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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

꿈꾸는 구름 나그네 2012. 8. 21. 11:28

 

 

 

 5년 전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골리앗'에 맞선 '다윗'이었다. 박 후보는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명박 후보에 맞서 선전했다. 하지만 1%포인트 차이도 나지 않는 근소한 차이로 졌다.

그러나 경선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이후 그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지난해 말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돼 당 쇄신을 이끌 때까지 그는 내내 당의 비주류로 남았다.

20일 그는 '골리앗'이 됐다.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여파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한 데 이어 지난해 말 또다시 구원투수로 등판, 당을 과반 정당으로 이끈 결과를 바탕으로 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재수 끝에 국내 정당사상 처음으로 유력 정당의 여성 대선 후보로 선출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노리게 됐다.



스케이트를 사랑한 소녀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올린 소녀 시절 사진.



박 후보의 인생은 겉으론 화려하지만 굴곡의 연속이다. 대통령의 딸, 퍼스트 레이디라는 권력의 최정점을 맛보았지만 양친을 모두 총탄에 잃었다. 정치에 입문해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도 당했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인 부모는 동시에 그림자이기도 하다. 박 후보 자신도 유세 도중 피습당했다.

박 후보는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원칙과 신뢰'라고 강조한다. 세종시 원안 고집 등에서 보듯이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때로는 불통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도 할 줄 아는 유연한 지도자로 자부한다. 2007년 경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작은 정부'와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치는 세우자)에서 벗어나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강조하는 것이 그 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1979)
1979년 10·26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박 후보.



■ 군인의 딸, 대통령의 딸

박 후보는 1952년 대구에서 당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대통령의 딸이 되었고, 육 여사가 1974년 서거한 뒤부터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때까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이런 군인의 딸, 대통령 딸로서의 생활이 그를 자연스럽게 정치의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후보는 "저는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 직접 보며 자랐다"고 말한다. '멘토'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아버지"를 꼽는다.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박 후보는 밥상머리는 물론 차 안에서까지 일상적으로 정치에 노출돼 있었다"면서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첫 마디로 '휴전선은 안전하냐'고 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머니는 정부의 입장을 잘 아시고, 충분히 이해하시면서도 항상 철저히 국민 입장에 서셨습니다. 항상 국민 입장에서 생각하시는 것이 습관이 되신 듯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마주 앉아 나라나 사회문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시게 되면 그곳은 축소된 대한민국이었지요. 아버지는 정부시고, 어머니는 국민이시고."(여성동아 1988년 11월호)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그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만 빼놓고는 평범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가서 늦은 밤까지 공부에 매달리느라 미팅 한 번 못해봤다. 서강대 이공학부 수석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그러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인생에 파랑이 일었다. 학자의 꿈을 접고 급거 귀국한 그에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이 주어졌고, 이는 '정치인 박근혜'로 연결됐다.

■ 대중 시야에서 사라진 18년

하지만 박 후보가 늘 국민의 시선에 노출된 것만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건 이후 그는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도 내가 걸어온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2007년 자서전)

박 후보가 대중 앞에 다시 선 것은 9년 뒤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였다.

당시 그에게는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알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박 후보는 1989년 일기에서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고,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다"며 "아버지가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고 적었다.

이런 박 후보인 만큼 5·16 쿠데타와 유신에 대한 인식도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았다. 그는 1989년 MBC 인터뷰에서 5·16에 대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연 5·16이 없다, 또 유신이 없다고 하면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 이 땅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은 시기의 박 후보 행적은 그만큼 그에게 부담이기도 하다. 2007년 경선 당시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증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최태민 목사 관련 의혹'이다. 당시 최 목사와 박 후보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는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얘기, 애가 있다는 등 이런 얘기까지 나왔다"며 "만약에 애가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그 애를 데리고 와도 좋다. 제가 DNA 검사도 다 해주겠다"고 대응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유가족 생계비를 받았다는 의혹엔, " '박 대통령이 쓰시다 남은 돈이다. 아무 법적인 문제가 없으니까, 지금 생계도 막막하니까, 생계비로 쓰라'고 해 6억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 방문 김정일 면담 (2002)
2002년 북한을 방문,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박 후보.



