 모양은 뱀이나 벨트처럼 기다란 모양으로 생긴 이 섬의 이름은 쥐즈쩌우(橘子洲)입니다. 귤나무가 자라서 붙은 이름입니다.

2004년 2월 저도 橘子洲에 서서 샹장(湘江)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橘子洲가 江天暮雪의 무대입니다. 저녁 눈 내리는 橘子洲의 풍경이 5경 江天暮雪입니다. 제가 橘子洲를 찾은 날에는 아쉽게도 눈 대신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귤나무가 자랄 정도로 따뜻한 곳이니 겨울이라도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샹장(湘江)의 동쪽 강변에는 마오쩌둥이 수학하던 제일사범학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샹장(湘江)의 서쪽 강변으로는 웨루샨(岳麓山)과 웨루슈웬(岳麓書院)이 있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橘子洲를 뒤로 하고 岳麓山을 찾았습니다. 岳麓山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나 역내 택시를 이용해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岳麓山에서 내려본 長沙. 湘江 가운데가 橘子洲.

 

岳麓山 위에서 남쪽 길로 하산하면 아이완팅(愛晩亭)이라는 정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이 청년시절 종종 찾았다는 곳입니다. 愛晩亭이라는 현판도 마오쩌둥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더 아래로 내려오면 천년학부 岳麓書院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학교라고 자랑하는 곳입니다. 서기 976년 北宋시절 개교하였습니다. 岳麓書院이 유명한 것은 오래된 역사 뿐 아니라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1050년 즈음에 주돈이(周廉溪)가 정호(程明道)와 정이(程伊川) 형제를 岳麓書院에서 가르칩니다. 100년 뒤쯤 朱熹가 이들의 이론을 집대성해 성리학을 완성합니다. 그래서 性理學의 다른 이름이 程朱學으로 불리웁니다. 朱熹 역시 岳麓書院에서 교무처장도 하고 강의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을 최고의 사상으로 여기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岳麓書院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岳麓書院 앞에 흐르는 샹장(湘江)에도, 지우이샨(九嶷山)에서 둥팅후(洞庭湖)에 이르는 샤오샹(瀟湘)의 풍경에도 따듯한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6경 遠浦歸帆 (湘陰縣城江邊) 멀리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들의 모습

 

창샤(長沙) 쥐즈쩌우(橘子洲)를 지나 북으로 70킬로 정도를 더 내려가면 샹인(湘陰)이 나옵니다. 둥팅후(洞庭湖)가 멀지 않은 이곳에 번성한 어촌이 있었다고 합니다. 둥팅후(洞庭湖)로 나가 고기잡이 하던 배들이 저녁이 되어 어촌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6경 遠浦歸帆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둥팅후(洞庭湖)로 들어가기 직전 멱라강을 만납니다. 屈原의 묘와 사당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7경 洞庭秋月 (洞庭湖) 동정호의 가을 달

 

둥팅후(洞庭湖)는 수평선이 보이고 파도가 치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이 거대한 호수 위로 둥근 달이 뜬 가을밤의 모습이 제7경 洞庭秋月입니다. 둥팅후(洞庭湖)는 또한 동서남북의 물길을 연결하는 교통망의 허브이기도 합니다. 둥팅후(洞庭湖)가 북으로 흘러 창장(長江)으로 들어가기 전 호수 안에는 쥔샨(君山)이라는 섬이 있고 호수 밖 뭍에는 웨양(岳陽)이 있습니다. 웨양(岳陽)의 언덕 위에 둥팅후(洞庭湖)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성루가 섰는데 그곳이 바로 웨양루(岳陽樓)입니다. 교통의 길목에 있기 때문에 수많은 명인들이 이곳을 찾아 둥팅후(洞庭湖)를 감상했고 시인,묵객들은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웨양루(岳陽樓)에 올라 둥팅후(洞庭湖) 바라보며 두보의 등악양루 첫구절을 생각했습니다.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동정호 유명하다는 것은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岳陽樓와 洞庭湖