■ 정계 입문, 선거의 여왕으로

이렇게 '개인 박근혜'로 18년을 보낸 그는 1998년 정치인으로 대중 앞에 재등장했다. 박 후보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 나는 정치인 박근혜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1998년 4월2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그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서 내리 4선을 했다. 이회창 총재가 한나라당을 장악했던 2002년 그는 총재직 폐지, 상향식 공천제 도입, 대선후보 국민참여경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정당 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총재직 폐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남성 정치인들보다 의지가 굳다는 평을 들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정희의 딸'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박 후보가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빛을 발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을 맞아 어려운 한나라당을 구한 것이다. 2004년 4월15일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박 후보의 말 그대로 '난파선'이었다. 그는 당 대표로 선출된 바로 이튿날 국회 앞 번드르르한 당사를 버리고 여의도 천막당사로 옮겼다. 시가 1000억원이 넘는 건물과 토지가 포함된 천안 한나라당 중앙연수원은 국가에 돌려줬다.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의석만 달라"며 손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끝에 121석이라는 의미있는 의석을 얻었다.

이후 박 후보는 각종 보궐선거, 지자체 선거 등의 지원유세에 나서 승리를 이끌며 자타공인 '선거의 여왕'이 된다. 박 후보는 어려운 상황에서 당을 지지해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신뢰의 정치인'으로서 이미지를 구축한다.

 

                                                           한나라당을 구하다 (2004)
              박 후보가 2004년 탄핵 역풍을 맞아 여의도 당사를 국가에 헌납한 뒤 천막 당사로 이주하기 위해 현판을 떼고 있다.

정치적 성장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를 하던 중 그는 서울 신촌에서 오른쪽 뺨을 면도칼로 베이는 중상을 입었다.

"수술대에 오르자 부모님 생각이 났다. 총상으로 고통스러우셨을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이 수술하는 내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부모님도 이와 같이 암담한 심정이셨으리라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살아오면서 남들이 겪지 못한 고통을 수없이 겪었지만 이런 육신의 고통이 또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피습된 지 며칠 뒤 특유의 침착함으로 국민에게 어필했다. 병석에 누워 있던 그는 선거 상황을 보고하러 온 당직자에게 "대전은요?"라며 격전지인 대전 상황을 물었다. 열세이던 대전 판세를 움직인 한마디였다.

박 후보는 2년3개월여 당 대표 재임기간에 자신이 했던 정당 개혁을 중요한 성과물로 꼽는다.

의원총회를 당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실상 당 대표가 주무르던 공천을 포기하고 상향식 공천을 실천한 점 등이 대표적이다.

2005년 대선후보 선출 규정도 혁신위원회를 꾸려 9개월 동안 의견을 수렴해 확정했다.

박 후보가 이번 경선에서 다른 주자들의 룰 변경 요구에, "1000표 드릴 테니 원안대로 하자" "당원이 만든 원칙을 걸레로 만드나" 등의 강한 발언을 쏟아놓은 것처럼 경선 룰 수정 등 당헌·당규에 손을 대는 일을 극히 꺼린 것도 당시 룰을 성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선 패배 깨끗한 승복 (2007)
박근혜 후보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진 뒤 승복 연설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 경선 패배, 그리고 부활

그는 2007년 첫 대권 도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경선이 곧 본선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하고 치열하게 치러진 이명박 후보와의 경쟁에서 그는 한계를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념적 한계다.

그는 정당사상 최초로 이뤄진 검증 청문회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거나 "유신체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이런 역사인식이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 시비에 실망해 등을 돌린 선거인단을 흡수하는 데 장벽이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명박 후보가 '한반도 대운하' '747(10년간 7% 성장, 1인당 GDP 4만달러, 세계 7위의 경제강국)' 등 확실한 브랜드를 구축한 반면 박 후보는 '반대 전략'으로 일관했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시장을 지낸 이 후보가 대세론으로 수도권의 지지세를 끌어들인 반면 박 후보는 수도권에서 열세를 드러냈다.

하지만 박 후보는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당원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 치열했던 경선 과정의 일을 모두 잊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 몇날이 걸려서라도 잊자"는 흔쾌한 승복 연설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명박 정권 내내 그는 침묵했다. 박 후보는 "사사건건 말하면 불협화음이 나니까 잘되라는 마음에서 조용히 있다"고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 내쳐질 때와 '국민과의 약속'이 어그러질 때였다. 경선 두 달여 뒤 사무처 당직자들이 인사조치되자 박 후보는 "저를 도운 게 죄인이 되느냐"고 반발했다. 또 이명박 정권 출범 후 치러진 18대 총선 때도 '친박 학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측근들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저는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고 이 대통령을 직공했다.

 

선거의 여왕, 다시 부활 (2012)
2012년 4·11 총선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유세하는 박 후보.



박 후보를 '여당 내의 야당'으로 각인시킨 것은 세종시 문제다.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위헌판결을 받고 난 뒤 한나라당이 공당으로서 약속했던 정부기관 이전 특별법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는 4~5년이 지나서도 변함없이 강조됐다. 그는 자서전에 "이 법이 통과되고 난 다음에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행정중심복합도시는 백지화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사전에 약속을 깨는 일은 없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라고 적었다.

박 후보는 2009년, 2010년 정부가 세종시 수정법안을 제출하자 "엄연한 약속인 만큼 지켜야 한다"며 본회의에서 반대 발언을 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등으로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은 이 대통령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박 후보에게 또다시 손을 내민다.

추대 형식으로 비대위원장이 돼 당권을 받은 박 후보는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해 비대위원회를 꾸리고 쇄신작업을 시작한다. 당명은 새누리당으로, 당의 색은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다. 정강·정책에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다. 2010년 11월19일 한나라당 출범 13주년 기념식에서 박 후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몇백년 가는 정당이 될 수도 있고 국민의 버림을 받고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4·11 총선에서는 과반 의석을 얻어 '선거의 여왕'임을 또다시 입증했고 새누리당은 명실상부한 '박근혜당'이 됐다.

<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근대화의 아버지'와 '독재자'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 뒤 2007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됐다.

◇출생과 학창 시절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 와 육영수 사이의 첫딸로 태어났다. 재혼의 박정희는 당시 35세, 초혼인 육영수는 27세였다. 박근혜 가족은 이어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옮겨다니다 1958년 신당동에 있는 대지 100평, 건평 30평의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근혜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박근혜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 [조선일보]박근혜 후보(왼쪽에서 둘째)가 지난 1979년 4월 부친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함께 육사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과 악수하고 있다.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박근혜 가족의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지만 박근혜와 동생 근령은 신당동 집에 살던 외할머니 이경령에게 맡겨졌다. 어머니 육영수가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통학하게 되면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대통령의 딸로 사는 것에 대해 박근혜는 "혜택을 누린 점도 있겠지만 청와대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나날"이라고 했다. 성심여중 1학년 때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 박근혜는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즈음 전차 차장이 성신여중 배지를 단 박근혜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라고 꼬치꼬치 물었다.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는 질문에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 "잘하나 봐요"라고 대답했다고 박근혜는 2007년 자서전에서 밝혔다.

성심여중 시절 단짝 몇 명이 청와대에 놀러 왔다. 가족실과 박근혜의 방을 둘러본 친구들의 반응은 "뭐야,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였다고 한다. 점심 도시락도 잡곡밥에 달걀말이, 콩자반과 깍두기 정도로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박근혜는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박근혜는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했다. 등하교 때 신촌로터리까지 관용차를 타고 가서 학교까지는 걸어 다녔다. 올 초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근혜는 "대학교 때 본받고 싶은,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박근혜가 서강대에 재학 중인 1972년 박정희는 '10월유신(維新)'을 추진했다. 대학가에는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근혜는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고 데모하다 2학년 때 퇴교당한 과(科)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들은 박근혜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취직과 복교를 돕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10·26


어머니가 1974년 8·15 경축행사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생활을 접고 급거 귀국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때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22세의 박근혜에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일기, 1974년 11월 10일).