 

岳陽樓에 올라 시와 글을 남긴 문인이 수없이 많습니다.대충 눈에 띄는 이름만 꼽아보아도 孟浩然, 李白, 杜甫, 韓愈, 劉禹錫, 白居易, 李商隱 등등…… 우리나라에서는 두푸(杜甫)의 덩웨양루(登岳陽樓)가 가장 유명하지만 중국에서는 판중옌(范仲淹)의 웨양루지(岳陽樓記)라는 산문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래서 岳陽樓에 들어가면 1층 정면에 范仲淹의 岳陽樓記가 걸려 있습니다. 특히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먼저 세상의 근심을 근심하고, 뒤에 세상의 즐거움을 즐기자)라는 문구는 최고의 구절로 찬양 되고 있습니다.

 

 

웨양루(岳陽樓) 누각 1층 정면에 걸린 岳陽樓記

 

웨양루(岳陽樓)에서 둥팅후(庭湖)를 대하면 건너편으로 쥔샨(君山)이 보입니다. 쥔샨(君山)은 옛시절 둥팅샨(洞庭山) 또는 샹샨(湘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습니다. 과거에는 君山으로 가려면 岳陽樓 아래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지만 이제는 육로로 돌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洞庭湖의 水位가 계속 낮아져 호수 바닥이 육지로 드러나면서 육로가 생긴 것입니다. 때문에 唐 시대에는 “푸른 소라” 모양이던 섬이 이제는 훨씬 더 커지고 넙적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唐 시대 岳陽樓 에 올라 君山을 노래하던 劉禹錫의 시를 소개합니다.

湖 光 秋 色 兩 相 和 은빛 호수와 가을 풍경이 서로 저리도 고운지

潭 面 無 風 鏡 未 磨 바람 없는 호수는 티없는 거울 같구나.

遙 望 洞 庭 山 水 翠 멀리 군산을 바라보니 푸른 산과 푸른 물,

白 銀 盤 裏 一 靑 螺 하얀 은쟁반 위에 푸른 소라 모습이어라!

쥔샨(君山)은 또한 名茶 쥔샨인쩐(君山銀針)의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인쩐(銀針)은 바늘 모양의 형태와 표면의 하얀색 털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경발효된 黃茶 종류로 綠茶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습니다. 문득 배를 타고 둥팅후(庭湖)를 유람하면서 쥔샨인쩐(君山銀針)을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경 漁村夕照 (西洞庭武陵溪) 어촌의 지는 해

 


桃花源 導遊圖

 

둥팅후(洞庭湖)의 서쪽에 웬장(沅江)을 따라 가면 타오화웬(桃花源)이 나오는데 이곳의 白鱗洲村이란 어촌이 제8경 漁村夕照의 무대입니다. 이 어촌 앞 강폭이 넓어 해가 질 때마다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이 桃花源은 많은 기록에 武陵溪 桃花源으로 표기됩니다. 陶淵明의 <桃花源記>에 “武陵人捕魚爲業 (무릉인은 고기잡이를 업으로 산다)”라는 구절 때문에 많은 사람이 桃花源을 武陵溪라고 부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정확한 행정명칭으로는 常德市 桃花源鎭입니다. 위 지도는 常德市 웹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지도 왼편에 붉은점이 있고 漁村夕照라고 표기한 것이 보입니다.

 