박근혜는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다.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박근혜는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주제는 점차 국방·외교로 넓어졌다. 박근혜는 그것을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정희와 카터는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인권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이때 박근혜는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위협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로잘린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나눈 대화를 남편에게 전달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박근혜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옷을 갖춰 입고 나간 박근혜에게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 순간 박근혜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근혜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김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고 답했다.

장례식은 9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박근혜는 청와대 대접견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았다. 박근혜는 당시를 돌아보며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큰 멍자국이 팔과 어깨, 다리까지 뒤덮었다"고 했다. 청와대 의무실 의사는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 1979년 11월 27세의 박근혜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트렁크 6개가 이삿짐 전부였다. 박근혜는 "그때부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되어야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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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대선 고지를 향한 마지막 장정에 나섰다. 12월19일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기간 영애(令愛)로서 머물렀던 청와대에 대통령 자격으로 재입성하게 된다. 사상 첫 부녀 대통령, 여성 대통령이다.


◆청와대에서 성장한 박근혜

박 후보는 영욕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성장했다. 1952년 2월 대구에서 박 전 대통령의 큰딸로 태어난 박 후보는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다. 1961년 아홉 살 때였다. 정치를 권부 핵심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배운 셈이다. 나라가 가난을 극복하고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봤다. 이런 경력은 박 후보 자신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그는 이번 경선 과정에서"어려서부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법을 가까이서 배웠다", "젊은 시절부터 국가위기를 극복하는 법을 아버지로부터 밥상머리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딸'이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1974년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최측근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부친의 유고 소식을 들은 박 후보가 "휴전선은 어떠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된다. 훗날 박 후보는 "국가안보가 DNA처럼 몸속에 박혀 나온 조건반사적 얘기"였다고 설명했다. 청와대를 나온 박 후보는 걸스카우트 명예총재와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학교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았다.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유지가 깃든 사업이었다. 이 시절 박 후보는 철저히 몸을 낮추고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독서와 사색, 글쓰기로 소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후보는 이때 문인협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박근혜 후보의 10대 학창시절 모습.
출처=박근혜 후보 미니홈피

◆정치인 박근혜의 부침

박 후보는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하면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난 것이다. 46세인 1998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다. 박 후보는 정치 입문 이유에 대해 "IMF 사태로 고통받는 국민을 더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박 후보는 정치개혁안 등을 둘러싸고 이회창 총재와 갈등을 빚은 뒤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탈당 경력은 두고두고 박 후보를 괴롭혔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비박(비박근혜) 후보들은 그의 탈당 전력을 공격 소재로 삼았다.

2년 뒤 한나라당에 돌아온 그는 불법대선자금 수수 사건과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로 벼랑 끝에 몰린 당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당사를 한강둔치의 '천막당사'로 옮기며 당 쇄신 작업에 박차를 가한 끝에 한 달 뒤 치러진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다. 이후 2년3개월간 대표로 있으면서 선거 때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완승해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실패로 끝난 첫 대권 도전

박 후보는 2007년 17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8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경선 결과에 승복한 뒤 '백의종군'했다. 18대 총선 공천 당시 친박(친박근혜)계가 대거 낙천되면서 친박계는 하루아침에 '비주류'로 전락했다. 박 후보는 2009년 미디어법 입법,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과정에서 친이(친이명박)계와 정면으로 맞서며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굳혔다.





박근혜 후보가 과거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 '방울이'와 함께 산책하고 있다.
출처=박근혜 후보 미니홈피

박 후보가 다시 '주류'로 복귀한 것은 또다시 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코앞에 닥친 4·11 총선 참패가 기정사실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주변에선 총선 패배 책임론을 걱정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독배'를 받아들였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환골탈태의 개혁을 추진했다. 지역구까지 버리고 링거를 맞으며 전국을 누볐다. 결과는 152석 과반 획득이었다.

◆마지막 대권 도전

박 후보는 검소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식탁에 떨어진 밥알 하나까지 주워먹으며 식사한다고 한다. 정치입문 당시 신었던 신발을 지금도 수선해 신고 다닌다. 이번 경선에 박 후보가 입은 옷은 모두 5벌 정도였다. '골동품' 수준의 헌옷들이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비범한 인생을 살아온 박 후보는 평생을 자신을 버리고, 절제하고,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거친 정치판에서 숱한 라이벌들과 겨루며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로 우뚝 섰다. 그가 내건 대선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국정의 기조를 국가에서 국민으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다짐이다. 선거의 여왕으로서도 마지막 대장정이다. '여왕'의 마지막 선거는 박근혜 자신만을 위한 선거다. 그의 운명은 국민의 선택에 달렸다. 대선까지는 이제 121일 남았다.

나기천 기자 na@segye.com

[Segye.com 인기뉴스]

 

(서울=연합뉴스) 20일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어린시절 모습. 2012.8.20 < < 연합뉴스 DB > >

 

(서울=연합뉴스) 20일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2012.8.20 < < 연합뉴스 DB >

 

 

 (서울=연합뉴스) 20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학창시절 모습. 2012.8.20

 

(서울=연합뉴스) 20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한 20대 시절의 모습. 2012.8.20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는 요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오버랩시키는 데 주력하는 반면, 야권은 박 후보에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드리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 후보는 1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육 여사의 38주기 추도식에서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고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둘 다 이루면서 꿈을 이뤄갈 수 있는 나라, 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어머니의 꿈이었다"며 "이제 그것이 제 꿈이 됐다"고 했다. "앞으로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고 저를 믿어주는 국민의 신뢰에 보답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대통령 후보로서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들겠다는 뜻이다. 박 후보는 그러면서 "우리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좀 더 제도화해서 깨끗하고 신뢰받는 정치로 바꿀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 [조선일보]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가 15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故) 육영수 여사 38주기 추도식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다. 박 후보 옆은 동생 지만씨. 지만씨의 부인인 서향희씨는 이날 참석하지 않았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 [조선일보]박근혜 캠프의 인터넷 홈페이지 첫 화면에 뜬 故 육영수 여사 사진.

 

 

박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5년 전 대선 경선 때는 박 후보가 경제성장과 법·질서를 강조하고 여성이란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이번엔 복지가 중심이기 때문에 육 여사가 좀 더 부각될 것"이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육 여사의 푸근하고 포용력 있는 이미지가 박 후보에게 필요하다는 점도 감안됐다"고 했다.

박 후보 캠프는 육 여사 38주기를 맞아 박 후보의 인터넷 홈페이지( www.park2013.com ) 첫 화면에 박 후보 사진 대신 육 여사의 흑백사진을 하루 전날인 14일부터 15일 오후까지 올려놓기도 했다. 사진 속 육 여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집 현관문을 열고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새는 박 후보를 연상시킨다. 캠프의 변추석 홍보본부장은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된 사진이 아닌, 박 후보가 소장하고 있는 가족사진 중에 받아서 쓴 것"이라고 했다. 이상일 캠프 대변인도 이날 광복절 논평에서 "육영수 여사가 꿈꿨던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를 반드시 구현할 것"이라고 했고, 박 후보를 지칭하면서 '육 여사의 따님인…'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반면, 야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 중 '어두운 측면'을 박 후보에게 덧씌우려 하고 있다. 야권 인사들은 박 후보를 둘러싼 사당화 논란, 불통 이미지, 정수장학회 문제 등도 박 전 대통령의 독재 정치를 박 후보가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박 후보가 최근 비박 후보들의 대선 경선 규칙 변경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때 민주통합당 정성호 대변인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와 유신으로 국가를 사유화하고 종신 집권을 추구했던 것이 연상된다"고 했다. 야권이 박 후보의 5·16 평가를 연일 비판하면서 박 후보에게 "쿠데타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박 후보에게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것이라고 새누리당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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