샤오샹빠징(瀟湘八景)과 후난런(湖南人)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을 돌아보면 단지 아름다운 경치 뿐 아니라 넓고 기름진 땅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둥팅후(庭湖)와 수많은 江,水들이 대지를 마르지 않게 해주니 농경시대 때 이곳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땅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고대 舜 임금의 전설이 담겨 있는 곳, 또 성리학을 완성한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해 낸 땅입니다. 이런 역사를 누가 자랑스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 후난셩(湖南省) 출신이니 후난런(湖南人)의 자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중시하는 사람은 전통을 인정하고, 전통을 따르는 사람의 생활태도는 보수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湖南人은 또한 전설과 우주론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을 합니다. 그들의 이상주의적 성향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요? 보수적이면서 이상주의적인 湖南人의 복잡한 성향을 湖南이 자랑하는 두 인물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湖南人이 높게 평가하는 湖南 출신 인물 중에 증궈판(曾國藩,1811-1872)이 있습니다. 曾國藩은 청 시대 말 湖南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실력자입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베이징의 중앙정부는 태평천국 군대를 격파할 무력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 曾國藩이 湖南에서 샹쥔(湘軍)이라는 의용군을 조직해 태평천국 군대를 격파합니다. 이 점에서 현 중화인민공화국은 曾國藩과 湘軍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민세력이 봉기한 반체제 혁명전쟁이었던 태평천국운동에 반대하여 봉건주의 청조를 위해 싸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湖南人들은 湘軍을 자랑스러워하고 曾國藩을 존경합니다. 湘軍은 의용군이지만 정규군 이상의 용맹함으로 위명을 떨칩니다. 그 이유는 湘軍의 조직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湘軍은 모두 혈연과 지연 그리고 사제의 관계로 뭉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위태로운 상황이면 서로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용감히 싸웠던 것입니다. 湘軍은 그야말로 湖南人의 연고주의가 결집된 湖南의 무력이었습니다. 그래서 曾國藩은 단지 군대의 지휘관이 아닌 湖南을 하나로 뭉치게 해서 湖南을 이끌었던 진정한 湖南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보수적 정치관의 曾國藩은 中體西用이라는 洋務運動을 펼칩니다. 그는 중국의 근대산업의 탄생을 위해 많은 공장을 건설을 지원합니다. 그런 모습의 曾國藩은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인물입니다.

 

100년 세월 뒤 湖南人은 또다른 걸출한 지도자를 갖게 됩니다.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입니다. 湖南을 중심으로 농민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공산주의 국가를 건립합니다. 그의 이상주의는 모두가 노동하고 공동배분 받는 완전평등의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기어이 문화혁명을 일으켜 中國을 암흑의 시기로 몰고 갑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이상주의의 극단입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자답지 않게 항상 근면하고 검소하고 주위에 다정다감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책을 들고 시를 쓰는 그의 생활태도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두 인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무신 출신이 아닌 문신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강하게 추구했고 권력쟁취를 위해 무력을 존중했습니다. 또한 湖南의 동향들을 중심으로 자기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湖南人. 그들의 마음 속에는 패기가 숨어 있습니다. 洞庭湖의 물은 담수이지만 洞庭湖의 잉어를 요리하는 湖南人의 요리솜씨는 맵습니다. 중국요리 중 쓰촨(四川菜)요리가 맵다지만 호남(湖南菜)요리도 매운 것으로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천사람은 매운 걸 두려워하지 않지만, 호남사람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湖南菜의 대표요리 생선머리찜은 붉은고추와 푸른고추를 버무려 찜을 하는 요리입니다. 맛이 순한 재료에 독한 맛의 양념을 뿌려먹는 湖南人. 그들의 순한 모습 안에는 독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의 독한 마음과 어울리려면 그들의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湖南菜의 매운 맛을 견디려면 湖南의 쥔샨인쩐(君山銀針)과 함께 들면 됩니다. 君山銀針의 독특한 차맛이 후난 고추의 매운맛을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湖南人을 가까이 사귀는 사람들은 湖南人을 평하길 정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湘女多情”이라는 말은 많은 공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황(娥皇)과 뉘잉(女英)의 전설을 들어서 그런 걸까요? 샤오샹빠징(瀟湘八景) 이 저를 湖南으로 이끌었지만 湖南은 아리한 湖南菜의 뒷맛처럼 또 달큰한 銀針茶의 뒷맛처럼 긴 매력을 남기는 곳입니다. 샤오샹빠징(瀟湘八景)의 窓을 통해 본 湖南人. 그들의 모습이 瀟湘八景의 오랜 그림처럼 희미하게 그려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